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깨달음의 샘물 Feb 08. 2024

역사와 풍광의 콜라보레이션 "서천(舒川)" 주유기

Chapter 10. 서천에 숨어 있는 가톨릭 성지를 찾아서...

# 첫째 마당: 개 관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다른 국가들과 달리 자생적으로 발생하여 발전해 왔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면을 갖고 있는데, 천주교의 전래 초기에는 (~박해(迫害)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사건들에서 볼 수 있듯이) 천주교 내지 천주교인들에 대한 엄청난 핍박이 있었다. 신해박해(정조 15년, 1791년)를 시작으로 신유박해(순조 원년, 1801년), 기해박해(헌종 5년, 1839년), 병오박해(헌종 12년, 1846년), 병인박해(고종 3년,  1866년) 등의 박해가 끊이지 않았고, 이런 박해 과정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단지 믿음을 가졌다는 이유로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나라의 천주교의 발전은 바로 죽음에 이르면서까지 믿음을 지킨 믿음의 선조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 8도 중 가장 많은 순교자가 나온 곳은 충청남도, 특히 내포 지방이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이른바 '피의 순교자'에 국한시켰을 때에나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조선 8도 전국 방방곡곡에서 신앙에 기대어 평생을 살다 그야말로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스러져간 분들까지 생각한다면, 이야기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서천의 경우는 오늘 이야기하는 산막골 성지와 관련하야 언급되는 6분의 순교자를 제외하면 적어도 피의 순교자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세상을 등지고 산속에 숨어 일평생 신앙에 의지하여 살아가신 분들은 서천에도 많았다고 한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천방산 곳곳에 천주교인들이 모여 함께 하나님을 경배하며 살아가는 신앙공동체가 존재하였다는 주장이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실제로 근래 들어 천방산(324m) 깊은 산속에서 성경이나 묵주 들과 함께 많은 유골이 출토되고 있는 것을 보면 그러한 주장은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러한 장소 가운데 현재 (내가 아는 한) 두 곳이 성지(聖地)로 불리고 있는데, 오늘 이야기하는 "산막골 성지"와 "작은재 성지"가 바로 그곳이다. 



## 둘째 마당: 산막골 성지



산막골 성지(충청남도 서천군 판교면 금덕길 81번길 119)는 천방산 깊은 곳에 숨어 있다. 네이버나 구글에 물어봐도 지도 한 장 찾을 수 없는 깊고 깊은 산속에 말이다. 그래서 산막골 성지의 위치를 지도를 통해 보여주지는 못한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그래도 네비에는 산막골 성지가 뜬다는 것이다. 


해서 전적으로 네비에 의지해서 산막골 성지를 찾아가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가는 길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일단 큰 도로를 버리고 좁디좁은 길로 접어드는 순간부터 약간 멘붕상태로 젖어들어가기 시작한다. 차 한 대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임도여서 반대 방향에서 차라도 오게 되면, 두 대중 하나는 꼬불꼬불 이어지는 산길을 후진해야 되는데, 문제는 그래보니 두대의 차가 교행할 수 있는 곳을 만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하는 이야기인데, 운전이 서툰 사람은 혼자서 차를 몰고 산막골 성지를 찾아가는 일은 삼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더욱이 좁디좁은 길을 차를 몰아 나아가다 보면 도대체 산막골 성지는 언제나 나오는 것인지? 더 나아가 이 길을 따라가면 산막골 성지에 이를 수는 있는 것인지? 에 대한 의문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불안감이 엄습할 수도 있다. 나 또한 그러했는데, 때문에 진행방향 왼쪽에서 이런 표지판을 만났을 때의 안도감 내지 희열은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리고 마침내, 실로 우여곡절 끝에 산막골 성지 입구에 다다랐다. 아래 사진의 오른쪽 위로 보이는 건물이 성지를 관리하는 곳으로 생각되는데(성지관리소?), 그 앞으로 그리 넓지는 않지만 주차장도 마련되어 있다. 보다시피 방문객은 달랑 나 혼자. 덕분에 다른 사람 신경 안 쓰고 산막골 성지를 천천히 둘러볼 수 있어 좋았다.

성지관리소 왼쪽으로 성모상이 있고, 

성모상 옆으로 이런 표지석이 서 있다. 표지석에는 왜 이곳이 성지로 불리는지에 대한 설명이 상세하게 쓰여 있는데, 그 내용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우리가 잘 아는 황석두(루카) 성인은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순교하셨는데, 그분이 1856년 신앙의 자유를 찾아 연풍에서 이곳으로 오셔서 3년여를 기거하셨던 곳. 

2. 1857년 입국한 폐롱 신부가 사목을 시작하기 전에 황석두 루카로부터 한문과 조선문화를 배우던 곳.

3. 그리고 황기원 안드레아 등 6명(표지석 참조)이 순교하신 곳. 

주차장으로부터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30여 m쯤 걸으면(바로 옆이란 이야기이다) "회개(悔改)와 피정(避靜)의 땅, 산막골 성지"라고 쓰인 비석과 마주치게 된다. 아. 피정이란 "성당·수도원 등에서 가톨릭 신자들이 행하는 일정기간 동안의 수련생활을 지칭하는 용어"를 말한다.

산막골 성지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성지를 둘러싸고 있는 '십자가의 길'을 제외하면  중앙의 제단, 제단 너머의 십자가상, 그리고 제단 왼편의 황석두 루카 상이 전부이다.   

위에서 말한 것들만 모아서 세로로 사진 한 장을 남긴다.

산막골 성지 옆에 건물이 한채 있는데, 이 건물은 그 실체를 모르겠다. 처음에 산막골 성지에 들어섰을 때에는 이 건물 또한 성지의 구성부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한 바퀴 둘러본 결과... 적어도 이 건물이 성지의 일부는 아닌 것 같다.  



### 셋째 마당: 작은재 성지



산막골 성지를 보았으니 이제 작은재 성지(충청남도 서천군 문산면 수암리 산 79-1)로 넘어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하고, 네비에 "작은새 성지"를 쳐보았는데.... 이런, 작은재 성지는 네비에 아예 뜨지를 않는다. 순간 미로에서 길을 잃은 어린아이처럼 잠시 난감함 속에 빠져 버렸지만, 서천군 안내 팜플렛에서 만났던 작은재 성지 주소(문산면 수암리)를 떠올리고 일단 네비에 문산면을 치고 운전을 시작했다. 물론 문산면도 무척이나 넓을 텐데...라는 걱정이 앞서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런데 문산면을 향해 운전을 해 나가는 도중에 이런 이정표를 만났다. 그때의 기쁜 내지 안도감이라니...    

이정표 옆에 버스 정류소가 있는데, 수암리가 문산면에 속하지만 판교면과의 경계에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결국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여 작은재 성지를 찾는 경우라면 이곳에서 내려 2km 이상을 걸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된다.  

작은재 성지를  찾아가는 길에서 그 존재조차 몰랐던 "독뫼공소"가 있던 자리와 마주치게 되었다.  잘 알다시피 공소(公所)란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는 구역의 천주교 공동체 또는 그들이 모여 미사(정확히는 전례)를 드리던 곳을 말하는데, 독뫼공소의 표지석을 보니 이곳에서도 이 암브로시오, 박운서 바오로 그리고 박 사도요한이 순교하셨다. 

독뫼공소 표지석 옆에 마련되어 있는 성모동산. 

독뫼공소를 지나면서부터는 본격적으로 산길인데, 다행스럽게도 - 물론 일부는 비포장의 임도이기는 하지만 - 산막골 성지를 올라가는 길보다는 훨씬 도로의 폭이 넓다. 서로 반대 방향에서 오는 두 대의 차량이 충분히 교행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뿐만 아니라 숲 속으로 나 있는 길 자체가 아름다워서 길을 따라 오르다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그를 실행에 옮겨 아래와 같은 사진을 남겼다. 

이런 또 한 장의 사진이 있네...

이 길에 대한 안내판. 임도(林道)는 대충 알겠고, 그 앞의 민유(民有)는 민간소유라는 이야기일 텐데... 여기서부터 내용이 좀 복잡해진다. 이해의 편의를 위하여 안내판의 내용을 풀어쓰면 "지금 내가 오르고 있는 천방산 일대의 땅은 개인소유인데, 그 사람이 이 땅에서 무슨 사업(산림사업이겠지)을 하고자 했다. 그런데 그를 위해서는  도로가 필요해서 자신의 돈을 들여 이 도로를 닦았다. 그리고 행정청은 도로개설허가를 내줄 터이니, 이 도로를 일반인의 통행을 위해 제공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이런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져 버렸다. 작은재 성지로 가는 도중에 이딴 허접한 생각에 빠져 있다니...  자, 이제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기로 하자. 앞에서 보여준 멋들어진 길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비로소 "작은재 성지"에 다다르게 된다. 이곳에서 왼쪽은 (판교면) 금덕리 쪽으로 내려가는 길인데 그 길에 '작은재 공소'가 있었고, 오른쪽은 (문산면) 수암리로 내려가는 길인데 그 길에는 조금 전에 보여주었던 '독뫼공소'가 있었다. 아, 그렇다면 '작은재'는 금덕리와 수암리를 연결하는 고개(재)를 말하는 것이었구나. 


이처럼 작은재 성지는 양쪽 공소에서 정확히 중간 지점에 있으니 두 공소 간의 통발을 놓기에는 딱 좋은 장소였을 것 같다. 산속에서 움직이니 다른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도 있으니, 더 좋았을 것이고.  

그런데 이곳이 통발장소였다는 것만으로는 '성지'라고 불리기에 좀 부족한 면이 있다. 그럼 어떻게 이곳이 작은재 '성지'가 되었을까? 그것은 이곳이 천방산 산속에 숨어 신앙을 지키던 분들이 돌아가셨을 때 묘를 썼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은 이곳에 있는 30 여기의 작은 무덤에서 십자가를 비롯한 각종 성물(聖物)이 발견됨으로써 밝혀졌는데, 아쉽게도 1994년 천방산 임도공사 당시에 모두 파묘되어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당시 그들 30 여기의 작은 무덤들의 연고자를 발견할 수가 없어 어딘가에 재매장을 했다고는 하는데 그 장소를 모르기 때문에... 어찌 되었거나 - 비록 당신들의 유골을 모시지는 못했지만 - 지금은 이렇게  어엿한 성지가 되었다.

중앙제단 왼쪽에 '작은재 줄무덤의 표지석'이 서 있다. 아, 표지석에 '백색 순교자'란 말이 있는데, 조금 생소하게 들릴 수 있을 것 같아 그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더 이야기해보도록 하겠다. 보통 순교자라고 하면 형장에서 피를 흘려 죽어간 분들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런 분들을 우리는 '피의 순교자'라고 부르는데, 이러한 피의 순교자들이 대부분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피의 순교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신앙을 지키신 분들도 계시다.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들의 삶을 포기한 채 오직 신앙에만 의지하여 숨어 살다가 삶을 마감하신 분들이 그러한데, 이런 분들을 우리는 백색 순교자라고 부른다.     

아, 네비에 관한 이야기는 내가 작은재 성지의 주소를 몰랐던 때의 이야깅이다. 주소를 알게 되고 나서 이 글을 쓰려고 지금 확인해 보았는데, 네비에서 여전히 작은재 성지로는 검색이 되지 않는다. 하여 주소로 검색을 해보았더니, 그제야 네비가 길안내를 할 준비를 한다.   






이전 09화 역사와 풍광의 콜라보레이션 "서천(舒川)" 주유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