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리투아니아... 독립을 위한 길고 긴 여정
# 첫째 마당: 들어가며
역사적으로 보면 한 나라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강력한 힘을 가진 다른 나라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과거이지만, 우리나라도 한때 이웃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 놓인 적이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 경우 그러한 지배에서 하루빨리 벗어나기 위한 독립운동은 다양한 방법으로 행해지는데,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평화를 추구하는 의지를 세계만방에 천명하는 것도 그 방법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런 비폭력 저항운동의 대표적 예로는 1919년에 온 한반도를 물들였던 기미 독립만세 운동, 영국의 압제에 시달리던 인도에서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 1869~1948)에 의해 시작된 비폭력 저항운동인 사티아그라하(सत्याग्रह) 등을 들 수 있다.
한편 이러한 비폭력 저항운동의 예를 오랜 세월 동안 러시아(소련 포함)의 지배를 받아 온 발트 3국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1989년 8월 23일 발트 3국의 시민들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 체결 50주년을 맞아 러시아의 발트 점령 종식을 요구하며 675.5km(620km라고 소개한 글들도 있다)에 이르는 거대한 인간띠를 만들어 저항했던 '발트의 길(Baltic Way)' 행사가 바로 그것이다.
## 둘째 마당: 발트 3국에 대한 러시아(소련포함)의 지배
'발트의 길'이란 행사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발트 3국에 대한 러시아(소련 포함)의 지배가 성립되고, 또 그러한 지배가 붕괴되어 가는 과정에 대한 이해가 반드시 필요하다. 따라서 조금은 장황하지만, 먼저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시계추를 2차 세계대전 언저리에 국한시켜 생각해 보면 발트 3국이 구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 결정적 계기는 1939년 8월 23일에 나치 독일과 소련 간에 체결된 '독소 불가침 조약'인데, 이 조약을 서명자인 소련 외무장관 몰로토프와 독일 외무장관 리벤트로프의 이름을 따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이라고도 부른다. 이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근거로 나치 독일이 물러간 1944년부터 소련의 발트 3국에 대한 지배가 시작되는데, 아래 사진이 조약에 서명한 이후 악수를 나누고 있는 몰로토프(왼쪽)와 리벤트로프(오른쪽)의 모습이다.
### 셋째 마당: 독립운동, 그리고 좌절
소련의 발트 3국에 대한 지배가 시작되면서 이들 국가에서 독립운동, 특히 무장 독립운동이 시작된다. 다만 정규군은 이미 해체의 수순을 밟고 있었으므로 그러한 무장 독립운동은 비정규군에 의한 게릴라전의 양상을 띨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엄청난 군사력과 세계 최고 수준의 첩보기관인 KGB의 힘으로 무장한 소련을 상대로 한 이들 국가의 무장 독립운동은 처절한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리고 강제 이주를 비롯한 혹독한 탄압이 뒤따르는데, 리투아니아의 경우를 예로 들면 소련 지배하에서의 희생자는 체포와 투옥(20만 명), 옥중 사망(2만~2만 5천 명), 강제이주(13만 2천 명), 강제이주 중 사망(2만 8천 명)에 이른다.
#### 넷째 마당: 발트에 부는 변화의 바람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1931~)가 1985년 3월에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 선출되어 페레스트로이카(개혁을 의미하는 러시아어)를 추진하면서부터, 발트 3국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즉,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이 동유럽에서의 민주화 운동의 도화선이 되고, 발트 3국의 독립에도 서광을 비추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이처럼 세계 질서에 엄청난 지각 변동을 일으킨 공로가 인정되어 고르바초프는 1990년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다.
##### 다섯째 마당: 발트의 길, 그리고... 마침내 독립이여!!
"발트의 길(Baltic Way)"에 참가한 시위대는 소련의 발트 국가 점령과 합방이 불법이라는 것을 세계만방에 천명했는데, 당시 이들은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Talin),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Riga), 그리고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Vilnius)를 잇는 도로에 한날한시에 몰려나왔다. 무려 약 200만 명이 거리로 나와 독립에의 염원을 담아 손에 손을 맞잡았던 것인데, 이러한 "발트의 길"은 오늘날 가장 독특한 형식의 비폭력 저항 운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유네스코(Unesco) 또한 "발트의 길"의 기록을 담은 사료의 탁월한 가치를 인정하여 2009년에 이를 세계기록유산에 포함시켰다.
1. 발트의 길의 전개과정
1989년 8월 23일 19시.
발트 3국의 각 마을과 도시의 성당에서는 일제히 종소리가 울려 퍼졌고, 이를 신호로 소지 및 게양이 금기시되었던 자국(自國)의 국기를 들고 200만 명의 시민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한마음 한뜻으로 빌뉴스 - 리가 - 탈린을 잇는 도로로 몰려나왔다.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이렇게 몰려나온 시민들의 손에는 아무런 무기가 들려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들이 한 일이라곤 그저 함께 손을 잡고 15분간 노래를 부른 것이 전부이었다. 그리고 사가(史家)들은 이에 주목하여 발트의 길을 "노래하는 혁명(Singing Revolutio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마을마다 또 동네마다 예외 없이 '인간 띠잇기'가 행해졌는데, 이러한 장면이야말로 이들의 독립에의 열망이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600여 km에 이르는 길에는 고속도로 등과 같은 자동차 전용도로도 있는데, 어떻게 '인간' 띠잇기가 가능했는지?라는 의문이 생겨날 수 있는데, 그에 대한 답은 다음의 사진이 웅변으로 보여준다. 결국 각자의 자동차를 몰고 도로로 나와 도로 한편에 자동차를 주차시켜 놓고는 손과 손을 맞잡았던 것인데, 결국 그깟 고속도로 따위는 이들의 간절한 소망을 표현하는 데 아무런 걸림돌도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발트의 길"에 참가한 시민들은 한 목소리로 일제히 자유를 외쳤다. 물론 나라마다 말이 다르니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laisvės를,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vabadus를, 그리고 라트비아 사람들은 brīvība를 외쳤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이처럼 한번 타오른 독립에의 의지를 담은 횃불은 쉽게 사그라들지 않았다. 나치 독일과 소련의 공산정권을 상징하던 형상들은 불태워졌으며, 반세기 동안 이어진 소련의 점령과 그에 이어졌던 집단학살 및 식민지배의 중단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높아만 갔다.
2. 마침내... 독립이여!!
"발트의 길"은 국제사회의 큰 지지를 받았으며, 향후 독립운동의 구심점이 되었다. 그리하여 (리투아니아의 경우) 발트의 길 행사가 열린 다음 해인 1990년에 독립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는데, 물론 소련은 독립선언 이후에도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은 리투아니아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감행했고, 심지어 무력을 행사하여 그런 움직임을 진압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나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운다고 했던가? 1991년 8월 모스크바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소련의 발트지역에 대한 통제력은 사실상 상실되고, 결국 1992년 9월 소련은 리투아니아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이어서 1993년까지 리투아니아 내의 소련군은 완전히 철수하였고, 비로소 리투아니아는 진정한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신생 독립국가로 우뚝 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라트비아나 에스토니아 또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독립을 쟁취하게 된다).
"발트의 길"은 그야말로 기적을 만들어 냈다. 그저 상상하고 꿈만 꾸었을 뿐, 실제로 일어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던 소련의 발트 3국에 대한 지배 종식과 발트 3국의 독립을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에 리투아니아 국민들은 빌뉴스의 대성당 광장과 종탑 사이의 광장 바닥에 "발트의 길"을 기념하고, 그날을 잊지 말 것을 약속하는 의미를 담은 2개의 구조물을 설치한다. 그 하나는 이곳이 "발트의 길"의 출발점임을 알려 주는 표지석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적을 의미하는 리투아니아어인 'stebuklas'라는 글씨가 쓰인 이른바 '미러클 타일(Miracle Tile) '이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미러클 타일 위에서 왼쪽으로 세 바퀴를 돌면서 소원을 빌면 이뤄진다는 이야기가 생겨났는데, 때문에 이곳을 가보면 많은 사람들이 너도 나도 이 타일을 밟으며 돌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 한 발로 서서 멈추지 않고 단번에 한 바퀴를 돌면 소원이 성취된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를 시도하는 사람 또한 종종 볼 수 있다.
발트 3국을 돌아다니던 시절에는 이상하게도 리가(Riga)나 탈린(Talin)에도 이러한 곳이 있을 것이란 생각을 전혀 못했다. 그런데 이 글을 쓰면서 비로소 "혹시 리가나 탈린에도 이런 곳이 있지 않을까?"라는 의문이 들어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는데, 그 결과 라트비아의 리가에 같은 의미를 담은 표지석이 담겨 있는 사진(chosen.com 참조)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이미지는 아래 삽화를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아. 이번 연재의 글에 자주 등장하게 될 삽화는 Urban Sketcher 정상숙 님의 그림이라는 것을 밝혀 둔다).
3. 발트의 길은 계속된다, 쭈욱....
설마 "발트의 길"이 단지 발트의 길로, 즉 발트 3국의 독립으로 끝날 것이라는 생각들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실제로 발트의 길은 그 후폭풍이 엄청나게 강렬해서 다른 지역의 독립운동이나 민주화 운동에도 커다란 영향을 미쳤는데, 이는 발트의 길이 세계 곳곳에서 재현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소련이 점령하고 있던 베사라비아에서, 몰도바의 키시네프에서, 그리고 1990년 1월에는 우크라이나인들에 의해 리비우에서부터 키예프로 가는 길 위에서... 발트의 길을 시발점으로 세계사에 지각변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세계사의 도도한 흐름의 결과인지 공교롭게도 발트의 길 직후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비폭력 혁명인 벨벳 혁명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루마니아에서는 결코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차우셰스쿠 독재정권이 전복되기도 했다.
2021년, 미얀마에서는 군부 쿠데타를 통해 새로운 군사 독재정권이 등장했다. 미얀마의 시민들은 이러한 군사 독재정권에 항거하여 연일 거리로 나와 민주화를 외치며 격렬한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데, 외신은 군경이 이들 시위대를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을 전하고 있다. 군과 경찰은 민간인 시위대들을 향해 총기사용도 주저하지 않고 있으며, 이른바 화이트 테러도 서슴지 않고 있다. 이런 미얀마의 정황을 보면서 발트의 길이 이름을 달리 하여 '미얀마의 길'로, 그리고 미얀마의 민주화 달성을 위한 길로 발전하기를 빌며 글을 맺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