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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Feb 22. 2024

역사와 풍광의 콜라보레이션 "서천(舒川)" 주유기

Chapter 12. 옛 한산(韓山)을 위한 오마쥬 그 2, 건지산성 외

# 첫째 마당: 건지산성 이야기



비록 지금은 그 자취조차 찾아보기 힘들어졌지만 한산읍성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은 한산이 예로부터 이 지역의 행정중심지였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한산이 얼마나 큰 군(현)이었는지, 또 얼마나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는지를 잘 보여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한산의 외곽을 둘러싸고 있는 건지산(해발 170m)에 축조되어 있는 건지산성(乾地山城)이다. 건지산(乾地山)이라... 벌써 이름부터 대단해. 하늘(乾)과 땅(地) 모두에 기운이 미치는 산이라니 말이다. 이름을 떠나 이 야트막한 산에 이미 고려시대에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는 것은 이곳이 군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는 것에 대한 움직일 수 없는 증거이다. 이렇게 보면 한산, 결코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행정중심지를 의미하는 읍성(한산읍성)과 군사적 요충지를 의미하는 산성(건지산성)을 모두 갖추고 있는 고을, 조선 팔도에서 찾아보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거든.  


그런데 문제는 건지산성 또한 그 형체는 제대로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산읍성과는 달리 건지산성에 관하여는 이렇게 안내도가 마련되어 있다. 물론 건지산성에 대한 안내도라기보다는 건지산 등산 안내도의 성격이 더 강하지만 말이다. 아래 사진 속 건지산 등산 안내도의 중앙 아래쪽 핑크색 부분이 현 위치이고, 이곳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어 조금만 오르면 건지산 정상이고(이  지점에서 체력의 방전 현상이 나타났기에 올라가 보지는 못했다. 정상 부분에 정자가 세워져 있다지 아마), 위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건지산을 한 바퀴 휘돌아가게 되면 그 길 끝에 (앞에서 포스팅 한) 한산향교가 있다.

위 사진 속의 건지산 등산 안내도 밑쪽으로 건지산성 자체에 관한 안내판이 설치되어 있다. 

안내판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오른쪽의 안내판에 건지산성에 관한 상세한 설명이 있으니 그 부분에 관한 설명을 확대한 사진을 올리는 것으로 건지산성에 관한 설명을 대신하도록 하겠다. 아, 안내의 글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약간의 사전지식이 필요하겠다. 먼저 "테뫼식 산성"이란 산정식(山頂式) 산성이라고도 하는데, 산정상 부분을 둘러서 쌓은 산성을 말하는 것이고, 포곡식(包谷式) 산성이란 산봉우리를 주심으로 주변의 계곡일대를 돌아가며 쌓은 산성을 말하지. 이러한 포곡식 산성은 성벽 안에 계곡이 들어가게 해서 가용면적이 넓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계곡을 흐르는 물이 있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계곡에 물이 흐르는 것이야 당연한 것인데, 그게 뭘?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물이 있다는 것은 주민들이 그 안에 거주하면서 싸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따라서 포곡식 산성 구조를 취하여야만 장기전이 가능해진다. 

건지산성에 대해서는 1998년에 정밀지표조사가 행해졌고, 이를 통해 건지산성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리하여 1999년에는 대대적인 발굴조사가 행해졌고, 이 과정에서 고려와 조선시대의 기와 등이 출토되었다고 한다.  



## 둘째 마당: 봉서사(鳳棲寺)



정밀지표조사를 시작으로 건지산성 문화재 학술조사가 이어지면서 건지산성의 바운더리가 확인되었고, 그 안에서 여러 건물이 있었던 자리와 군창지(軍倉址)도 확인되었다. 동문과 서문이 있었던 자리도 확인되었고. 한편 아래 사진을 보면 건지산성 안에 봉서사라는 절이 보일 텐데, 이처럼 성안에 절이 있었다는 것은 성안에 꽤 많은 주민들이 거주하였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도록 해 준다.

건지산성 안에 있다는 절이 바로 오늘 이야기하는 봉서사(鳳棲寺)인데, 봉서사란 이름은 봉황이 사는 절이란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 한산읍성과 건지산성이 사실상 형체를 찾아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른 것과 달리 - 봉서사는 여전히 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입구부터 잘 정비되어 있고.  

봉서사에 관한 설명은 아래의 안내판을 참조하면 되는데, 이곳에 머물며 꿈을 키웠던 서천 분들이 꽤 계시다. 우선 월남 이상새 선생이 보이고, 우리가 학창 시절 자주 만나곤 했던 신석초(1909~1975) 시인도 이곳에서 머무셨었네. 석북 신광수(石北 新光洙, 1772~1775), 이 분은 내 워낙 과문하여 잘 모르겠다. 

봉서사 경내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만나는 것은 약수터... 내가 봉서사를 찾은 여름날의 햇볕은 장난이 아니었는데, 사진에서 조차도 햇빛의 흔적이 역력하다. 

봉서사의 메인 당우는 극락전(極樂殿)인데, 음, 극락전에 이르는 길이 만만치가 않다. 불심(佛心)이라고는 1도 없는 나로서는 오르기 쉽지 않은 수준이다. 

극락전이라. 그렇다면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본존불로 모시고 있다는 이야기이고(석가여래를 본존불로 모시는 경우는 대웅전이라고 부르지 아마), 통상적인 예에 따르고 있다면 좌측의 관음보살(觀音普薩)과 우측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이 협시하는 아미타 삼존불의 형태를 취하고 있겠지?  

역시... 예상대로 봉서사 극락전의 정면에는 "아미타여래 삼존좌상"이 자리하고 있다. 불상들이 모두 번쩍번쩍 빛나고 있어 금동불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은 목불에 금박을 입힌 것이라고 하네. 봉서사의 아미타여래 삼존좌상은 17세기 초(1619년) 당시에 유명했던 조각승 수연이 조성한 것이라고 하는데, 그 조형미가 아주 빼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리고 이런 이유로 2012년 보물 제1751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극락전 좌측에는 심검당(尋劍堂)이 있다. 심검당은 "지혜의 칼(劍)을 찾는다(尋)"는 의미를 갖고 있는 건물인데, 우리나라의 많은 사찰에서 이런 이름을 가진 건물을 발견할 수 있다. 이런 심검당은 그 이름에 걸맞게 주로 선실(禪室)이나 강원(講院)으로 쓰이고 있다. 이 사진을 보니 문득 이곳을 찾았던 날이 또렷하게 생각이 난다. 극락전의 주련이 갖는 의미에 대하여 사진 속의 스님에게 물어보고, 답하고... 다시 묻고 다시 답하고... 했던 일이 말이다. 아, 내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냥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까지일 뿐, 극락전의 주련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 아래 사진 속에서 심검당 우측 위쪽으로 건물의 일부가 보일 텐데, 그것은 봉서사 경내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삼성각(三聖閣)이다. 혹자는 기독교 신자인 내가 절을 자주 찾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기도 하던데, 나는 개인적으로 절이란 곳을 우리의 문화가 집적되어 있는 장소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에 전혀 거부감이 없다. 다만 삼성각과 명부전(冥府殿), 이 두건물은 예외여서 절대!라고 해도 좋을 만큼 들리지 않는다. 해서 봉서사에서도 물론 skipㅎ했는데, 심검당 사진 속에 우연찮게 끌려들어 왔다.   

이건 극락전 앞마당에서 바라다본 종무소 건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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