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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Dec 22. 2023

슬픔과 한을 간직한 나라, "리투아니아"

Chapter 5.  리투아니아의 심장 카우나스, 그 1 - 신시가지

# 첫째 마당:  카우나스, 어떤 도시인가?



1. 명실상부한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Kaunas)는 인구 40여만 명을 헤아리는 큰 도시로 리투아니아가 러시아로부터 잠시 독립하였던 시기에는 리투아니아의 수도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였고, 오늘날에는 리투아니아 공업의 중심지로서 리투아니아의 심장 역할을 다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카우나스는  도시의 기원이 1408년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무려 600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기도 한다. 이렇게 볼 때 한마디로 카우나스는 정치, 경제, 역사, 사회 등 모든 면에서 수도인 빌뉴스(Vilnius) 다음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라고 할 수 있다.   

2. 카우나스의 위치


카우나스는 아래 지도에서 보듯이 빌뉴스에서 서북쪽으로 약 60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 빌뉴스에서 카우나스까지의 소요시간은 자동차로 1시간 반 내외 정도이다. 아래 지도는 리투아니아 관광의 핵심이 되는 도시 간의 이동시간을 잘 보여주고 있어서 리투아니아 여행계획을 수립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지도 출처: '미오의 즐거운 인생'이란 분의 블로그(https://blog.naver.com/lovemw3/220717043954).


3. 카우나스, 어떻게 다닐 것인가?

카우나스는 리투아니아를 관통하는 두 개의 큰 강, 즉 네리스(Neris) 강과 네무나스(Nemunas) 강이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한편 카우나스의 볼거리들은 구시가지와 신시가지 양쪽에 거의 균등하게 자리하고 있는데, 문제는 그 바운더리가 상당히 크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점에서 볼거리들이 구 시가지의 극히 한정된 영역에 국한되어 있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한편 카우나스는 도시 외곽에 신시가지와 구 시가지에 있는 볼거리들에 전혀 뒤지지 않는, 아니 어쩌면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더 커다란 의미를 갖는 볼거리들을 많이 갖고 있다. 그런데 이들이 모두 도시 외곽에 있어서 대중교통수단으로 오가는 데만도 많은 시간이 걸린다는 문제가 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카우나스의 관광 포인트는 크게 (1) 신시가지, (2) 구시가지, 그리고 (3) 카우나스 외곽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만약 카우나스라는 도시에 대해 짧은 시간에 효과적으로 이해를 하고 싶다면, 카우나스에 관한 일반적 정보와 관광 포인트에 대하여  간결하면서도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는 아래사이트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 둘째 마당: 신시가지



1. 자유로(Laisves al.), 그리고...


"자유로"는 그 이름에 걸맞게 구 소련 체제하에서도 장발(長髮)과 Beatles, 그리고 Rock이 흘러넘치던 자유의 상징과도 같은 거리였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1972년 5월 14일에 이 거리 한가운데에서 당시 20살이던 한 카우나스 청년이  “나의 죽음에 대한 죄를 물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정치체제뿐이다”라는 유서 한 장을 달랑 남기고 분신 자살한 사건 때문이었는데, 이 사건은 소련 전체가 붕괴되는 시발점이 되었던 역사적인 사건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오른쪽에 있는 카우나스 시가지도를 보면,  사진 중앙에 수평에 가깝게 그어진 핑크빛(?) 도로가 보이는데, 이 도로가 신시가지의 메인도로인 "자유로(自由路, Laisves al.)"이다. 한편 신시가지의 또 하나의 핵심도로는 K. Donelacio 거리인데, 이 도로는 자유로 위쪽에 자유로와 평행으로 달리고 있다. 그리고 신시가지의 볼거리들은 모두 이 두 도로와 연결되어 있다.





자유로는 그 길이만도 무려 1.7km에 이르는 멋진 거리로 카우나스의 구시가지로 이어지는 빌뉴스 대로와 자연스레 연결되는데, 카우나스의 풍미를 제대로 느끼고 싶다면 이 도로를  여유롭게 걸어서 빌뉴스 대로를 지나 구시가지로 들어가 볼 것을 적극 권한다. 왜냐하면 단언컨대 리투아니아는 물론이고, 발트 3국 어디에서도 카우나스의 자유로처럼 멋있는 거리는 없기 때문이다. 한편 자유로는 규모만 작을 뿐 전체적인 느낌은 마드리드의 프라도 거리(Paseo del Prado)나 리스본의 리베르다데 거리(Avienida da Liberdade)와 아주 유사하며, 전체적인 풍광 또한 완전히 서유럽풍의 거리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Tip: 카우나스에서 밤문화를 즐겨보자


리투아니아를 여행하면서 하루쯤 이들의 밤문화에 젖어 흥청거리고 싶다면, 카우나스의 자유로가 제격이다. 카우나스의 자유로라면 피곤을 무릅쓰고 거리 투어를 강행해도 충분히 보상을 받을 수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자유로를 따라 늘어서 있는 술집에서 분위기를 바꾸어가며 술 한잔을 기울여 볼 것을 권한다. 적당히 자유롭게 흥청이고, 적당히 격조가 있어 참으로 아름다운 술자리를 제공하니 말이다. 냉정히 말해 자유로의 밤 분위기를 즐기지 못했다면, 어디 가서 카우나스를 다녀왔다고 이야기하기에는 많이 부끄러운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술에 취해, 또 분위기에 취해 관광객으로서의 본분을 망각한 채 자유로가 풍기는 밤의 열기를 사진으로 남기지 못해 자유로의 밤이 주는 분위기를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많이 아쉬울 따름이다.



일요일 아침에 관광을 위해 나선 자유로는 열기로 가득했던  어젯밤과는 그 분위기가 달라도 너무 많이 달랐다. 어젯밤과는 대조적으로 차분하고,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는 일요일 오전의 자유로를 바라보고 있자니 절로 "을씨년스럽다"는 단어가 입가를 맴돈다. 하늘은 틀림없이 비를 머금고 있건만 분수는 작동을 시작했고, 분수가에는 한 여인이 담배를 물고 서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어젯밤에 이곳의 밤 분위기를 즐겼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그 흥취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강하게 느길 수 있어 왠지 친숙하기만 하다.  


2. 국립 츄를료니스 기념박물관(M. K. Ciurlionis National Art Museum)


신시가지 관광은  신시가지의 여러 볼거리들을 동선의 중복 없이 효과적으로 볼 수 있고, 이색적인 박물관인 '악마박물관'과도 바로 길하 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국립 츄를료니스 기념박물관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1) 츄를료니스, 그는 누구인가

츄를료니스(Ciurlionis, 1875-1911)는 미술이나 음악 등에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그의 존재를 모르고 있을 확률이 높다. 그렇지만 츄를료니스라는 사람은  유럽은 물론이고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도 상당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인물이다. 특이한 것은 미술로 이야기하자면 세계 곳곳에서 그의 작품전이 연이어 열리고 있고, 음악으로 이야기하자면 쇼팽과 비교될 정도로서 세계 각국에서 그의 음악을 주제로 한 연주회가 열리고 있을 만큼 음악과 미술 양쪽에 두루 능했다는 것이다. 이 정도면 츄를료니스는 가히 천부적 재능을  타고 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츄를료니스 또한 천재들이 공통적으로 마주치는 운명을 피하지 못하고 36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사진은 36살 이전의 모습이라는 얘기가 되는데, 사진상으로도 이미 건강상의 이상징후가 보인다.     


(2) 박물관의 외관

박물관의 모습. 박물관의 입구는 사진 속의 건물 앞쪽에 있는데,

입구에 츄를료니스 박물관이란 글씨가 자그마하게 쓰여 있다.

박물관 주위에 이런 조각상들이 여럿 자리하고 있는데, 이런 것을 보면 츄를료니스 박물관은 일단 미술 쪽에 포인트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3) 내부공간 및 전시물

박물관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마주치게 되는 공간인데, 전면에 커다란 그의 그림이 보이고 왼쪽 앞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한대 놓여 있다. 음악과 미술, 양쪽에 모두 정통했던 츄를료니스를 위한 박물관이라는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드는 의미 있는 공간이다.  

본격적으로 전시 작품을 관람하기에 앞서, 간단히 박물관 내부 투어에 나섰다. 전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상징주의 화가로서의 그의 위명 때문에 그의 작품전은 세계 도처에서 열려 왔고 또한 지금도 열리고 있는데, 박물관 안에는 이들 전시회의 포스터가 많이 있다. 파리의 오르세(d'Orsay) 미술관에서도, 쾰른의 발라프 리하르츠(Wallraf Richartz) 미술관에서도 열렸었음을 알려주는 포스터.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도 벌써 1992년에 그의 전시회가 열렸는데, 내가 워낙 과문해서 그런지 모르겠다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에서 추를료니스의 전시회가 열렸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Tip: 우리나라에서 만나는 츄를료니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국내에서 츄를료니스의 (미술) 작품을 전시회를 통해서 만날 기회는 없었던 것으로 안다. 그러나 최근에 그의 음악과 만날 기회가 있었는데, "울려 퍼지는 바다의 색 : 드뷔시와 츄를료니스"라는 제하에 광주시립미술관 본관 로비에서 열렸던 피아노콘서트가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리투아니아 출신의 소나타 주보비엔네(Sontata Zuboviene)와 로카스 주보바스(Rokas Zubovas)로 구성된 ‘주보바스 듀오’가 무대에 올랐었는데, 이들은 리투아니아의 유명 피아니스트이자 부부 연주자이다. 아, 로카스 주보바스는 츄를료니스의 증손자로 리투아니아 음악 아카데미 교수로 재직 중인데, 그의 얼굴에서 츄를료니스의 모습이 살짝 엿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주보바스 듀오

광주시립미술관에서 열렸던 피아노콘서트에 관하여 자세한 것은 아래 사이트를 참조하기 바란다.


박물관 복도에 아무런 설명은 없지만 스테인드 글라스로 추정되는 것이 있어서, 혹시 츄를료니스가 제작에 관여한 것이 아닌가 싶어 사진을 남겨 놓는다. 유럽의 미술가들이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이나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의 예에서 보듯이 성당이나 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에 많이들 관여했었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역시 아무런 설명 없이 놓여 있는 조각상인데, 이를 사진으로 남겨 놓은 이유는 얼핏 보기에 우리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 제83호)'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전체적인 균형감이나 예술성 등에서 우리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과는 상대가 전혀 안되지만 말이다. 

박물과 투어를 마치고 전시실로 들어서는 순간 약간의 실망감이 나를 엄습했다.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수련 연작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보는 이의 시선을 압도할만한 대작이 한두 점쯤은 있을 것을 기대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대작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본격적으로 츄를료니스의 작품에 빠져 들어 보기로 마음을 먹는다. 먼저 이것은 츄를료니스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Rex(1909년)로, 그가 사망하기  2년 전에 그린 그림이다. 그의 도록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츄를료니스는 이미 1904년부터 이 작품을 머리에 두고 있었다. 즉, 1909년에 발표한 작품을 위한 밑그림적 성격을 갖는 작품들을 이미 1904년과 1908에 발표하였고, 그들 그림을 토대로 1909년에 이 그림을 완성시킨 것이다.

그의 대표적 작품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는 "천사, 서곡(Engel, Vorspiel)"이 있는데, 해외에서 열렸던 수많은 작품전에 단골로 출품되어 그들 작품전의 포스터를 장식했던 그림이다. 지금도 어디 출타 중이신지, 안타깝게도 박물관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역시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인 1906년작, 우정의 선물(Geschenk der Freundschaft). 사진이 많이 흔들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작품 자체가 윤곽선이며 색채 모두 흐릿했다.   

상징주의 화가인 츄를료니스의 작품들은 제목이나 설명을 보기 전까지는 그가 작품을 통해 무엇을 표현하려고 하였는지 알아보기가 힘들 때가 많다. 심지어 제목을 보아도, 무엇을 그린거지?라고 고개를 갸우뚱하게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데 이 작품을 보는 순간 번개를 형상화한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우와 놀랍게도 제목이 번개다(1909년작).  

츄를료니스의 작품이 갖는 특징 중 하나는 음악과 관련된 단어들이 제목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그들 작품 중에서 마음에 드는 몇 점을 사진기에 담아왔다. 왼쪽 작품은 푸가(Fuga, 1908년작)이고, 정말 마음에 들었던 오른쪽 작품은 그림에 빠져 제목과 제작년대를 지나쳐 버렸다.

1907년작, 소나타 2(봄의 소나타) 연작인데, 각각의 작품 설명에 알레그로/안단테/스케르초/피날레 등등의 음악적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음악과 미술 양쪽에 모두 능했던 츄를료니스이기에 가능한 일인데, 문득 같은 성향을 내비쳤던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가 생각난다.  

박물관을 떠나기 전 몽환적인 분위기 때문에 많이 끌렸던 "천사의 서곡" 포스터를 샀다. 포스터라고 해도 액자를 만들어 놓으면 생각보다 훨씬 꽤 볼만하다. 가난한 국립대 교수인 나로서는 사실 이것이 그림을 내 옆에 놓고 즐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한데,  "천사의 서곡"은 지금도 내 연구실 벽면 한 편을 장식하고 있다. 


3. 악마 박물관


츄를료니스 박물관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악마'라는 다분히 생소한 주제를 가지고 만들어진 악마박물관이 있는데, 주제의 독특함에 이끌려 악마 박물관을 찾아가 보았다.  출입문 왼쪽에 악마 박물관(Devil's Museum)이라는 글씨가 선명하다.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벽에 걸려있는 작품(?)인데, 박물관 전시실의 유리상자 속에 공들여 보관하고 있는 전시물들보다 내 눈을 더 강하게 사로잡는다. 한마디로 강렬한데, 집사람과 딸아이는 무언가 섬뜩하다며 눈길을 거둔다.  

막상 박물관 내의 전시물이란 것들은 그저 그만그만한 수준인데, 2층의 전시실에 들어서는 순간 제일 먼저 전시실 창을 가리고 있는 커튼이 눈에 들어온다. 재미있는 것은 어쩌면 내 어딘가에 악마적 본성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어느새 내가 악마의 모습에 친숙해져 악마를 즐기고 있더라는 사실이다.

전시실에는 온통  동서양의 각종 악마들이 들끓고 있는데, 특별히 주의해 보지 않아서 특별히 이야기할 거리도 없다. 

다만 무심코 찍어 놓은 악마상 너머로 사람의 얼굴이 보이는데, 저 사람이 바로 이 박물관을 만든 사람이다.

전시물 가운데 주의 깊게 본 것이 하나 있기는 하다. 아래 사진 속의 악마상이 그것인데, 앞의 악마는 히틀러, 뒤의 악마는 스탈린이다. 그럼 이들이 짓밟고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그 밑의 흙덩어리는 두말할 것도 없이 리투아니아의 국토라는 이야기가 된다. 허긴 독일과 소련, 이 두나라의 지배를 번갈아가며 받아 온 리투아니아 사람들에게 있어 이 두 사람만 한 악마는 없었을 것이다.  

전시실의 마지막 부분에 자신이 만난 악마를 그려서 벽에 붙여 놓는 공간이 있던데, 찾는 사람이 꽤 많은지 벽면 가득히 악마의 그림이 붙어 있다. 악마 그림이지만 무섭기보다는 귀여운 느낌이 더 강한 것을 보면, 역시 난 악마적 성향을 갖고 있음이 틀림없다.  

아무리 하찮은 소품들이라고 하여도 3개 층을 악마를 주제로 전시실로 꾸미려고 하면 꽤 오랜 기간 동안 전시물들을 모으는 과정이 필요했을 터인데, 악마를 모으는 독특한 작업을 행하고 그를 바탕으로 악마 박물관을 만든 사람은 Antanas Zmuidzinavicius(1876~1966)라는 이름을 가진 화가였다. 사진으로 만난 그의 부부의 모습은 이러하다. 

악마 박물관을 만든 화가에 대해 네이버가 아무런 응답을 해주지 않는 것으로 보아, 악마박물관을 만든 이 사람은 화가로서는 대가의 반열에 오르지 못한 듯하다. 전시실에는 걸려 있는 그의 그림 가운데 내 눈길이 그나마 오래 머물러 있었던 작품은 다음의 2점인데, 하나는 카우나스 시가를 배경으로 한 것이고(왼쪽 사진), 다른 하나는 눈으로 뒤덮인 풍경을 묘사한 것이다(오른쪽 사진).

그림이 있는 전시실까지 보고 출구라고 적혀 있는 곳을 나오니 입구와는 전혀 다른 곳이다.  출구로 나와 건물의 외벽을 바라보니 그제야 건물 앞에 있는 이것이 보이던데, 리투아니아어로만 쓰여 있어 그 내용은 알아볼 수가 없다.


4. 소보라스(Soboras) 성당


소보라스(Soboras) 성당은  자유로의 동쪽  끝에 위치하고 있는데, 그를 찾아가는 길이 멋들어진다. 비까지 내리는 아침이라 그런지는 몰라도 성당으로 가는 길에는 인적이 거의 없고, 아름드리나무만 길 양옆으로 하나 가득 줄지어 늘어서있다. 대도시의 메인 도로와 이어지는 도로에서 이런 한적함을 맛볼 수 있다는 것, 그것은 축복의 다른 이름에 불과하다.

인적이 뜸한 흙길을 한참 걸어가니 드디어 소보라스 성당이 그 모습을 드러내는데, 넓은 광장에 차분히 내려앉은 성당의 모습에서 안도감이 스며든다. 정면에서 바라본 소보라스 성당은 둥근 돔 때문에 러시아 정교회 건물 같은 느낌이 들지만, 소보라스 성당은 어엿한 가톨릭 성당이다.  아, 소보라스 성당은 과거에 군인들의 예배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령부 성당'이라고도 불린다.

두 개의 박물관을 구경하고 나니 시간은 11시를 훌쩍 넘겨 버렸고, 때문에 내가 소보라스 성당을 찾았을 때에는 주일 미사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사진 속의 엄마와 아들처럼 무릎을 꿇고 미사를 드리고 있는 사람들도 보이던데, 신심(信心)이 절로 느껴진다. 설마 미사가 시작할 때부터 저런 자세로 계속하여 미사를 드린 것은 아니겠지?  

미사가 끝나고 미사에 참여했던 분들이 돌아간 후부터 본격적으로 성당 구경에 나섰다. 먼저 중앙제단의 모습인데, 중앙제단 앞에 돔에서 흘러내린 것으로 보이는 휘장이 시선을 가로막는다. 

노랑, 초록, 빨간의 3색 휘장을 돔과 함께 사진에 담아 보았다. 암만 생각해도 3색의 휘장은 리투아니아 국기를 상징하는 것 같은데, 성당에 국기를 이렇게 노골적으로 내거는 경우는 이곳 이외의 다른 성당에서는 본 기억이 없다. 혹 이곳이 군인들이 미사를 드렸던 곳으로서 사령부 성당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것 때문인가?

성당 후면의 2층엔 자리한 파이프 오르간을 바라보고 있는 도중에 성당을 관리하시는 분이 조명을 꺼버렸다. 그리고 빛을 잃은 파이프 오르간도 그와 함께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5.  예수부활성당(Monumental Resurrection of  Jesus Christ Catholic Church)


예수부활성당은 신시가지의 약간 외진 곳에 있어 찾아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다. 더욱이 고지대에 있어서  접근성이 많이 떨어지는데, 아래 그림을 보면 성당이 어떠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지 대충 감이 잡힐 것이다.

물론 자동차를 갖고 이동하는 경우라면 직접 성당으로 가면 될 일이지만, 만일 언덕을 걸어 올라가야 한다면 그리 만만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문제 때문에 성당 근처까지 (아래 사진과같은) 푸니쿨라가 운행된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는데, 내가 직접 이용해 보지 않아서 운행간격 등의 정보를 제공하지는 못한다.

예수부활성당의 두드러진 특징은 유럽의 도시들에서 통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전형적인 성당의 모습과는 많이 다른 모습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즉, 세월이 겹겹이 내려앉은 고색창연한 일반적인 유럽의 성당들과는 전혀 달리, 아주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가? 이 성당을 보는 순간 아이슬랜드의 수도인 레이캬비크(Reykjavik)에서 보았던 할그림스키르캬(Hallgrimskirkja)가 떠오른다.  

뒤쪽으로 돌아가서 성당을 바라보면 앞에서 바라볼 때와는 전혀 다른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이런 것을 보면 예수부활성당은 오래된 성당의 모습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듯한 외관을 갖고 있다.  

성당의 몸체를 이루고 있는 신랑(身廊)의 모습인데, 성당 전체가 화이트 톤을 띠고 있어 전체적으로 밝은 느낌이 역력하다. 멀리 보이는 제단의 모습 또한 현대적 감각이 가미되어 심플하기 그지없는데, 솔직히 좀 허전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는 없다.

성당의 후면, 2층의 모습이다. 당연히 고색창연한 파이프 오르간이 자리 잡고 있어야 할 곳인데, 파이프 오르간을 대신해서 초현대식 음향시설이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 근래에 지어진 성당이나 교회가 대부분 이런 모습을 하고 있어 어느 정도 익숙하기는 하지만, 무언가 서운한 마음까지 아예 없어져 버리지는 않았다.

성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고해성사를 하는 곳은 우측랑에 마련되어 있고,

좌측랑과 우측랑의 맨 앞쪽으로는 예배당(Chaple)이 있다. 아래 사진 속의 예배당은 좌측랑에 있는 예배당이다.

예수부활성당은 높은 곳에서 주변을 조망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있다. 오래된 성당의 경우 그런 기능은 종루(鐘樓)가 담당했었는데, 예수부활성당의 경우 종(鐘)이 없어 종루라는 말은 쓸 수가 없다. 하여 어쩔 수 없이 그러한 공간을 일컫는 말 자체가 Terrace로 바뀌어져 있는데, 

Terrace의 모습은 이러하다.


6. 통일광장(Vienybes Aikste)과 그 주변


자유로 북쪽에 자유로와 나란히 달리는 Donelacio라는 이름의 거리가 있는데, 시원하게 뻥 뚫린 도로는 완전히 차도가 차지하고 있고, 보도는 차도 양옆으로 물러나 있다. 자유로가 온전히 카우나스 시민들을 위한 거리로서 시민들의 삶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면, Donelaicio거리는 "꼭 필요한 용무가 없으면 괜스레 기어 나와 흥청대지 말아라"라는 무언의 압력이 존재하는 것 같은 외관을 풍긴다.

내가 이 무미건조해 보이는 거리를 찾은 이유는 신시가지에서의 마지막 여정인 통일광장이 이 거리에 있어서였는데, 이 거리를 따라 통일 광장을 향해 아무 생각 없이 터덜터덜 걸어가는 도중에 멋있는 건물을 만났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건물 외벽에 그럴싸한 부조가 붙어 있는...

다가가보니 리투아니아의 영웅인 비타우타스(Vytautas)의 이름을 딴 대학 건물이다.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인 카우나스에 있고, 리투아니아인들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는  영웅인 비타우타스를 대학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보면, 꽤 괜찮은 레벨의 대학일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알아보니 비타우타스 대학은 연구중심의 국립종합대학으로 2023년 세계대학순위에서 세계 801-1000위권에 포함됐으며, 신흥 동유럽중앙아시아(EECA) 대학 가운데 61위에 올랐다.

이 건물 주변은 비타우타스 대학을 중심으로 한 대학가인데, 상징적으로 공과대학 건물 사진만 한 장 남겼다. 유럽국가들의 경우 이처럼 미국이나 우리나라 식의 대학 캠퍼스가 존재하지 않는 경우가 보통이며, 그 때문에 처음으로 그 거리를 찾은 관광객들은 그것들이 대학건물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Donelacio 거리의 랜드마크는 역시 '자유의 천사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자유의 천사상과 (뒤에서 말하는)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을 품고 있는 곳이 바로 통일광장이다. 사실 우리네 관점으로 바라보면 통일'광장'이라고 부를 만큼 그리 넓은 공간은 이 거리에 없다. 때문에 통일 광장을 찾고 싶다면 (1) 비타우타스 대학을 지나쳐서 조금 걷다가 (2) 도로 오른쪽으로 보도 치고는 폭이 좀 넓다는 느낌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그곳이 바로 통일광장이니 말이다. 그리고 통일광장에 들어서면 저 멀리 나무 우거진 곳에 자유의 천사상이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자유의 천사상이 처음으로 건립된 것은 1928년이었지만, 구 소련의 지배하에서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지금 우리가 보는 자유의 천사상은 1989년에 다시 복원한 것인데, 높은 기단 위에 설치되어 있어서 사진상으로는 그 모습이 그리 또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자유의 천사상 뒤로 또 통일광장이 이어지는데, 이렇게 보면 결국 자유의 천사상은 통일광장 정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셈이다. 다시 한번 말하거니와 통일광장은 그리 넓지도 길지도 않으며, 따라서 여의도 광장이나 서울시청 앞 광장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할 정도이다. 다만 원근감을 살려 사진을 찍으면 생각보다는 꽤 그럴싸한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

광장에서 이어지는 길 끝에 무엇인가가 보일 텐데, 그것이 바로 리투아니아 현대사를 이끌어간 위인들의 흉상과 이름 없는 영웅들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이다. 비가 내리는 날인데도 그 이름에 걸맞게 과연 불은 활활(?) 타오르고 있다. 이 영원히 꺼지 않는 불 양옆으로, 그리고 광장 주변을 둘러가며 리투아니아의 위인들의 동상이 서 있는데, 전혀 모르는 사람들뿐이다 보니 흥미가 유발되지는 않는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 뒤로 무릎 꿇고 앉아 기도를 드리는 모습의 여인이 새겨져 있다. 아무 근거도 없지만, 내 생각에는 리투아니아의 영웅들을 이 세상에 내셨던 어머님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영원히 타오르는 불꽃"의  (오른편) 뒤쪽으로 리투아니아 군사력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군사박물관이 있다. 생각 같아서야 들어가 보고 싶었지만,  이미 신시가지 관광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다 보니 여행 일정상 군사박물관의 내부를 차분히 둘러볼 시간이 없어서 skip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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