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깨달음의 샘물 Jan 25. 2024

역사와 풍광의 콜라보레이션 "서천(舒川)" 주유기

Chapter 8. 마량리(麻梁里) 그 2,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공원 외

# 첫째 마당: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공원



1816년에 마량진 앞바다에서 영국인과 조선인의 첫 만남이 있었고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에 최초로 성경이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를 기념하기 위하여 마량리에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이 들어서게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는 앞선 글에서 이미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런데 마량리에는 이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기 위하여 조성된 또 하나의 공간이 있는데, 그것이 이번 글에서 포스팅하는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공원(이하 성경전래지 기념공원이라고 한다)"이다. 성경전래지 기념공원은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과 불과 200여 미터 떨어져 있다.

성경전래지 기념공원이 있는 마량포구로 가는 길. '해뜨는' 서해바다 마량포라고 쓰인 구조물이 나를 반갑게 맞이한다. '해뜨는' 서해바다라... 이 말은 "서해는 해지는 곳"이라는 우리의 고정관념에 반한다. 그런데 말이다. 틀림없이 서해바다이지만 지형적 영향으로 보는 방향에 따라서는 해뜨는 광경을 볼 수도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는데,  당진의 왜목마을이나 이곳 마량포구가 그런 곳에 해당된다.   

이곳을 지나쳐서 그야말로 조금만 가면 서천군이 고증을 거쳐 2016년에 조성한 성경전래지 기념공원에 다다르게 되는데, 입구에(사실 특별히 입구라고 할 것도 없다. 담장이 둘러쳐져 있는 것도 아니고, 어느 곳에서나 접근이 용이하기 때문에 말이다)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공원"이라고 글씨가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앞의 글에서 이야기 한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은 이곳에서 뒤쪽으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공원" 입구에 서면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기념물을 만날 수 있는데,  그 하나는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라고 큼지막하게 써놓은 기념비이고,

다른 하나는 배재학당의 설립자인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 목사의 흉상이다.  아펜젤러의 흉상이 이곳에 있는 이유는 조선어 성경번역에 힘쓰던 아펜젤러 목사가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번역자 대회에 배를 타고 가던 도중 어청도 앞바다에서 사고로 순직하는데, 어청도에서 가장 가까운 육지가 바로 마량리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물론 조금 억지스럽기는 한 면이 있기는 하다. 그러나 실제로 감리교단에서도 2013년에 이곳 마량리에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을 건립한 것을 보면, 아펜젤러 목사와 마량리... 관련이 전혀 없는 것 아니다.

성경전래지 기념공원에는 조선인과 영국인의 첫 만남을 가능케 했던 두 나라의 배가 실물크기로 재현되어 있는데, 이 두척의 배는 직접 올라가서 배의 내부 등을 자세히 볼 수 있다. 전시되어 있는 두나라의 배에 관하여는 아래 사진을 참조하면 될 것이다.

위 사진 속의 글씨가 좀 작아서 안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살을 조금 붙여 옮겨 놓도록 하겠다.   당시 표류 중인 영국의 함선은 알세스트(Alceste)호와 리라(Lyra)호의 두 척이었는데, 기념공원에 재현해 놓은 것은 그 두 척의 배 가운데 우리나라 땅에 더 근접하여 정박하고 있던 리라호이다. 고증을 거친 실물 크기의 배인지 여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사진으로만 보아도 배의 규모가 만만치 않았음이 느껴진다.

위 사진만 보아서는 단순히 길기만 한 것 같아 보이지만,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폭 또한 꽤나 넓다.

앵글을 조금 달리하여 찍으면 이런 모습...

이렇게 찍어 놓으면 리라호의 높이가 상당하다는 느낌을 준다.

리라호 내부의 모습.

그리고 조선의 배로는 당시 리라호를 문정하기 위하여 마량진 첨사가 승선하고 있던 판옥선(板屋船)이 전시되어 있다. 판옥선은 조선시대 수군의 대표적인  전투선인데, 판옥선이란 이름은 갑판 위에 있는 판옥(갑판위의 집이란 뜻)이란 구조물 때문에 붙여졌다고 하는데, 보다시피 적(이래봤자 주로 일본군)이 기어오르기 어렵도록 높은 2층 구조를 택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래층에서는 노 꾼들이 노를 젓고, 위층에 전투원을 배치하는 형태로 운용되었다고.   

조선과 영국의 두 배를 함께 찍어 보았는데... 핸드폰으로는 이 이상의 화면을 얻어내기가 어렵다.

한국 성경 최초전래지 기념공원은 대지 9920제곱미터의 넓은 공간에 들어서 있는데, 무언가 정비가 덜 된듯한 느낌이다.  사실 이렇게 넓은 공간을 우리가 잘 정비되어 있다는 느낌을 가질 만큼 꾸미고 유지하려면 상당히 많은 재원이 필요한데, 그런 많은 재원을 서천군이 홀로 전적으로 부담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 둘째 마당:  마량리 한국 최초 성경전래 고증벽화   



성견전래지 기념공원이 있는 마량 포구에서 조금 더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마량방파제를 만날 수 있는데, 마량방파제 벽에 우리가 주목해서 봐둘 만한 것이 있다. 사실 방파제라는 것은 '파도를 막는다'는 기능에 많은 중점이 두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방파제를 아름답게 장식하는 짓은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런데 마량방파제는 그렇지가 않다. 이곳에는 "마량리 한국 최초 성경전래 고증벽화", 즉 이곳이 우리나라 최초의 성경전래지였다는 것을 천명하는 5장의 대형 벽화가 그려져 있는데, 벽화의 내용은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에 대한 앞선 포스팅글을 읽은 사람이라면 내가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아도 그림의 내용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여기서는 기억을 되살리는 데 도움이 될 정도로만, 즉 제목 정도만 이야기해두도록 하겠다.

먼저 제1호 벽화: 영국 함선(알세스트호와 리라호)의 마량진 출현.    

이어서 제2호 벽화: 마량진 첨사(조대복) 일행의 리라호 함상 1차 문정.

그리고 제3호 벽화: 마량진 첨사(조대복) 일행의 리라호 함상 재방문.

그다음으로 제4호 벽화: 영국 함선 일행의 마량진 육지 첫 상륙.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5호 벽화: 한국 최초로 알세스트호 함상에서 함장 맥스웰 대령이 성격을 건넴. 아, 사실 이곳에는 한 장의 벽화가 더 있어. 그런데  그 벽화는 마량진 앞바다에 있었던 사건과는 직접적 관련이 없어서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하겠다.



### 셋째 마당: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앞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어청도 부근에서 사고로 순직한 아펜젤러 목사의 뜻을 기리는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 마량리에 들어서 있다. 사실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을 찾을 때만 해도 난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한국 최초 성경전래지 기념관을 찾아가는 내 눈앞에 이런 이정표가 나타났다. 아펜젤러라는 이름이 너무도 친숙하기도 하고, 이러한 친금감에  이 분의 순직기념관이 왜 이곳에 있지?라는 의문이 더해지고... 해서 바로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을 찾아들게 되었다.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든다. 우리가 살아오며 많이 경험해 온 그것, 그래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는 원칙이 또 적중했다. 공교롭게 내가 이곳을 찾은 것이 수요일이었는데, 보다시피 수요일은 휴관이다.

뭐 하릴없이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앞에 있는 조각상 하나를 사진에 담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다시 와서 내부를 둘러보아야겠다는 생각을 안은 채로 말이다.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왼쪽에 또 하나의 건물이 있는데, 그 건물의 유리창에도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란 글씨가 크게 쓰여 있어. 혼동스러워 찾아보았더니, 위에서 보여준 사진이 2013년에 건립된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이고, 아래 사진 속의 또 하나의 건물은 2015년에 건립된 기념관의 부속건물인 가우처 홀(GOUCHER HALL)이라고 한다. 물론 가우처 홀 또한 굳게 닫혀 있다.

휴관 때문에 이렇다 하게 할 일이 없으니... 조금 떨어져서 가우처 홀 전체의 모습을 담아보았다.

그리고 조금 더 떨어져서 두 건물을 한 장의 사진에 담아 보았다.

한편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의 오른쪽에는 동백정교회가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다.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기념관은 사실 그 내부를 보여주면서 독립적으로 포스팅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것처럼, 처음 이곳을 찾은 날은 아쉽게도 휴관일이었고, 또다시 한번 이곳을 찾았을 때에는 코로나 사태로 아예 잠정 폐쇄 중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해 두 번씩이나 허탕을 친 셈인데,  나중에 혹여 또 이곳을 찾을 기회를 갖게 되어 내부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면, 그때는 제대로 된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갖고 발걸음을 돌렸다.


여담이지만 말이다. 나는 2023년에 대학 동창들과 함께 이곳을 다시 한번 찾았다. 그랬는데... 이번엔 전시물에 몰입하고, 그에 관해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하다 보니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 내부 사진을 단 한 장도 남겨 놓지 않았다. 글쎄, 3번씩이나 이곳을 찾았는데 사진 한 장을 남기지 못한 것을 보면, 나와 아펜젤러 순직 기념관은 인연이 없나 보다.

이전 07화 역사와 풍광의 콜라보레이션 "서천(舒川)" 주유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