“저, 혹시 은혜제일교회 다니시지 않으셨어요?” 낯선 청년이 저쪽 테이블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와 조심스럽게 물었다. 1996년 여름 어느 날, 일곱 살 네 살 두 애와 윤수 엄마, 윤수, 윤수 동생 정호와 오금동 사거리의 피자헛에 들어가 막 자리를 잡아 앉았을 때였다. 두 애를 맡기는 하트하트 종합사회복지관의 어린이집에서 알게 된 윤수 엄마가, 윤수가 바이올린을 배운달 때 내가 큰애가 쓰던 바이올린을 빌려 준 게 고맙다며 피자를 사겠다고 해서 찾은 피자집이었다. 청년은 훤칠했다. 180센티미터를 훌쩍 넘은 듯 보이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무스를 발라 세련되게 세운 짧은 머리칼, 호감 가는 인상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건너온 테이블에는 애인이어 보이는 여성이 무슨 일인가 하는 눈빛으로 청년과 나를 보고 있었다. 허리를 구부정히 굽혀 나를 바라보는 그 청년은 내가 알지 못하는 청년이었다.
“네......누구신지......?” 내 말이 떨어지자 청년의 얼굴이 환해지고 목소리가 커졌다. “선생님, 저 용성이에요. 전용성.” “용성이.....? 어머, 세상에. 니가 이렇게 큰 거야? 어쩌면 여기서 이렇게 만나니?” 내 기억 속 용성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나는 대학 1학년생 교회 반사였다. “아, 선생님. 정말 반가워요.” 나도 반가웠다. 그러나 용성이가 그처럼 반가워할 만큼 우리 사이가 그렇게 가까웠나, 하는 의문은 있었다. 용성이는 애인을 저쪽에 앉혀 두고 아예 우리 테이블에 앉았다. 그리고는 옛 이야기를 쏟아냈다. “선생님. 제가 6학년 때요, 선생님이 저 새벽에 신문배달할 때 두르라고 목도리를 짜주셨잖아요.” “내가?” “곤색 목도리, 그거요, 선생님한테 받은 다음 날 그걸 하고 배급소에 갔는데 한 형이 그걸 뺏은 거예요.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선생님한테는 말도 못 하고......” “아, 그랬구나. 괜찮아.” 어제 일어난 일인 양 괜찮다는 말이 튀어나갔다. 따뜻한 미소를 실컷 주고받고, 어디 사느냐, 뭐 하느냐 정도의 안부를 묻고 우리는 헤어졌다.
목도리라. 집으로 돌아오면서 13년 전의 그 때를 더듬어 봤지만 목도리를 짠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용성이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생각나는 게 있었다. 집이 어려웠던 점, 붙임성이 있어서 청년부원들이 귀여워했던 점, 여름 수련회 때 시골길에서 나랑 어깨걸이를 하고 사진 찍었던 것......이 퍼즐 조각에 무엇을 보태면 목도리를 짜는 내가 나올까. 고1 봄, 자려고 누우면 누운 자리가 관 속으로 생각되었다. 어차피 죽을 건데 구태여 왜 사나, 하는 생각으로 머리가 차서 하루는 교실의 내 뒤에 앉은 영애한테 물었다. “너는 내세를 믿니?” 자기 교회를 나가면 답을 찾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찾은 교회가 용성이 입에서 나온 ‘은혜제일교회’였다. 정답을 만난 기쁨이었는지 정답에 가까이 가려는 오기였는지 나는 교회를 열심히 나갔다. 무의미한 삶을 의미 넘치는 삶으로 바꾸는 방법이 ‘사랑’이라는 데 동의해서 이것저것 했다. 덧버선을 짜서 판 돈으로 3년간 고아원을 찾고, 내 집 반찬을 도둑질해서 엄마 없이 사는 꼬마 집에 갖다 놓고, 시간 있느냐고 다가오는 군인을 존중하여 다방에 들어가고, 자정께 자기 차에 타서 건대입구역을 가르쳐 달라는 중년 남성의 청을 선뜻 들어주었다. 그 무렵 내 모습을 들춰 보니 용성이가 내가 짜 준 목도리를 받은 게 맞겠구나 싶었다. 오른손이 하는 걸 왼손이 모르게까지는 아니었어도 선행이라는 의식 없이 한 일이니 기억에 남아 있지 않을 수 있겠다 싶었다.
‘서른 여섯의 나’는 ‘스무 살의 나’를 몰라 봤다. 스무 살의 나는 ‘잊혀진 사람’이었다. 스무 살 그 때 이후 달려온 13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전전하고 중학교 국어 교사로 평생 직장을 확보하고 결혼을 하고 사내아이 둘을 낳고 육아와 직장 생활의 시소를 타고. 열두 살 용성이가 새벽길에서 코가 시리고 목이 시릴 게 마음이 쓰여 목도리를 짠 스무 살 여자애, 나는 그 애를 어디에 버려 두고 그 세월을 달린 걸까. 그 애를 등 뒤에 두고 나는 정글에서 살아남겠다고 완악해졌고 영악해졌으며 내 아이를 잘 기르겠다고 근시안이 되었고 이기적이 되었다. 그러느라고 스무 살 여자애가 품었던 인간애와 연민은 낯선 것이 되었다. 목도리를 떴던 겨울밤이 끝내 생각나지 않아 답답했던 서른 여섯의 나는, 용성이 덕분에 잊혀진 스무 살의 나를 엉성하게나마 일별할 수 있었다.
심리학자 에릭슨은 인간의 발달 단계를 여덟으로 나누고 마지막 단계인 노년기 과업으로 ‘자아통합’을 들었다. 53년 삶의 여정에서 ‘잊혀진 나’가 얼마나 더 있을까. 타인이 그 잊혀진 나를 대면시켜 줄 때, 영영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탄식하게 되는 ‘나’는 또 얼마나 될까. 두렵지만 이제는 천천히 판도라 상자를 열어야 한다. 열어서, 낯선 그 ‘나’들과 인사 나눠야 한다. 잊혀진 데에는 저마다 사연이 있었겠거니 받아 안아서 모두를 묶어 ‘나’로 세워야 한다. 언제 적 나는 나고 언제 적 나는 나가 아니라고 분별하는 한 통합의 길은 멀다. 그 길이 멀 때, 에릭슨은 ‘절망’을 떠안는다고 했다. 나는 절망으로 이 생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삶 어느 모퉁이에서 용성이 같은 이를 또 만나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