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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Nov 24. 2023

슬픔과 한을 간직한 나라, "리투아니아"

Chapter 1. 리투아니아, 어떤 나라인가?

모든 여행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대원칙이 있다면, 그것은  "여행에서 만나는 세상은 정확히 내가 아는 것만큼만 나에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은  리투아니아 여행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되는데, 이는  리투아니아 여행을 충분히 즐기려면 리투아니아에 대한 최소한의 사전지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것이 내가  여행기의 성격을 갖는 이 책을  '리투아니아, 어떤 나라인가?'라는 제목으로 시작하는 이유가 된다.  



# 첫째 마당: 리투아니아 이해를 위한 첫걸음



'리투아니아'는 아직까지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그리 친숙한 나라는 아니다. 리투아니아가 도대체 지구촌 어디에 붙어 있는지, 국토의 면적이나 인구는 얼마나 되는지, 그리고 경제규모는 또 어떠한지 등등을 쉽게 머릿속에 떠올릴 수 있는 우리나라 사람은 많지 않다. 심지어 리투아니아라는 나라의 이름조차 어색하기만 해서 몇 번을 읽어 봐도 '리투아니아'란 이름은 입에 착 달라붙지도 않는다. 그러하니 여러분들이 리투아니아란 나라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고백하건대 이 글을 쓰고 있는 나조차도 리투아니아 여행에서 돌아온 후 약간의 준비작업을 거쳐 이 글을 쓰기 전까지는 그러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우리들이 리투아니아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것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리투아니아는 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선포한 1990년에야 비로소 독립국가로서 세계에 자신의 존재를 처음으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더욱이 독립한 이후에도 리투아니아는 독자적 존재감이 거의 없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소련에 종속되어 있다가 같은 시기에 독립한 발트해 동남쪽의 고만고만한 나라들인 에스토니아(Estonia), 라트비아(Latvia)와 리투아니아를 묶어서  '발트 3국(Baltic States)'이라고 불러왔기 때문이다. 마치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룩셈부르크를 함께 묶어 베네룩스(Benelux)  3국이라고 불러왔던 것처럼 말이다. 물론 최근에 들어서는 이들 각각의 나라들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관심이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한 관심 또한 주로 발트해의 보석이라고 불리는 탈린(Talin)을 수도로 하는 에스토니아에 집중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발트 3국을 모두 돌아본 내 경험에 비추어보면, 막상 발트 3국 중 가장 풍부한 관광자원을 가진 나라는 단연 리투아니아이다.  


물론 리투아니아란 나라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여행을 떠나도 좋다. 그렇지만 리투아니아에 대한 약간의 지식을 갖고 리투아니아 여행에 나선다면 리투아니아의 모습을 제대로 보게 될 것이고, 그렇게 나선 여러분의 리투아니아 여행은 다른 사람들의 그것과는 완전히 차별화된 모습으로 여러분들에게 다가올 것이다.  좀 더 멋진 리투아니아 여행을 꿈꾸는가? 그렇다면 잠시 나를 따라서 리투아니아에 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 보기를 바란다.



## 둘째 마당:  리투아니아의 역사



여행 이야기를 조금은 따분해 보이는 역사 이야기로 시작하는 이유는 리투아니아의 간단한 역사를 알아 두는 것이 리투아니아 여행에 여러모로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사라기보다는 옛날이야기에 더 가까운 이야기이니, 공연히 역사란 말에 거부감을 갖지 말고 한번 읽어 두기를 바란다.  



1. 민다우가스(Mindaugas) 시대


리투아니아가 역사에 처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13세기에 민다우가스(Mindaugas, 1203?~1263)왕이 리투아니아를 통치하던 시절이다. 민다우가스는 1236년에 리투아니아 대공(大公, Grandduke)에 올랐다가 1251년에 리투아니아 왕국을 열었던 인물인데, 이 때문에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민다우가스 왕을 리투아니아의 시조로 떠받들고 있다. 때문에 리투아니아 곳곳에서 그의 동상과 만나게 되는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수도인 빌뉴스(Vilnius )에 있는 국립박물관 입구 전면에 세워져 있는 커다란 민다우가스 왕의 동상을 들 수 있다.

그러나 1263년에 민다우가스 왕이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암살되면서 리투아니아 왕국 또한 막을 내리게 되었으니, 실제로 리투아니아 왕국은 겨우 12년 동안(1251년~1263년) 존재했을 뿐이다. 그 후 약 200년에 가까운 세월이 흐른 1430년에 리투아니아의 마지막 황금기를 열어젖혔던 비타우타스(Vytautas, 1350~1430) 대공이 왕국으로 변신하기 위한 시도를 했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이 그에게 보냈던 왕관을 폴란드 귀족들이 탈취하면서 비타우타스는 국왕으로 즉위를 하지 못하고 사망하였는데, 이로써 리투아니아의 왕국 수립 또한 없었던 일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대공국(大公國)으로 나라의 명맥을 유지해 온 리투아니아는 1918년에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하고, 독일 귀족 빌헬름(Wilhelm)을 민다우가스 2세로 추대하면서 다시 왕국으로서의 지위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같은 해에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소련에게 패하면서 잠시 부활했던 리투아니아 왕국 또한 소멸되고 만다.  



2. 게디미나스(Gediminas) 시대


리투아니아 왕국이 대공국(大公國)으로 격하된 지 50년이 흘렀을 때쯤 리투아니아에 또 하나의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는데, 바로 1316년에 리투아니아 대공에 오른 후 25년간을 통치했던 게디미나스(Gediminas, 1275?~1341)가 그 사람이다. 게미니다스는 항상 리투아니아를 괴롭혀 왔던 독일 기사단을 저지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일대까지 리투아니아의 영토를 확장시켰는데, 이 시기를 사람들은 리투아니아의 황금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리투아니아는  - 뒤에 말하는 비타우타스 통치하에서 잠시 반짝한 것을 제외하면 - 역사 속에서 다시는 그러한 영화(榮華)를 누리지 못하고  철저하게 약소국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다.   


게디미나스가 리투아니아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실로 엄청나며, 이 때문에 지금도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찬란하게 빛났던 자신들의 영화를 되새기며 게디미나스를 찬양하고 있다. 다만 빌뉴스에서는 그를 떠받드는 강도가 다른 도시들에 비해 한층 강한 것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은 게디미나스가 리투아니아의 수도를 트라카이(Trakai)에서 빌뉴스로 옮긴 것과 밀접하게 관련 있다. 빌뉴스는 이 때로부터 지금까지 무려 700년을 (잠시 카우나스(Kaunas)에 수도의 지위를 내주었던 시절을 제외하면) 리투아니아의 수도로서의 지위를 누리고 있으니, 빌뉴스 사람들이 게디미나스를 좋아할 만도 하다.


빌뉴스를 다녀온 사람들의 사진첩에는 예외 없이 대성당 광장에 있는 게디미나스 동상이 자리 잡고 있다.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이 모습의 동상이 무엇을 상징하며, 리투아니아인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빌뉴스 사람들이 이 동상을 통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지가 궁금하다면, '발길 머무는 곳'이란 분의 블로그를 찾아가 보기를 바란다. http://m.blog.daum.net/blog/m/articleView.do?blogid=0FzKF&articleno=7166561 


3. 비타우타스(Vytautas) 시대, 그리고...


게디미나스 사후에 리투아니아가 역사 속에서 비중 있는 존재로 다시 그 모습을 나타날 때까지는 또다시 100년을 기다려야만 했다. 리투아니아 역사에서 마지막 승리의 기억으로 남을 그룬발드(Grunwald) 전투를 이끌었던 트라카이 출신의 대공 비타우타스(Vytautas, 1350~1430)라는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면서 말이다.


비타우타스 시대 이후, 리투아니아는 끝갈 데 없는 치욕의 역사를 경험하게 된다. 이민족들은 수시로 리투아니아를 침공했고, 독일과 러시아 등의 주변 강대국들의 지배를 받는 일 또한 잦아졌다. 그러다가 18세기 들어서는 그만 완전히 러시아에 편입되어, 리투아니아는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만다.  물론 러시아가 와해된 1918년에 잠시 독립하기도 했었는데, 이번에는 러시아의 후예를 자처하는 소련이 1940년에 다시 리투아니아를 집어삼켜 버렸다. 그다음에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유럽 전체를 전장으로 몰고 간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를 1941년부터 1944년까지 점령했고, 나치가 몰락한 이후에는 소련이 다시 리투아니아를 점령하는 일이 발생한다. 리투아니아의 이 같은  불행한 역사의 반복을 바라보면, 지정학적 위치로 인하여 많은 외침을 받았던 우리의 굴곡진 역사가 생각난다.  


소련의 지배하에서도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위한 투쟁이 계속되기는 했다. 그러나 리투아니아가 세계 최고의 정보기관 중 하나인 KGB와 강력한 군사력을 앞세운 소련에 대적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독립운동은 수포로 돌아가고 소련의 무자비한 탄압이 이어지는데, 이 과정과 그로 인한 리투아니아인의 희생을 알고 싶다면 빌뉴스에 있는 '리투아니아 집단학살박물관(The Museum of Genocide)'을 방문해 보기를 권한다.


### 셋째 마당: 리투아니아의 오늘



1. 위 치


아래 지도를 보면 리투아니아는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와 함께 지도상에 푸른빛을 띠고 있는 발트해(Baltic Sea)의 동남쪽에 붙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들 세 나라를 묶어 발트 3국이라고 불러온 이유가 여기에 있다.

위의 지도는 단순히 리투아니아의 위치를 알려주는 것 이상의 중요한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지도상에 붉은 글씨로 쓰인 '칼리닌그라드(Kaliningrad)'가 갖고 있는 특별함 때문이다. 칼리닌그라드는 그 이름에서 느껴지듯이 지금은 러시아의 영토이지만, 이곳은 원래 리투아니아의 땅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면서도 이곳만은 포기하지 않았고, 소련을 뒤이어 들어선 러시아 역시 칼리닌그라드를 여전히 지배하고 있다. 이처럼 소련과 러시아가 이렇게까지 이곳에 집착했던 이유는 바로 부동항(不凍港), 즉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를 얻기 위한 것이었는데, 역사상 러시아가 관여했던 모든 전쟁 또한 바로 이 부동항 쟁탈을 위한 것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칼리닌그라드 얘기를 하는 경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독일 관념철학의 대가인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가 바로 그 사람이다. 아, 칼리닌글라드 출신의 칸트를 우리가 독일 사람으로 알고 있는 것은 그 시대에는 칼리닌 그라드가 독일령이었기 때문인데, 당시에는 이곳의 지명 역시 독일식의 쾨니히스베르크(Königsberg)였다.  어쨌거나 이곳에 가면 잠들어 있는 칸트를 만날 수 있다고 하는데, 내가 이곳을 여행하던 때에는 러시아 비자를 갖고 있지 않아서 직접 가보지는 못했다.

위의 칸트 무덤 사진은 아래 사이트에서 가져온 것이다.




Tip: 니다, 칼리닌그라드, 그단스크 관광 어떻게 할 것인가?


(1) 세도시 둘러보기

칼리닌그라드의 주변에는 전 세계에서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올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가 있는데, 칼리닌그라드 북쪽의 니다(Nida)와 칼리닌그라드 서쪽의  그단스크(Gdańxk, 독일식 이름은 단찌히(Danzig)가 그것이다. 니다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쿠르슈 사주(Kursiu Nerija)를 안고 있는 곳이며, 그단스크는 항구의 풍경이 아주 멋들어진 도시로(아래 사진 참조) 각자의 매력을 뽐내며 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2) 러시아 비자를 갖고 있는 경우

니다, 칼리닌그라드 그리고 그단스크를 모두 돌아보는 최적의 여행 루트는 니다에서 쿠르슈 사주(Kursiu Nerija)를 보고, 칼리닌그라드에서 칸트를 만난 후에 그단스크로 질러가는 것이다. 그리고 이 루트를 택하면 니다에서 그단스크까지 순수한 이동시간은 자동차로 2~3시간이면 충분한데, 주의할 것은 칼리닌그라드가 러시아 영토이므로 이런 루트를 택해 여행을 하려면 출발 전에 우리나라에서 러시아 비자를 발급받아 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루트를 택하는 경우 유오드크란테(Juodkrante)에서 니다를 향해 달리다 마주치게 되는 표지판에서 계속 직진하면 칼리닌그라드에 도달할 수 있다. 칼리닌그라드 옆에 쓰여 있는 "RU"라는 글씨는 물론 러시아를 지칭하는 것이다.


(3) 러시아 비자를 갖고 있지 않은 경우

문제는 러시아 비자를 발급받지 않고 여행을 하는 경우인데, 이 경우에는 일단 칼리닌그라드는 관광이 절대 불가하다. 그리고 니다를 보고 나서 그단스크로 가려한다면, 니다에서 30여분을 북쪽으로 달려 배를 타고 클라이페다에 내려서 리투아니아 국경을 끼고 그단스크에 이르는 루트를 택하여야 한다. 문제는 이 루트를 택하면 자동차로 꼬박 10시간 이상을 달려야만 한다는 것이다.    



2. 국기와 국장


역사적으로 보면 리투아니아는 전투에 임할 때 기사 문양이 새겨진 '비티스'란 이름을 가진 깃발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 깃발이 18세기에 러시아에 완전히 복속될 때까지는 리투아니아의 국기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리투아니아 국기 역시 많은 유럽국가들이 택하는 삼색기(三色旗)의 형식을 빌고 있다. 이 경우 황색은 태양과 번영을, 녹색은 자유와 희망을, 그리고 적색은 리투아니아를 위해 희생한 이의 용기와 피를 상징한다고 한다. 다만 이처럼 삼색기가 사용된다고 해서 18세기까지 사용되었던  국기속의 기사문양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고, 현재 옛 국기 속의 기사문양은 리투아니아의  국장(國章)에 사용되고 있다



3. 리투아니아의 여행 포인트


리투아니아 여행을 준비할 때 우리를 당혹게 만드는 일이 있는데, 그건 큰 마음먹고 떠나려 했지만 생각보다 국내에서 얻을 수 있는 리투아니아에 대한 정보가 그리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을 바꾸어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제공하는 정보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사실 정보의 문제는 리투아니아 여행을 나서는 데 커다란 걸림돌이 되지는 않는다. 아,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제공하는 정보란 현지의 숙소나 관광안내소에서 제공하는 팜플렛이나 지도 등을 말하는데, 이것들을 잘 읽어 보고 그것을 적극 활용하기를 권한다.  


예컨대 아래 사진은 내가 리투아니아에서 첫날밤을 보낸 빌뉴스의 호텔에서 얻은 리투아니아 관광지도인데, 리투아니아에서 어디를 둘러 보야야 할지를 결정하는 데 실로 많은 도움을 받았다. 내가 쓰는 리투아니아 이야기라는 것도 사실 이 지도에 보이는 곳들 중에서 가려 뽑은 도시들의 이야기에 - 지도에는 보이지 않지만 - 내가 출국 전부터 관심을 가졌던 케르나베(Kernave)를 덧붙인 정도에 불과하다.

자신이 선택한 여행 일정에 따라 리투아니아의 도시(마을)를 관광하는 것 또한 마찬가지방법에 의하면 된다. 예컨대 빌뉴스의  경우라면 호텔에 비치되어 있는 빌뉴스 시가지도(특히 관광객들이 많이 다니는 구시가지 지도)를 적극 활용할 일이다. 이런 지도들이야말로 관광에 절대적 안내자가 되니 반드시 챙겨두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이를 통하여 전체적인 루트를 확인해 보는 작업을 해 두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국내의 여행 가이드에 나와 있는 지도가 아무리 자세하다고 해도, 현지에서 제공하는 지도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  



#### 넷째 마당: 숫자로 보는 리투아니아



1. 위치와 인구 등


리투아니아의 위치에 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데, 이를 숫자로 이야기하면 동경 24°00', 북위 56°00'가 된다. 국토면적은 65300㎢으로 우리나라(100,300㎢)의 3분의 2 정도쯤 된다. 아, 우리나라의 헌법은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부속도서로 규정해 놓고 있지만, 여기서 내가 제시한 우리나라의 면적은 우리나라의 현실적 지배권이 미치지 않는 북한을 빼고 계산한 것이다.


리투아니아의 인구는 2,731,464명(2017년 기준)이다. 우리나라 인구가 2020년 기준으로 51,7805,79명이니(통계청, 장래인구추계 참조), 인구는 우리나라 인구의 5% 남짓한 수준에 그친다. 한마디로 말해 인구밀도는 전혀 높은 나라가 아니다.


인종 구성은 볼 것도 없이 리투아니아인이 가장 많고(82%), 그  뒤를 이어 러시아인(8%), 폴란드인(5.6%) 순의 구성비를 나타내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러시아의  지배를 연이어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로마 가톨릭을 믿고 있다는 것인데(79%), 종교에 비우호적이던 러시아의 지배하에서 어떻게 가톨릭을 지켜왔는지가 매우 궁금하다. 막상 러시아 정교는 4.1%에 불과하며, 개신교의 위세 또한 북유럽 국가 치고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1.9%).


2. 경제규모


리투아니아의 1인당 GDP는 18,388달러(2017년 기준)로, 우리나라의  1인당 GDP(32,000달러, 2018년 기준)의 55%를 조금 넘는 수준에 불과하다. 다만 인구수를 고려하면 리투아니아의 전체 경제규모는 우리나라와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한 수준이다. 이러한 점은 한 국가의 대외경쟁력을 가늠하는 지표가 되는 수출규모를 보면 뚜렷하게 드러나는데, 리투아니아의 수출규모는 292억 불(2017년 기준)에 불과하다. 따라서  2018년에 수출규모 6000억 불을 넘어서면서 세계 7위에 랭크되어 있는 우리나라와 비교해 보면, 결국 리투아니아의 전체 경제규모는 우리나라의 30분의 1 수준으로 보면 정확할 것이다.


3. 공식통화


여행을 하는 데 있어 꽤 중요한 문제 중 하나가 지불수단이므로 리투아니아의 화폐 단위 내지 공식 통화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리투아니아의 공식 화폐단위는 리투(Litu, LTL)로, 유로 대비 환율은 2020년 4월 현재 1 EUR = 1,334 LTL 정도이다. 다만 리투는 우리나라에서는 환전할 수가 없으므로 리투를 소지하고자 하면 리투아니아 현지에서 유로나 달러 등을 리투로 환전하는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런 방식을 취하는 경우 외환 차지(Charge)를 이중으로 부담하게 되고(원화를 유로나 달러로, 다시 유로나 달러를 리투로), 이 과정에서 환전 수수료로 날아가는 돈이 상당하다는 것이다.


4. 환 전


리투아니아 여행을 위하여서는  환전이 꼭 필요한가? 내 경험에 따르면, 리투아니아에서 리투가 없다고 해서 계산을 할 수 없던 경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카드결제는 안되고 현금으로만  결제할 것이 요구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예컨대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거나 기념품을 사는 경우, 그리고 공원이나 미술관의 입장료를 지불하여야 하는 경우가 그러한데, 실제로 그런 곳들 또한 예외 없이 가격을 유로로 책정해 놓고 있다. 결론적으로 - 리투아니아의 두메산골에 있는 가게라고 할 수도 없는 수준의 가게의 경우를 제외하면 - 리투아니아 여행에 나서는 경우 리투를 소지하고 있을 필요는 전혀 없다. 아, 달러보다는 유로화를 갖고 있는 것이 여러모로 편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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