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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Feb 15. 2024

역사와 풍광의 콜라보레이션 "서천(舒川)" 주유기

Chapter 11. 옛 한산(韓山)을 위 한 오마쥬 그 1, 한산향교

# 첫째 마당: 옛 영화의 뒤안길에서 홀로 선 한산(韓山)...



1. 한산(韓山)이 어디지?


한산이란 지명(地名)을 처음 듣게 될 때, 대한민국 땅에 이런 이름을 가진 곳도 있나?라는 생각을 갖는 사람도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어린 시절 지리책에서 틀림없이 '한산 모시'라는 말을 꽤나 여러번 보았지만, 나이들면서 놓게 된 지리책과 함께 '한산'이라는 이름 또한 그렇게 스러져간 것이리라. 뭐, 거기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앉은뱅이 술의 대명사로 알려진 '한산 소곡주', 이것을 모르는 대한민국의 성인은 없을 터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할 정도로 한산이란 곳은 우리네 머리 속에 독자적인 지명으로 각인되어 있지를 않다.


솔직히 그럴만한 이유는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 말하는 한산이란 곳은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서천군(舒川郡)의 일개 면(面)으로만 존재할 뿐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옛이야기를 해보자면, 오늘날 서천군이라고 불리는 곳에는 한산군과 비인군 그리고 서천군 이렇게 3개의 군이 있었다. 그러다가 1913년에 이르러서 이들 3개의 군이 서천군으로 통합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지. 


그런데 말이다. 역사적으로보면 한산군, 비인군그리고 서천군 가운데 가장 먼저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한 곳은 볼 것도 없이 한산이었다. '한산'이란 이름의 기원은 백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데, 한산은 백제시대때부터 크게 번성했다. 그리고 이 곳의 건지산성(乾芝山城)은 백제의 서쪽을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으며, 백제 멸망 후 (임존성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을 이루었던 주류성(周留城)이 바로 건지산성이었다는 것이 점차 통설화되어 가고 있다. 이에 반해 오늘날의 행정구역의 이름인 서천이 역사책에 처음 나타나는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인 1413년(태종 13년)의 일이다. 서천군이 2013년에 서천군 창설 600주년 행사를 대대적으로 벌인바 있는데, 이것만 보아도 서천의 역사는 기껏해야 600년을 헤아릴 뿐이다. 그러니 역사적으로보면 서천은 한산과는 비교 자체가 안된다. 


앞의 글들에서 이미 내가 서천을 빛낸 인물로 소개했던 월남 이상재 선생, 목은 이색 선생 등등도 모두 한산 이씨(韓山 李氏)이고, 서천에 국한하지 않게 되면 충청남도 일원에서 이름을 드날린 인물들 또한 거의 한산 이씨들이다. 그런데 세월의 흐름이란 것이 실로 무서워서, 한산은 이젠 서천군의 일개 면으로 간신히 옛 영화의 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2. 한산(韓山)을 찾아 떠나는 여행    


위와 같은 생각이 들면서 서천에 남아 있는 한산을 한번 찾아보면 어떨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렇게 하여 세 번째로 서천을 찾아들게 되었다. 지금부터 포스팅을 하는 몇개의 글은 바로 그 세 번째 여행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한 곳을 세 번씩이나?라고 생각을 하시는 분들도 계실 수 있는데, 나는 이 이후로도 서천을 세 번이나 더 찾았다. 


한산이란 곳이 이처럼 유서깊은 곳이라면, 세월이 아무리 오래 흘렀더손 치더라도 그 흔적은 서천 땅 여기저기에 틀림없이 남아 있을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독자적으로 군현의  위상을 갖추었던 곳이라면 당연히 - 그것이 읍성이던 산성이던간에 - 성(城)과, 성안에 동헌(東軒) 등의 이름을 가진 행정청 그리고 향교(鄕校)라는 이름을 가진 교육기관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네이버에서 무작정 한산읍성, 한산향교 등을 검색해 보았는데, 놀랍게도(아니 당연한건가?) 모두 다 검색이 된다. 한산... 결코 그냥 사라지지 않았고, 이렇게 천년의 세월을 격하여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하여 이 사진 하나를 믿고 호기롭게 제3차 서천 공습에 나섰다. 서천을 이미 두번씩이나 지나쳤던 관계로 충절로는 너무나 잘아는 길이었으며, 또한 지도상에 보이는 한산안전센터며 한산모시관 그리고 소곡주 갤러리와 같은 주변의 건물 등도 나에겐 이미 구문(舊聞)에 해당하겄다. 거리낄 일이 전혀 없었지.  

그런데... 헐 네비가 나를 한산읍성이라고 이끈 곳에 도착해보니 성은 커녕 흙더미 하나, 돌덩이 한개가 보이지 않는다. 하여 지나가는 사람에게 한산읍성이 어디냐고 물어 보았는데, 바브신지 "여기가 한산읍성(안)인디, 워디를 찾는거유"라는 답을 남기고는 총총히 사라지셨다. 그래서 이번에는 방향을 선회해서 초등학교를 찾았다. 암만 해도 어린아이들이 어른들보다는 덜 바쁘고, 물음에 성심껏 답해 줄 성의도 아직 남아 있을 것을 기대하고 말이다.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똑같은 대답만 흘러 나온다. 학교 뒤쪽에 한산읍성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는 이야기 정도가 전부. 하여 학교 뒤를 돌아가 보았지만, 역시나 아무것도 없다. 


높이 2.5m에 길이 1,700m에 달했으며, 1984년 5월에 충청남도 문화재 자료 제134호로 지정되었다는 한산읍성. 잔존 성벽도 높이 1.5~2m에 이른다는 한산읍성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이지? 한산에 와서, 그것도 한산읍성 안에 들어서서, 한산읍성을 찾고 있을 줄이야 내 정말 미처 몰랐다. 

그런데 이글을 쓰려고 다시 한번 네이버를 뒤져보니, 어쩌면 내가 한산읍성을 보았을 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내가 성(城)에 대한 고정관념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네이버에 한성읍성이라고 다시 쳐 보니, 한산읍성이라는 이름 밑으로 이런 사진이 뜬다. 농로 같기도 하고, 그냥 가정집의 돌담 같기도 한 이런 모습의 사진이. 글쎄, 그러고 보니 한산읍성 안에 있을 때 이런 것은 본 것 같기도 하다.   



## 둘째 마당: 한산향교



한산읍성... 여행에 나선 이가 쓸 말은 아니지만, 실패라고 생각했다. 그와 함께 더 큰 걱정 내지 두려움이 생겼는데, 그것은 한산향교 또한 이 모양이면 어쩌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떨치고 나선 길을 되돌릴 수는 없으니, 다시 한번 힘을 모아 네비에 의지하여 한산향교를 찾아갔다. 그런데 네비가 한산향교로 이끄는 길 또한 장난이 아니다. 좁디 좁은 데다,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는 듯한 느낌도 들고. 그렇게 한참을 달리다가 "도대체 이런 곳에 번듯한 향교가 남아 있기는 할까?"라는 의구심이 엄습하는 순간, 이 곳에 향교가 있(었)음을 알려주는 또렷한 증거가 나타났다. 바로 전교(典敎)들의 공적비. 그것도 이렇게나 줄을 지어 십여개씩이나 말이다.

전교들의 공적비를 만나면서 용기백배하여 다시 차를 몰아 나아가는 내 앞에 홍살문과 보호수, 그리고 그 너머로 제대로 전각을 갖춘 향교의 모습이 나타났다. 이전의 낭패감이 컸던 것만큼, 이 순간에 느끼는 희열 또한 한없이 컸다.  

홍살문 앞에 한산향교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있는데, 그에 따르면 한산향교는 고려 충렬왕 때(13세기) 처음 지어졌고, 조선 헌종 때인 166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아 왔다고 한다. 향교의 전형적 형태인 전학후묘(前學後墓)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지형적 사정으로 동재와 서재의 배치가 통상의 향교들과는 다른 것이 특징적이라는 말도 보이고. 

안내판 옆의 자그마한 돌은 볼 것도 없이 하나비(下馬碑).

한편, 홍살문 뒤 좌측에 이렇게 번듯한 주차장까지 마련되어 있다. 하마해야겠지?

홍살문을 지나면 수령 330년을 헤아리는 거대한 느티나무 2그루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330년이란 세월을 느낄 스 없을만큼 푸르르고, 또 푸르다. 

향교의 외삼문(外三門)은 굳게 닫혀 있다어. 아마도 봄과 가을에 성현에게 제사를 지낼 때에는 저 문들이 활짝 열릴 것이다.  

외삼문은 굳게 닫혀 있지만, 향교의 왼쪽 담을 따라 걸어 들어가면 강학이 이루어지던 명륜당(明倫堂)으로 들어가는 작은 쪽문은 열려 있다. 

특이한 것은 향교의 외벽이 끝나가는 곳에 이런 건물이 하나 들어서 있다는 것인데, 이 건물은 한산향교의 서재(西齋)로 동재(東齋)와 함께 유생들이 기거하며 공부하던 곳이다. 

원래 동재와 서재는 모두 향교 안에, 명륜당의 동쪽과 서쪽에 배치되는 것이 원칙읻다. 그러나 이 곳 한산향교는 산비탈에 세워지다보니 명륜당(아래 사진 정면에 보이는 건물)의 양옆으로 동재와 서재를 배치할 수가 없었는데, 그리하여 한산향교의 경우는 특이하게도 동재는 향교안에, 서재는 향교밖에 세워지게 되었다. 아래 사진 오른쪽에 보인는 것이 동재, 왼쪽에 담장 너머로 보이는 건물이 서재.

향교안에서 바라 본 서재(오른쪽 건물).

명륜당 앞에 서서 바라 본 외삼문의 모습.

명륜당 뒤쪽으로 성현들을 모시는 대성전(大成展)이 있는데, 대성전의 삼문(내삼문) 역시 굳게 닫혀 있다.  

대성전의 경우 쪽문도 없다. 그러하니 삼문이 열려있지 않으면 아예 대성전으로의 접근이 불가능하다. 하여 한산향교 대성전의 모습은 삼문 밖에서, 담벼락에 기대어 찍을 수밖에 없었다. 

한산향교를 돌아보고 나오면서 뒷편에서 두 그루의 느티나무를 바라보았는데, 무성한 나무 잎과 우렁찬 줄기 덕분에 해를 바라보며 찍었는데도 나무의 모습이 그대로 잡혔다. 

보호수를 뒤로 하고 마을을 바라보니 한산향교가 산속깊은 곳에 들어와 있다는 것이 실감나다. 홍살문까지만 해도 꽤 멀고, 홍살문을 지나 저 좁은 길을 한참을 내려가야 비로소 큰 길에 닿으니 옛날 유생들의 등하교가 쉽지 않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 그래서 한번 들어오면 나갈 생각말고 기숙사에서 묵으며 공부에 진력하라고 동재와 서재를 만들어 두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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