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도시 뮐하우젠(Mühlhausen)

그 6 - 독일 농민전쟁(Deutscher Bauernkrieg) 기념관

by 깨달음의 샘물

옛날 뮐하우젠에는 앞에서 이야기했던 성 마리엔교회와 성블라지우스 교회 사이에 곡물시장(Kornmarkt)이 있었고, 그 곡물시장 한켠에 그 이름을 딴 "곡물시장교회(Kornmarktkirche, 독일어 발음으로는 코른마르크트교회)"가 있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곡물시장교회는 교회로서의 성격을 완전히 잃어 버리고, "독일 농민전쟁 기념관(Gedenkstätte Deutscher Bauernkrieg)"이란 이름의 박물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때문에 나 또한 아래 지도에서 보듯 이를 독일 농민전쟁 기념관이라고 써놓았고.

코른마르크트교회, 즉 지금의 독일 농민전쟁 기념관은 그 규모가 상당해서 한장의 사진에 전체 모습을 담기가 어렵다. 무엇보다 아래사진에서 보다시피 길이가 엄청 길다.

독일 농민전쟁 기념관(Gedenkstätte Deutscher Bauernkrieg)

독일 농민전쟁 기념관의 중간 부분에 이런 첨탑이 있는데, 예전에 종루였었는지, 그렇다고 한다면 지금도 타종이 되고 있는지 등은 내 알지 못한다.

첨탑의 아랫쪽에 "독일 농민전쟁 기념관"이라고 크게 쓰여 있다.

독일 농민전쟁 기념관(이하 기념관이라고 한다) 입구는 위에서 보여준 건물의 왼쪽 끝자리에 있는데, 그곳에 또 다시 한번 독일 농민전쟁 기념관이라고 새겨 놓았다.

기념관 안으로 들어섰는데, 예전에 교회였겠다라는 느낌이 살짝 들기는 한다. 그렇지만 천장의 모습도 그렇고, 따로이 제단이 마련되어 있지 않는 것도 그렇고... 여러가지 면에서 이제는 교회로서의 모습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기념관 뒤쪽 지하에 있는 납골당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어서 내려가 봤는데, (예전에는 어떠한 모습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은 제대로 된 석관 하나 남아 있는게 없다.

안내판을 주의깊게 들여다 보았는데, 역시 전부 조각(Fragment)이란 단어만 보일 뿐이다. 그렇다면 온전한 상태로 남아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네

기념관은 지금의 기능에 충실하게 독일 농민전쟁의 원인, 그것이 가능했던 전제조건, 그리고 그의 전개와 결말에 대해서까지 아주 상세하게 설명을 하는 전시물로 가득차 있다. 그런데 말이다. 고백하건대 나는 솔직히 불과 100 여년전에 우리땅에서 있었던 동학농민혁명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전혀 없는 인간이다. 그런 내가 500년전에 독일에서 있었던 농민전쟁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을리는 만무한 일. 때문에 그냥 주마간산격으로 전시물들을 지나칠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하니 이글을 통해 독일 농민전쟁을 알아가려는 시도는 하지 말기를 바란다.


대충대충, 그것도 지극히 단편적으로 훑어 본 독일 농민전쟁에 관한 전시물 이야기를 간단하게나마 해보도록 하겠다. 기념관의 전시는 '개혁 전야(前夜)'라는 제하에 독일 농민전쟁의 발발을 가능케 했던 전제조건이 바로 활판인쇄술이었음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무슨 소리인가 싶을 수도 있지만, 인쇄술의 발달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을 외친 이들의 사상이 농민들에게 신속하게 전달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충분히 설득력있는 이야기라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농민전쟁은 어떻게 전개되기 시작했을까? '개혁의 초기 국면'이란 제하의 전시는 농민전쟁 발발의 직접적 원인을 당시의 토지소유권의 불평등한 배분에서 찾고 있다. 즉, 모든 토지는 정치권력과 소수의 교회의 소유에 속하였고, 농민들은 땅 한평 갖지 못한 상태에서 엄청난 조세를 부담하고 있었던 것이야말로 농민전쟁이 발발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라는 이야기이다.

당시의 상황이 안고 있던 이러한 문제점을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를 비롯한 많은 신학자들이 지적하기 시작하면서 그를 바로잡기 위한 새로운 이론이 태동하게 된다는데, 이것이 앞서 이야기한 인쇄술의 힘을 빌어 빠르게 농민들에게까지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는 전시물.

한편 뮐하우젠의 경우 뮌처, 파이퍼(Heinrich Pfeiffer, 1500~1525), 히솔리두스(Matthäus Hisolidus)들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이 직접 설교를 통해 이를 전파하게 되는데,

특히 파이퍼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카리스마가 상당했었다고 한다. 기념관측에서 그런 점을 인정했는지, 파이퍼를 "카리스마 넘치는 설교자"라는 제목을 붙여 별도로 설명을 하고 있다.

히솔리두스에 대해서는 강제 추방을 당한 사실만 적시하고 있고.

독일 농민전쟁의 발발을 가능하게 했던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반론들도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는데, 너무 어렵기도 하고, 그리 관심도 크지 않고 해서 최소한의 이야기조차 생략한다. 그에 관한 전시물의 사진만 올려 놓으니 관심있는 분들은 읽어 보시기를...

지금까지 이야기한 과정을 거쳐 드디어 독일 농민전쟁이 시작된다.

전쟁이라는 것이 일어나면 필연적으로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되는데, 독일 농민전쟁은 제국도시(그리고 그들의 동맹)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제국도시의 우세한 화력과 잘 훈련된 병사를 대적하기에는 농민군의 전력이 '전력'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조차 부끄러울 정도로 형편없이 모자랐음을 생각하면,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기념관은 영주들의 승리란 제하에 그들의 중심이 되었던 헤센의 필립백작, 작세의 게오르그 대공 그리고 작센의 선제후 요한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전쟁의 승자인 영주들은- 오늘날의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 전범재판소를 열어 뮌처 등 전쟁 주도세력의 죄를 묻게 된다.

독일 농민전쟁을 그 발발로부터 전개 그리고 결말에 이르기까지 시간 순으로 잘 정리해 놓은 연대기를 끝으로 독일 농민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독일 농민전쟁에 관한 전시를 둘러보고 있는 동안 자연스레 의문이 하나 생겨났다. 독일 농민전재의 발발은 종교개혁과 연관있는데, 정작 종교개혁의 도화선에 불을 붙힌 루터(Martin Luther, 1483~1546)는 농민전쟁과 관련하여 과연 어떤 스탠스를 취했었을까?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기념관의 전시물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이런 의문을 갖게 될 것이란 점을 기념관측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것같다. 그에 대한 기념관 측의 대답은 이러하다. 우선 루터란 인물을 소개한 다음,

다음과 같은 전시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답하고 있다: 루터는 독일 농민전쟁을 이끌었던 뮌처, 파이퍼, 히솔리두스 등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한 걸음 더나아가 그의 강력한 진압을 영주들에게 요구하기도 했다. 다만 그러한 입장을 취하게 된 이유까지는 분명하게 밝혀 놓지 않고 있던데, 아마도 교황으로부터 파문을 당해 영주의 도움으로 살아가던 루터의 당시 상황이 루터가 그런 입장을 취한 이유 중 하나가아니였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한편 긴념관 안에는 독일 농민전쟁에 관한 글로 된 상세한 설명외에도 내 관심을 끄는 전시물들이 있었는데, 지금부터는 그것들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도록 하겠다. 먼저 이것은 수도사들의 사제복인데, 오른쪽이 도미니쿠스 수도회 소속 사제들의 사제복이고, 왼쪽이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 사제들의 사제복이다.

이들 사제복에 대해서는 상세한 설명서가 붙어 있는데,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사제복은 심플한데, 이는 순종과 겸손을 상징한다. 주목해야 할 것은 벨트에 3개의 매듭이 있다는 것인데, 이는 수도회의 3가지 규율(가난/청빈, 순종, 순결)을 지킬 것에 대한 서약을 의미한다. 독일 농민전쟁이 발발할 때까지, 이곳 코른마르크트교회(지금의 기념관)에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수도원이 있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사제복은 흰색이다. 후드 또한 흰색인데, 그 위에 검은색 코트를 걸쳤다. 도미니쿠스회 수도원은 윗동네의 중심이 되는 거리인 슈타인거리(Steinweg)에 있었는데, 농민전쟁 때 약탈당했고, 그곳의 사제들은 추방당하였다.

망치 등의 도구와 동전 등등이 전시되어 있는 이것에도 눈길이 갔는데, 배경지식이 워낙 없다보니 처음에는 그 정체를 알기 어려웠다.

전시물 아래의 설명과 전시물을 대비하여 보면, 윗층의 전시물은 '독일 농민전쟁 당시에 만들어진 동전(Bauernkriegsgroschen)'으로 생각된다. 다만 오리지날은 아니고, 2003년에 뮐하우젠 박물관의 허락을 받아 그곳의 것을 본따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아래쪽은 그를 주조하기 위한 틀같인 듯하다.

이것은 독일 농민전쟁 당시 농민군이 사용했던 무기를 전시한 것으로 보이는데, 보다시피 열악하다.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농민군이 영주들이 이끄는 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게 되는 주요 원인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겠다.

1525년에 농민군과 제국도시간의 군사동맹인 슈바벤동맹(Schwbischer Bund)군과의 전투 장면을 만들어 놓은 커다란 전시물인데, 설명서를 따로 찍어 놓지 않아서 어떤 전투장면인지를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은 농민군을 이끌었던 뮌처의 마지악에 관한 전시물인데, 그에 따르면 뮌처는 전쟁에서 패한 후 프랑켄하우젠(Frankenhausen)으로 노인으로 위장해 도주했으나 발각되어 체포당한다. 그리곤 신문과 고문을 당하고 파이퍼와 함께 참수 당했는데, 그의 시신은 창대에 꽂혀 뮐하우젠 성문 앞에 내걸리게 된다. 글쎄 여러가지 면에서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였던 전봉준을 생각나게 만드는 장면이다.

독일 농민전쟁에 대하여 네이버에 물어보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1524년에 남독일 지방에서 발생한 농민 반란을 ‘농민 전쟁’이라고 부른다. ‘메멩겐의 12개조’에 압축된 농민들의 요구는 교회에 납부하는 1/10의 폐지, 봉건적 부과조의 경감, 농민의 지위 향상 등이었다. 반란 농민 중에는 천년 왕국설을 내걸고, 원시 그리스도교적인 공산주의의 경향을 가진 뮌처를 중심으로 한 과격한 재세례파(태어났을 때 받은 세례는 무효이며, 성장 뒤 확고한 신앙을 가졌을 때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에서 유래)도 있었다. 루터는 처음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유력한 영주의 보호를 받기 위하여 반란 농민을 매도하고, 영주들에게 단호하게 진압할 것을 종용하였다. 농민 전쟁은 1525년에 진압되고 뮌처도 처형되었다. 루터의 태도에 실망한 농민들이 루터를 등지게 되어 남독일은 대체로 가톨릭으로 남았으며, 루터의 종교 개혁은 그 뒤 주로 북독일의 제후들과 자유 도시를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혹시 이것으로도 부족함을 느낀다면,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 바란다.


독일 농민전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1525년에 일어난 독일의 농민 전쟁은 발발원인부터 그 전개와 결말에 이르기까지 여러모로 우리의 동학농민혁명과 비슷한 면이 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나라의 동학농민혁명 관련 국제컨퍼런스에서 자주 함께 다루어지고 있는데, 그래서 그런지 계속하여 뮐하우젠 박물관의 연구원이나 관장 등이 우리나라를 찾아 농민전쟁에 관한 발표를 해오고 있다. 2023년에는 이런 국제콘퍼런스가개최되었는데, 그에 관하여는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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