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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깨달음의 샘물 Dec 08. 2023

슬픔과 한을 간직한 나라, "리투아니아"

Chapter 3. 리투아니아 여행의 출발은 빌뉴스(Vilnius)로부터

# 첫째 마당: 빌뉴스(Vilnius), 어떻게 다닐 것인가?



리투아니아의 수도인 빌뉴스(Vilnius)는 인구  60만에 이르는 발트 3국 제1의 국제도시이다. 뿐만 아니라 관광지로서의 볼거리 또한 에스토니아의 수도인 탈린(Talin)이나 라트비아의 수도인 리가(Riga) 보다 훨씬 더 많다. 따라서 발트 3국의 관광에 나서면서 일정을 수립하는 경우, 전체적인 시간 분배에 있어 빌뉴스는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탈린보다도 더 많은 시간(최소한 1.5배정도)을 할애할 것을 권한다. 빌뉴스가 이런 곳이라면, 리투아니아 관광은 당연히 빌뉴스에서 시작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비록 리투아니아가 다양한 볼거리로 우리들을 유혹한다고 하여도, 그들 볼거리가 가장 잘 압축되어 있는 곳은 빌뉴스이기 때문이다.

관광객으로서 관심을 기울일만한 빌뉴스의 볼거리들은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구시가지에 몰려 있다. 문제는 그 구시가지의 바운더리가 다른 유럽 도시들에 비해 상당히 크다는 것인데, 이 문제를 아래 지도를 보면서 이야기 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빌뉴스 관광의 핵심축은 지도 오른쪽 위의 '대성당(광장)'에서 아래쪽의 '새벽의 문(Gate od Dawn)'에 이르는 1km 남짓한 도로, 즉 필리에스(Pilies) 거리 - 디죠이(Didzioji) 거리 - 아우시오스 바르티(Ausios Barty) 거리이다. 이 길을 따라 거의 모든 관광 명소가 밀집해 있다. 그러나 냉정히 말해 이것들만으로는 빌뉴스를 돌아 보았다고 하기에는 많이 부끄럽다. 왜냐하면 나폴레옹이 본국으로 가져가고 싶다고 했던 성 안나 성당, 리투아니아의 불행한 역사를 여실히 보여주는 속칭 KGB박물관, 그리고 요즘들어 많은 관심을 받고 있는 우즈피스 공화국 등을 지나친 것이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을 보지 않는다면, 그건 단언컨대 빌뉴스를 본 것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욱이 성 안나성당과 우즈피스 공화국은 지도 가운데 부분의 오른쪽 끝에 있고, KGB박물관은 지도 왼쪽 끝에 있는데, 이 둘은 줄잡아 2km 이상 떨어져 있다. 때문에 이 곳들까지 모두 둘러보려면 아무리 짧게 잡아도 하루 하고 또 반나절 이상을 바삐 다녀야 한다. 



## 둘째 마당: 대성당과 대성당 광장



1. 대성당 광장


나는 대성당(광장) 에서 시작하여 필리에스 - 디죠이 - 아우시오스 바르티 거리를 따라 새벽의 문쪽으로 움직이는 루트를 택하였는데, 리투아니아의 심장이라고 불리는 빌뉴스의 대성당 광장 전체의 모습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해 보고자 한다. 볼것도 없이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대성당이고, 그 대성당 왼쪽에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 종탑(Bell Tower)이다. 그리고 대성당앞에 보이는 동상은 리투아니아의 수도를 트라카이(Trakai)로부터 이 곳 빌뉴스로 옮긴 게디미나스(Gediminas)의 동상이다.  

게디미나스의 동상 모습인데, 아쉽게도 동상의 윤곽이 뚜렷하지 못하다. 때문에 게디미나스의 얼굴이며, 동작에서 묻어 나오는 용맹함을 제대로 전해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 동상 아래쪽의 기단 부분에 여러 사람들의 얼굴이 보이는데, 이는 수도를 빌뉴스로 이전하는 것에 도움을 주었던 공작들의 얼굴이다.    


2. 대성당


대성당은 리투아니아가 카톨릭화되기 이전에 이교도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제단이 있던 자리에 1387년부터 지어진 성당인데, 15세기에 비타우타스(Vytautas) 대공의 대관식을 위해 고딕양식으로 개축되었다. 이후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왕(정확히 말하면 대공작)의 대관식이 이 곳에서 진행되었으며, 성당 지하에는 왕과 왕비의 묘가 자리하고 있다. 


대성당은 일단 규모만 놓고 볼 때, 리투아니아 최대의 성당이다. 원래 성당의 정식이름은 '성 스타니슬라우스와 블라디슬라우스 성당(Cathedral of St. Stanislaus and Vladislaus)'이었는데, 지금은 보통 대성당이라고 불리고 있다. 이처럼 역사가 오래 된 성당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운명이지만, 대성당 역시 매 세기마다 부서지고 보수하기를 계속해 왔다. 때문에 우리가 지금 만나는 대성당에는 여러가지 건축양식이 혼재해 있는데, 외부의 성상(聖像)들은 19세기에야 비로소 더해진 것이라고 한다. 일단 대성당의 정면 모습인데, 역시 지붕 위 3명의 성자와 십자가가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성당의 메인 출입구인데, 대성당의 출입구 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소박할 뿐만 아니라 14세기에 지어진 성당의 출입구라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현대적이다. 물론 끊임없이 붕괴되고 그 때마다 재건축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이해되는 면도 있지만, 어찌 되었던 역사를 갖춘 대성당의 메인 출입구로는 많이 허전하다.  


Tip: 성당(교회) 제대로 둘러 보기


대성당의 내부에 관한 이야기에 앞서 성당(교회)의 구조 및 성당(교회)을 돌아보는 방법에 관해 먼저 간단히 이야기를 해두고자 한다. 이는 이러한 구조를 이해 못하면 성당(교회)에 관한 이야기를 이해하기 쉽지 않은 면이 있기 때문이다.   


(1) 성당(교회)의 구조

성당이나 교회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눈에 들어 오는 것은 이 곳의 주인이 계신 중앙제단인데, 중앙제단으로 이어지는 복도를 몸 신(身)자와 복도 랑(廊)자를 써서 '신랑(身廊)'이라고 부른다. 즉, 신랑은 성당(교회)의 몸체를 이루는 복도란 의미를 갖는다. 한편  조금 규모가 있는 성당(교회)이라면 신랑의 양옆으로 두개의 복도가 나란히 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두개의 복도를 '측랑(側廊)'이라고한다. 때에 따라 방향을 특히 지정하여 이야기할 때에는 좌측랑 또는 우측랑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규모가 아주 큰 교회(성당)의 경우는 신랑이나 측랑과 직각으로 만나는 또 하나의 복도를 갖고 있는데, 이를 '교차랑(交差廊)'이라고 한다.  


한편 유럽의 성당(교회)들은 중앙제단 이외에, 그 곳을 거쳐가신 성자 등을 따로 모시고 있는 예배당(Chaple)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울러 대부분의 성당(교회)는 후면에 파이프 오르간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성당(교회)에 따라서는 지하에 납골당(Krypta)을 갖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 곳에는 성자나 국왕 등의 묘가 안치되어 있는 것이 보통이다.    


(2) 성당(교회) 제대로 둘러보기

성당(교회)의 구조를 이해하면 성당(교회)를 어떻게 둘러 보아야 하는지의 문제는 저절로 해결되는데, 굳이 이야기를 하면 다음과 같다: 


성당(교회)에 들어서면 일단 성당(교회)의 전체적인 내부 모습을 돌아보아야 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성당(교회)의 수준(?)을 대략 감지할 수 있다. 아, 성당(교회)의 전체적인 내부 모습을 꾸미는 것을 내진(內陣)이라고 하는데, 유럽의 경우 이 내진 전문가를 양성하는 교육기관도 설립되어 있다.  

다음으로 중앙제단을 향해 신랑을 따라 걸어 들어가서는, 중앙제단을 찬찬히 음미한다. 중앙제단이야말로 당해 성당(교회)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므로 가장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거장(巨匠)의 손길이 닿은 제단화 등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들이 놓여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나서 측랑과 교차랑이 있는 경우라면 그들 복도를 둘러보고, 뒤편의 파이프 오르간에 눈길을 주기를 권한다. 마지막으로 성자 등이 모셔져 있는 예배당과 지하의 납골당이 있는 성당(교회)의 경우에는, 이 곳 또한 유념하여 보아야 한다. 



거의 루틴화 되다시피 한 나의 성당(교회) 둘러보기 순서에 따라 대성당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중앙제단과 중앙제단으로 이어지는 신랑을 멀리서 바라 보고 있었는데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결혼식이 시작되면서 신랑(新郞)이 신부의 손을 잡고 신랑(身廊)안으로 들이닥쳤고, 이 때문에 대성당의 제단을 찬찬히 뜯어 보려는 내 계획은 본질적으로 뒤틀어졌다. 하여 대성당의 중앙제단 및 제단화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니 모쪼록 이해하기를.   

측랑, 내 기억이 맞다면 우측랑이다. 계량화를 싫어해서 우측랑이 맞을 확률을 숫자로 표기하지는 않겠다. 이 우측랑의 오른쪽 벽면을 보면 무언가 독립된 공간이 있다는 느낌을 주는데, 그 곳이 바로 예배당이다. 이런 예배당 앞에는 사진 오른 쪽 맨앞에서 보는 것과 같이 촛불이 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신랑과 측랑 사이의 기둥과 벽은 성인들의 그림으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개인적으로 여백의 미를 선호해서, 이러한 성당의 내부 모습은 정말이지 별로이다. 다만 소련이 이 곳을 지배하던 시절에 대성당이 인물화 박물관으로 개조되어 사용되었던 불행한 역사를 되짚어 보면, 지금의 모습이 나름  이해되는 면이 있기는 하다. 

중앙제단을 뒤로 하고 바라본 성당 후면의 모습인데, 2층에 예외없이 육중한 파이프 오르간이 자리하고 있다.  

근래의 교황 가운데 재위 기간이 가장 길었던 교황은 폴란드 출신의 요한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 1920~2005. 재위: 1978~2005)인데, 이렇게 말하면 불경스러운 것이 될지 모르겠다만 여행을 다니시는 것을 적어도 싫어하지는 않으셨던 분이라는 것만은 확실하다. 재위기간 중 무려 104회나 여행길에 오르며, 129개국을 순방하신 기록을 남긴 것을 보면 말이다. 물론 우리나라도 다녀 가셨다. 그러다보니 세계의 수많은 성당에서 당신의 족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유럽여행만 25년을 한 나는 실로 수없이 많은 성당에서 당신을 만날 수 있었다. 이런 점을 생각해 보면 리투아니아와 바로 접해있는 폴란드 출신인 당신께서 빌뉴스 대성당 또한 다녀가셨을 것이란 것을 얼마던지 추단할 수 있는데... 역시 다녀 가셨다. 그리고 대성당 측은 이 사실을 벽면에 이렇게 남겨 놓고 있다.  


3. 종 탑


대성당 앞에 있는 하얀 건물은 1522년에 건축된 종탑(Bell Tower)인데, 멀리서 보기에는 그리 높아 보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종탑의 높이는  무려 57미터에 이를 정도로 높다. 원래는 화약을 저장하고 적을 지키는 등 다분히 군사적 목적을 수행하던 곳이었는데, 오늘날에는 성스러운 교회의 종탑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조금 아이러니하기는 하다.


Tip: 종탑, 오를 것인가 말 것인가?


유럽 도시들의 경우 그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은 대성당이나 그 성당의 종탑인데, 이처럼 높은 곳에 오르면 그 도시의 풍광을 한 눈에 맛볼 수 있다.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힘들어도, 심지어 입장료를 내가면서까지 종탑을 오르곤 한다. 이는 빌뉴스 대성당 앞의 종탑의 경우도 마찬가지인데, 따라서 빌뉴스의 구시가지를 한 눈에 보고 싶은 열망이 있다면 힘들어도 종탑에 올라 보는 것이 좋다. 다만 대성당 뒤쪽의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어서 보다 더 멋진 빌뉴스의 풍광을 제공하는 게디미나스성에 올라 빌뉴스 전체를 굽어볼 계획을 갖고 있다면 굳이 종탑에 오를 필요는 없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로 충분히 감을 잡았겠지만, 앞에서 던졌던 질문 "종탑, 오를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물음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이 답할 수 있다. 


(1)  빌뉴스의 구시가지를 조망하기에는 게디미나스 성만한 곳이 없으므로 시간이 허락한다면 (대성당 앞의 종탑에 오르는 것을 skip하고) 게디미나스 성에 오를 것을 권한다. 

(2) 빌뉴스 구시가지를 한 눈에 담고는 싶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을 때에는 아쉬운대로 대성당 앞의 종탑을 오르면 된다. 게디미나스 성을 오를 경우 (성당에서 오가고 푸니클라를 타는 것을 전제로) 적어도 1시간 이상이 소요된다 

(3) 종탑을 오를 시간조차 없다면, 어쩔 수 없이 두 곳 모두를 skip하는 것 이외에는 사실상 다른 방법이 없다.   



대성당 바로 옆에 그 위치로 보나 건물 전체의 품격으로 보나 결코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 서 있는데, 일단 사진을 남겨 놓고 천천히 그 성격을 알아보려고 하였다.   

이 건물의 성격을 추단할 수 있는 단서는 건물 외벽에 붙어 있는 붉은 바탕에 황금색 글씨로 쓰여져 있는 안내판이다. 이를 보고 "아, 원래는 리투아니아 대공 궁전이었던 건물인데,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사용되는구나"라고 이해하고 지나치려는데, 그 순간 국립박물관은 대성당 뒤쪽에 게디미나스 성으로 가는 길목에 있다는 것이 생각났다. 그렇지만 건물안으로 들어가서 이 건물의 실체를 기어코 밝혀 내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건  2박 3일이라는 짧은 여정을 고려한 빌뉴스 여행 계획에 이 건물은 없었기 때문인데, 덕분에 아직까지도 이 건물의 정확한 성격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지금은 대성당과 리투아니아 대공 궁전이었던 건물이 분리되어 있지만, 예전에는 두 건물은 브릿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부분이 철거된 이후에는 다시 브릿지를 통하여 연결되지 않은 채 오늘에 이르고 있는데, 대공 궁전 건물 외벽에는 예전에 그런 브릿지가 있었다는 것을 그림으로만 안내하고 있다.     



### 셋째 마당: 리투아니아 국립박물관과 게디미나스 성



1. 리투아니아 국립박물관


리투아니아 국립박물관은 명실공히 리투아니아 최대의 박물관으로 박물관 건물의 길이만 무려 130m에 이르는데, 중간부분이 약간 굽어져 있기는 하지만 거의 일(一)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다만 관광 안내서에 소개되어 있는 국립박물관 전시품이 내게 그리 매력적이지 못해 관람을 생략했으므로, 전시물은 보여주지 못한다.  

박물관 입구 앞에 커다란 동상이 있는데, 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처럼 의자에 점잖게 앉아 있는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2003년에 건립되었다는 이 동상의 주인공은 리투아니아를 건설한 민다우가스 왕(King Mindaugas)이다. 


2. 게디미나스 성(Gedimimo Pilis)


국립박물관 뒤쪽으로 조금 높은 언덕이 있는데, 그 곳에 두 개의 성이 있다. 성이 그리 높지 않은 곳에 있고 올라가는 길 또한 잘 정비되어 있어서 성까지 걸어서 올라갈 수도 있고, 국립박물관 뒤쪽에 있는 승강장에서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갈 수도 있다. 다만 게디미나스 성을 걸어서 오르내리는 경우는 시간도 꽤 걸릴 뿐만 아니라, 날씨가 더운 날이라면 걸어서 성을 오가는 것 자체가 무척 힘들 수도 있다.  아래 사진은 푸니쿨라를 이용해 성에 오르고 있는 모습이다.    

이 언덕에는 2개의 성, 즉 윗 성(Upper Castle)과 아랫 성(Lower Castle)이 있는데, 통상적으로 윗 성을 게디미나스 성이라고 부르고 있다. 14세기에 건립된 게디미나스 성은 처음에는 목조(木造)였으나, 1409년에 비타우타스 대공작이 오늘날과 같은 벽돌탑으로 개축하였다. 게디미나스 성은 이후 아랫성과 함께 방어기능을 수행하였는데, 1655년에 마지막으로 보수가 행해진 후에는 전면적 보수가 행해짐이 없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왼쪽 사진이 아랫 성의 모습인데, 아랫 성에서 윗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 걸으면 윗 성인 게디미나스성에 이르게 된다.   

빌뉴스의 구시가지를 조망하기에 게디미나스 성만큼 좋은 곳은 없다. 왼쪽 사진의 오른쪽에 보이는 옅은 초록색 지붕을 이고 있는 건물이 리투아니아 대통령 궁이고, 중앙에서 왼쪽에 이르기까지 넓게 펼쳐져 있는 붉은색 건물군은 빌뉴스대학이다. 그리고 오른쪽 사진에서는 대성당과 종탑, 그리고 대공 궁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대성당광장에서 볼 때에는 높은 벽이 가로막아 대공 궁전의 모습을 가늠하기도 어려웠는데, 이 곳에서 보니 대공 궁전의 구조를 어렴풋하게나마 그려볼 수 있다. 

 


#### 넷째 마당: 빌뉴스 대학(Vilnius University)



1. 유럽 최고(最古)의 대학, 빌뉴스 대학


1568년에 신학교로 출범한 빌뉴스 대학은 1579년에 스테판 바토리 왕(King Stefan Batory, 1533~1586)의 칙령을 통하여 정식 대학교로 승격하였는데, 리투아니아는 물론이고 인근 다른 나라의 학문과 문화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명문 대학이다.  이처럼 빌뉴스 대학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인데, 리투아니아가 러시아에 복속되어 있던 기간(근 80여년) 동안은 문을 닫았던 슬픈 역사를 갖고 있다.     


600년에 가까운 오랜 역사를 갖고 있는 빌뉴스 대학은 곳곳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고, 유네스코는 빌뉴스 대학 전체를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한다. 이는 대학 자체가 훌륭한 관광상품이라는 것을 의미하는데, 실제로 빌뉴스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은 거의 예외없이 빌뉴스 대학을 그들의 관광코스에 포함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넘쳐나는 관광객들로 대학 본연의 기능인 연구와 강의에 지장을 받을 정도의  '투어리스티피케이션(Touristification)' 문제가 발생하는데, 그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빌뉴스 대학은 관광객들에게 입장료(6유로)를 받기 시작했다. 따라서 현재는 빌뉴스 대학의 학생과 교수가 아니라면 대학의 출입이 자유롭지 않다. 


입장권 매표소(및 안내소)에서 입장료를 납부하면 대학을 효과적으로 둘러보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팜플렛을 내어준다. 팜플렛의 표지에는 대학의 전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과 대학의 문장(紋章)이 보이고, 

팜플렛 안에는 안내지도와 각 건물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들어 있다.  

대학으로 들어가는 입구의 벽에도 이렇게 금속으로 안내판을 만들어 놓기는 했다만, 처음 마주치게 되는 대학 내의 건물 배치를 이 안내판을 한 번 들여다 보는 것만으로는 머리 속에 담아 둘 수는 없다. 따라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앞에서 이야기한 팜플렛을 꼭 부여잡고 다녀야만 한다. 


2. 천장화의 향연


빌뉴스 대학의 건물들 중 상당수는 아름다운 천장화로 장식되어 있다. 다만 대부분의 건물 천장들이 상당히 높아서 천장화의 모습이나 내용을  제대로 알아 보기는 어렵다. 그런데 빌뉴스 대학 안에는 천장이 낮아서 천장화의 모습을 근접해 보면서 천장화를 제대로 즐길 수 있는 곳들이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곳은 대학의 구내 서점이다. 구내 서점에 들어서게 되면 마치 화랑에라도 들어선 것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데, 이 곳에서 화려한 천장화의 향연을 즐겨 보기를 적극 권한다. 

빌뉴스 대학 어문학부가 사용하고 있는 건물의 2층 또한 천장화로 유명하다. 어문학부 건물의 1층에 들어서면 이 곳에 유명한 천장화가 있다는 것과 그 곳을 가는 방법을 보여주는 포스터와 마주치게 되는데, 포스터 속의 화살표를 따라 2층으로 올라가게 되면 이런 천장화를 만날 수 있다. 그림의 내용은 발틱의 신화와 구시대의 질서를 주제로 한다고 한다.  


3. 요한교회


빌뉴스 대학 구내에 있는 교회인데, 교회이 이름은 사도 요한과 침례자 요한에서 따온 것이다. 아래 사진 속 오른쪽 건물은 들어가 보지 않아 구조를 보여주지 못하겠고, 왼쪽 건물이 요한 교회이다. 

요한 교회만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이런 모습을 하고 있다. 


유럽의 도시들을 여행할 때 성당이나 교회는 비교적 자세히 보는 것이 좋은데, 이는 성당이나 교회에 그들의 문화가 고스란히 배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까닭에 성당이나 교회에 들어서면 앞에서 이야기 했던 관람순서에 따라 찬찬히 둘러 보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는데, 아쉽게도 요한 교회는 결혼식이 곧 진행될 것같은 분위기에 쫓겨 성급히 나왔기 때문에 제대로 보지 못하였다. 하여 내 카메라 속에는 신랑의 모습 한장(왼쪽 사진), 그리고 측랑의 모습 한 장(오른쪽 사진)이 남아 있을 뿐이다.


4.  도서관


낮선 도시를 여행하는 경우 시간이 허락하는 한 대학 도서관을 즐겨 찾는 것이 내 여행의 특징적 패턴이다. 이는 대학의 도서관이야말로 그 대학, 나아가서 그 도시의 수준을 가늠할 수 있는 척도가 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더욱이 빌뉴스 대학 도서관처럼 각종 희귀 도서, 특히 인큐나블라(Incunabla)를 소장하고 있는 곳이라면 더말할 것도 없다. 아, '인큐나블라'란 독일의 구텐베르크(Gutenberg, 1397~1468)가 인쇄술을 발명한 1450년부터 1500년까지 유럽에서 활자로 인쇄된 서적을 말한다. 


도서관에의 출입을 떡하니 가로막은 철제문에서부터 조금은 고풍스러운 품격이 배어 나오는데, 철제문 상부에는 대학의 문장(紋章)으로 추정되는 대형 문양이 자리하고 있다.

도서관을 찾는 경우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학생들의 열람실과 서가를 둘러 보는데, 빌뉴스 대학의 경우 외부인들의 출입통제가 실로 엄격해서 그들 공간에는 진입 자체가 허락되지 않았다. 유일하게 외부인에게 공개된 공간은 그 정확한 용도를 가늠할 수 없는 이 곳이 유일했는데, 재미있는 것은 이 공간 또한 기둥과 천장이 모두 그림으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Tip: 빌뉴스에서의 점심식사, 어디서 할 것인가?


빌뉴스는 생각보다 꽤 유명한 관광지여서 늘상 관광객들로 넘쳐난다. 때문에 음식값은 발트 3국의 어느 도시보다도 비싼 수준이고, 시즌 중에는 조금 괜찮아 보이는 식당은 손님들로 가득해서 여유로운 식사는 꿈꾸기 곤란하다. 따라서 그저 점심 한끼를 조금 값싸게, 그리고 비교적 여유롭게 때우고 싶다면 빌뉴스 대학의 학생식당이 제격이다. 물론 대학의 학생식당이니 음식의 수준이 훌륭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유롭게 식사를 즐길 수 있는 장점은 확실하다. 



##### 다섯째 마당: 교회와 성당



빌뉴스의 구시가지에는 참으로 많은 교회와 성당이 들어서 있기 때문에 그들을 모두 둘러볼 수는 없다. 따라서 안내책자에 비중있게 소개되어 있고, 구시가지 관광의 축이 되는 필리에스거리 - 디죠이거리 - 아우시오스 바르티 거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것들 위주로 볼 수 밖에 없는데, 그런 관점에서 내가 관심있게 본 교회와 성당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성령교회


구 시청사에서 새벽의 문을 향해 걷다가 새벽의 문에 거의 다다를 지점에 왼쪽에서 만나게 되는 성령교회(Church of the Holy Spirit)는 러시아 정교회 소속 교회이다. 정교회 소속의 교회들의 경우 교회의 본당 건물 앞에 또 하나의 출입구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성령교회 또한 그러하다. 핑크색이 감도는 입구를 지나 조금 더 걸어 들어가면 노란색의 본당 건물과 마주치게 된다. 


성령교회는 16세기에 목조로 지어졌던 것을 1638년에 바로크 형식으로 개축했지만 18세기에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 그 이후 후기 바로크 양식을 창조한 건축가 J. K. Glaubitz에 의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개축되었는데, 이 교회 옆에는 현재 리투아니아에서 유일하게 활동하고 있는  정교회 소속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정교회 소속 교회의 경우 교회의 전면부는 교리를 압축하여 표현하는 그림이나 성자의 모습 등으로 빈 공간 하나 없이 빽빽하게 채워져 있는 것이 보통인데, 성령교회의 중앙제단은  그들과는 대조적으로 아주 깔끔하고 밝게 정비되어 있는 것이 특징적이다.  아, 정교회 소속 교회의 경우 보통 내부 모습, 특히 제단을 사진에 담는 것은 엄격히 금지되는데, 빌뉴스의 정교회 소속 교회들의 경우 그러한 제한을 두고 있지 않아서 좀처럼 얻기 힘든 정교회 소속 교회의 제단과 내부 모습을 사진에 담을 수 있었다.  

성령교회 내부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가장 많이 멈추는 곳은 이 곳이다.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관리하시는 분이 정말 열심히 닦고 있는데, 이 분의 손길에서 신심이 그대로 묻어나오고 있었다. 덕분에 그를 바라보는 나 또한 잠시나마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되었는데, 아쉽게도 이 공간이 갖는 의미에 관한 설명을 찍어 놓은 사진이 해독불가 상태여서 설명을 곁들이지는 못한다.  

중앙제단에 서서 교회의 뒤쪽을 바라보며 또 한장의 사진을 남겼는데, 카톨릭 성당이나 개신교의 교회라면 당연히 보여야 할 파이프 오르간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고 보니 정교회 소속 교회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본 기억이 없다. 


2. 성 안나성당


성 안나성당(St. Anne's Church, 리투아니아 현지 발음으로는 성 오나성당)은 붉은 색깔을 띤 후기 고딕 양식의 성당으로, 외부만 놓고 보면 빌뉴스는 물론이고 리투아니아 전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띠고 있는 성당이다. 나폴레옹이 이 성당의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이 성당을 손바닥에 얹어 파리로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 올만큼 말이다. 15세기말에서 16세기 초에 걸쳐 축조된 이래 수차례에 걸쳐 소실되고, 그 때마다  복원을 반복했다고 하는데, 놀랍게도 여전히 예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나폴레옹이 그리도 감탄했던 성 안나 성당의 모습을 별도로 찍어 놓은 사진이 없는데, 이는 성 안나 성당은 이웃한 프란치스쿠스 베르나르디나스 성당과 붙어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왼쪽의 것이 성 안나 성당인데, 축조당시에 프랑스에서 유행하였던 불꽃 모양의 첨탑이 뾰족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아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다. 

성당의 외부 모습을 통해 대충 예감했겠지만, 성 안나성당은 작고 아담하다. 그리고 성당의 규모가 그리 크지 않다 보니 성당 내부의 모습 또한 아주 심플한데, 보다시피 측랑도 없이 중앙제단에 이르는 복도가 전부이다. 

멀리 중앙제단에 금빛으로 빛나는 제단화가 보여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사진은 흐릿하고, 사진만큼이나 내 기억도 희미하지만 제단화는 예수님과 그의 부모님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중앙제단을 뒤로 하고 성당의 뒷편을 바라본다. 그저그런 샹들리에와 파이프오르간이 보이는데 화려함이나 웅장함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 이런 곳에 들어오면 스테인드 글라스나 교회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 및 기타 조각 등도 주목하고 사진을 남겨 놓는 것이 내 여행 습관으로 배어 있지만, 아쉽게도 성 안나 성당은 관심을 가질만한 이렇다할 내부 구조물이 없었다.      


3. 프란치스쿠스 베르나르디나스 성당


많은 리투아니아 여행기들은 지금부터 내가 이야기 하는 성당을 '프란치스쿠스 베르나르디나스 성당'이란 이름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과연 이 성당을 '프란치스쿠스 베르나르디나스 성당'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는지는 확신이 안선다. 왜냐하면 이 성당의 외벽에 붙어 있는 안내판을 보면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쿠스 뒤에 (     )가 보이고, 그 안에 (베르나르디나스)라고 써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베르나르디나스가 프란치스쿠스의 다른 이름인지, 아니면 그가 속해 있던 수도회의 이름인지를 확인할 바가 없다는 것인데, 하여 일단 다른 분들의 예에 따라 이 성당을 '프란치스쿠스 베르나르디나스 성당'이라고 부르기로 하겠다. 아, 프란치스쿠스 성자는 우리가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문"을 통해 잘 알고 있는 프란체스코(Francesco, 1182~1226) 성자를 말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이 성당은 15세기에 이탈리아 수도사들에 의해 건축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신교의 성전인 교회(Church)와 가톨릭교의 성전인 성당(Cathedral)을 엄격히 구분하여 사용하는 편이지만, 막상 유럽에 가보면 그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그 성격을 가늠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다만 프란치스쿠스 베르나르디나스 성당의 경우 벽에 붙어 있는 동판에  'Roman Catholic'이란 글자가 선명하다. 

성 안나 성당과 붙어 있는 프란치스쿠스 베르나르디나스 성당의 모습만 따로 정면에서 바라보면 이런 모습이 된다.


프란치스쿠스  베르나르디나스 성당의 내부 모습인데, 아래 사진이 중앙제단에 이르는 신랑(神廊)의 모습이다. 중앙제단을 향해 나아가는 복도 양옆에 있는 기둥마다 무엇인가가 붙어 있어 조금은 산만한 느낌을 주기는 하지만, 나무를 소재로 해서 그런지 나름 격조가 있다. 15세기에 축조된 까닭에 벽면이나 기둥이 깨끗이 보존되어 있지는 못하지만, 성당 전체 규모는 빌뉴스 대성당에 비추어 보아도 전혀 밀리지 않을 정도이다. 다만 성당의 규모에 비해 상대적으로 중앙제단의 장식은 지극히 소박해서, 그 흔한 제단화 한 점 찾아볼 수 가 없다.

중앙제단을 뒤로 하고 성당 뒷편의 모습을 바라보면, 파이프 오르간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중앙제단으로 이어지는 신랑과 제단, 그리고  성당 뒷편의 모습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규모면에서는 이 성당이 성 안나성당보다 훨씬 크다. 

이 성당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벽화들이다. 벽화들 중 일부는 색이 바래고, 심지어 변색이 진행되고 있기는 하지만, 세월의 흐름이 뚝뚝 묻어나는 것같아서 느낌은 오히려 더 좋다. 이 성당의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벽화의 화법은 '프레스코화'라고 하는 것인데, 프레스코화란 소석회에 모래를 섞은 모르타르를 벽면에 바르고 수분이 있는 동안 채색하여 완성하는 회화를 말한다.

성당 내부에 예배당(Chaple)으로 생각되는 공간이 있는데, 제단이 중앙제단보다도 화려하고, 예배당안의 벽화나 천장화 또한 화려하면서 보존상태까지 양호하다. 그러나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사제 복장을 한 분이 보이고, 다른 분들의 모습 또한 엄숙해서 어떤 모임(공식행사)이 진행되는 것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판단을 하게 된 또 하나의 주된 이유는 유리문에 휴대폰 사용이 금지되어 있음을 알리는 표지때문이었다. 아, "엄숙"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던 Stumti는 이 글을 쓰면서 확인해보니 Push를 뜻하는 리투아니아어이고, 다시 찾아보니 그 반대말은 Traukti(Pull)이다. 

성 안나 성당과 프란치스쿠스 베르나르디나스 성당 옆으로 널찍한 정원이 마련되어 있는데, 정원 왼쪽에 커다란 동상이 서 있다. 동상의 주인공은 이 성당 부근에 거주했던 폴란드의 문호 아담 미츠키에비치(Adam Bernard Mickiewicz, 1798~1855)이다. 

아담 미츠키에비치 동상의 얼굴 부분만 클로즈업해서 찍은 사진인데, 상당히 귀여운 모습(?)을 하고 있다.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난데없이 폴란드 시인의 동상이 이렇게나 크게 서 있는 이유는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알면 쉽게 이해될 수 있는데,  한마디로 말해 1386년에 요가일라(Jogaila, 1362~1434) 대공이 폴란드의 여왕과 결혼한 이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오래도록 하나의 연방체계를 유지했기 때문이다.  


요가일라는 리투아니아의 영웅인 비타우타스(Vytautas)의 삼촌인데, 요가일라에 대한 평가는 사람들 사이에 약간의 이견(異見)이 있는 듯하다. 즉, 폴란드와의 협력을 공고히 했다는 측면을 강조하여 긍정적 평가를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그 협력이라는 것이 사실상 리투아니가 폴란드의 지배를 받는 속국으로 전락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며 부정적 평가를 하는 사람도 있다.   

해가 떨어진 이후에 공원쪽에서 간접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는 아담 미츠키에비치동상을  바라보며 또 한장의 사진을 남긴다. 동상 뒤쪽으로 앞에서 말한 두개의 성당이 보이는데, 왼쪽이 성 안나 성당이고, 오른쪽에 나무에 가려 일부만 보이는 것이 프란치스쿠스 베르나르디나스 성당이다.    


4. 성 카지미에라스 성당(St. Casimir's Church)


요가일라 대공의 아들로 선행을 통하여 성인의 반열에 오른 카지미에라스의 이름을 딴 성당인데, 구 시청사에서 새벽의 문쪽으로 내려가는 길로 접어들기 전 왼쪽에 자리잡고 있다. 핑크 빛으로 밝게 빛나는 외벽이 인상적이기는 하지만 (내 고정관념 때문인지는 모르겠다만) 웬지 모르게 어색하고, 심지어 경망스러워 보이기까지 하다. 어쨌거나 1604년에 지어진 건물이 4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이렇게 잘 보존되어 있다는 것만은 솔직히 조금  부럽다.  한편 성 카지미에라스 성당은 지금까지 본래의 목적인 가톨릭 성당으로 사용되는 것 이외에 러시아 정교회의 성전, 정치범수용소, 포도주 창고, 무신론 박물관 등으로도  사용되어 왔다고하는데, 리투아니아의 불행한 역사가 성당 건물 하나에 그대로 투영되어 있다.  

최근에 대대적 보수작업이 행해져서 성당의 내부는 축조된지  400년이나 흘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깨끗하며, 은은한 옐로우에 화이트가 조화를 이룬 투톤은 마냥 화사롭기만 하다. 그러나 너무도 현대적인 내진(內陣) 때문에 흥미가 반감되는 면도 있다. 아, 이런 규모의 성당이라면 돔 부분에 멋진 천장화가 하나쯤은 있을 법한데, 그마저도 생략되어 있어서 밋밋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첫 느낌이 이러하니 성당 내부를 둘러보는 것도 지극히 건성건성으로 흘러갔는데, 중앙제단의 모습과 

성당 후면의 파이프 오르간을 사진기에 담아 두는 것으로 성당 내부 구경을 마친다.  


5. 니콜라스 러시아 정교회(Orthodox Church of Nicolas)


대성당에서 필리에스 거리를 지나쳐서 디죠이 거리를 따라  (구) 타운 홀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길 왼편에서 자연스레 만나게 되는 교회인데, 보는 것처럼 아담하다.

니콜라스 정교회의 경우 또한 사진 촬영에 관대한 편이다. 심지어 내가 카메라를 아예 꺼내들지 않자 안내하시는 분이 적극적으로(!) 사진이 허용된다고 설명할 정도로 말이다. 덕분에 정교회의 내부사진을 얻을 수 있었다. 가톨릭 성당이나 기독교 교회의 중앙제단과 달리 중앙제단 주변에 여러 성자들의 그림이 빼곡하게 차 있어 조금 어지러울 정도인데, 이것이 정교회 중앙제단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정교회 내부를 청소하시는 분이 유독 정성스레, 뿐만 아니라 그 모습만으로도 경건함이 우러나올 만큼 열심히 닦고 계셔서 그 의미도 제대로 모르고 사진 한 장을 남겼다.  



###### 여섯째 마당: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The Museum of Genocide)



리투아니아란 나라도 역사가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발틱해를 끼고 있어 해양으로의 진출이 용이하고, 소련(러시아)과 독일이란 강대국 사이에 끼여있는 지정학적 여건이 가장 큰 이유였기 때문인데, 이런 면에서는 우리나라가 겪어야 했던 불행한 역사와 비슷한 면이 있다. 한편 소련(러시아)과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던 시절에는 많은 리투아니아인들이 죽임을 당했는데, 이렇게 죽어간 사람들을 모시는 한편 이를 후세에 전하여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하고자 만들어진 것이 바로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이다. 다만 박물관이 있는 자리가 예전에 KGB본부(지하실은 당시 감옥)가 있었던 자리인 관계로,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이란 정식 명칭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를  보통 'KGB박물관'이라고 부르고 있다. 



1.  찾아가는 길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은 지금까지 이야기 한 빌뉴스의 볼거리들에서 덩그마니 홀로 외딴 곳에 떨어져 있다. 물론 대성당 광장 옆으로 나있는 게디미나스거리를 따라 곧장 걸어가기만 하면 어렵지 않게 박물관과 만날 수 있기는 한데, 문제는 대성당에서 박물관까지의 거리가 줄잡아 1km는 족히 되는데다가 박물관으로 걸어가는 도중에 관광객의 주목을 끌만한 이렇다 할 볼 거리가 없다는 것이다. 게디미나스 거리를 따라 한참을 걷다보면  아래 사진에서 보는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을 만나게 되는데, 도로상은 물론이고 건물 외벽 어디에도 이 건물이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이란 것을 알려주는 안내판은 볼 수 없다. 

그렇지만 건물을 조금 더 찬찬히 뜯어보면, 이 건물이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이라는 것이 너무도 분명하게 밝혀진다. 바로 건물 하단부의 돌에 가득히 쓰여 있는 글씨와 숫자들이 그 단서인데, 사망연대가 모두 1945년 이후인 것을 보면 대부분 나치가 떠난 이후에 이 곳에서 죽어간 사람들에 관한 기록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위의 건물을 따라 조금만 더 걸으면 왼쪽으로 빌딩 숲 사이에 나무가 우거진 길을 만나게 되는데, 그 초입에 이 곳에서 삶을 마감한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보인다. 그리고 기념비 왼쪽에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의  출입구가 있다. 

출입구 안으로 들어서면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의 분위기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2장의 사진이 보인다. 그 하나는 흙 위에 뒹굴고 있는 사람들의 뼈가 화면을 가득 메운 사진이고, 

다른 하나는 이 곳에서 죽음을 맞은 사람들의 얼굴들 위로  붉은색 바탕에 흰색으로 쓰여진 '집단학살 박물관'이란 글씨가 선명한 사진이다. 

이어서 나치 독일과 소련(러시아)의 지배하에 얼마나 많은 리투아니아 사람들이 투옥되고 처형되었으며, 또한 강제이주를 당하여 노역에 시달렸는지를 보여주는 자료가 보인다. 


이 자료를 통해서 한가지 다시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나치가 참으로 많은 사람을 죽였다는 것이다. 소련(러시아)의 지배 47년 동안 감옥에서의 옥사, 강제이주 과정에서의 사망, 그리고 빨치산(Partisan) 활동 및 지원으로 인한 사망을 모두 합쳐 75,000명 내외의 사람이 죽어갔다. 


그런데 나치 독일이 지배하던 3년 사이에 사망자의 수는 무려 240,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히틀러가 지배하던 나치 독일이 얼마나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는지를 너무도 잘 보여주는 기록이다.  




2. 전시실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하나는 각종 자료들로 꾸며진 전시실이고, 다른 하나는과거에 감옥으로 쓰였던 KGB 본부의 지하실(감옥)이다. 전시실은 기본적으로 역사적 사실의 진행순서를 기준으로 배치되어 있는 10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첫번째 방은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처음으로 지배했던 1940년부터 1941년까지의 기록이 차지하고 있다.

소련에 이어 1941년부터는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를 지배한다. 그리고 1944년에  3년에 걸친 나치 독일의 지배가 끝났지만, 이번에도 리투아니아인들은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한다. 나치 독일이 물러간 자리를 다시 소련이 차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로부터 1953년까지 9년여에 걸쳐 소련과 리투아니아 비정규군간의 전쟁이 계속되는데, 그것을 사가(史家)들은 빨치산전쟁(Partisan War)이라고 부르고 있다. 제2전시실과 제3전시실은 바로 이 빨치산 전쟁에 관한 기록들로 채워져 있다.

비록 비정규균이지만 당시 리투아니아 빨치산(Partisan)들은 정규군 수준의 편제를 갖추고 있었으며, 복제도 정비되어 있었다. 

한편 빨치산 전쟁에는 여성들도 대거 참여 했다고 하는데, 여성들은 군복과는 조금 거리가 먼 의상을 착용하고 있다.  

1944년부터 1953년까지의 소련에 대한 리투아니아인들의 항전에 대해 전쟁(War)이라고 표현해 놓고는 있지만, 그 실상을 보면 전쟁이라고 하기에는 양측의 전력차이가 너무도 컸다. 4번 전시실의 이름이 "불평등한 싸움(Unequal Fight)"인 것을 보면 리투아니아인들 스스로 이런 점을 잘 인식하고 있는 것같다. 

소련이 재차 리투아니아를 지배하기 시작한 1944년부터 1956년에 이르기까지 리투아니아에서는 민간인들의 투옥과 강제노동이 계속된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우리나라에서 했던 짓을 이 곳 리투아니아에서도 자행했는데, 바로 강제이주(Deportation)가 그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사할린이나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 당했던 것처럼,  리투아니아인들은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시베리아, 캄차카반도로 강제이주를 당했다. 

강제이주를 당한 리투아니아인들의 삶은 그야말로 처절했다고 하는데, 각종 필름과 사진 및 기록들이 그를 웅변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죽음의 땅 시베리아에서 학살과 불평등으로 고통을 겪기는 하였지만, 그 곳에서도 리투아니아인으로서의 삶은 계속되었다. 

1954년부터는 위에서 말한 비정규군에 의한 게릴라전조차도 사라지고, 리투아니아는 완전히 소련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무장투쟁은 사라졌고, 기껏해야 민간차원의 저항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민간차원의 저항이라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어서 기껏해야 소련체제와 그의 이데올로기 및 삶의 방식을 거부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가 리투아니아가 독립을 하게 되는 1991년까지 이어진다.

한편 이 시기에는 새로이 설치된 KGB가 리투아니아에서의 민간저항을 철저히 억제하고 소련이 리투아니아를 지배하는 것의 선봉에 서게 된다. 


3.  구 KGB본부의 지하실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은 과거에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KGB본부의 지하실을 그대로 보존하여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당시 소련은 소련에 소극적 형태로 저항했던 민간인들을 이 곳에 투옥하였는데, 이들은 이 곳에서 갖은 고초를 겪고, 심지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런 점을 상기하게 만드는 리투아니아 집단학살 박물관을 둘러 보는 것은 Dark Tourism의 대표적 예가 될 수 있을 듯하다. 

감방은 대체로 2인실과 4인실로 이루어져 있다.  

이들 이외에 독방도 있는데, 독방은 배식구만 뚫어 놓았을 뿐 완전히 밀폐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엄청난 두께의 스펀지(?)를 붙여 방음장치를 해놓았는데, 이는 저 독방안에서 무슨 짓이 벌어져도 옆방 사람들은 그 곳에서 자행되는 일들을 전혀 알 수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편 어떤 감방 안에는 사람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입고 계신 옷들로 보아 모두 성직자들이로 보인다. 그리고 이 분들 또한 이 곳에서 많은 고초를 겪으시다가 이 땅에서의 삶을 마감하신 듯하다. 



####### 일곱째 마당: 공공건물



1. 리투아니아 대통령 궁(Presidental Palace)


현재 리투아니아의 대통령이 거하는 곳으로 집무실은 오른쪽에 있는데, 우리나라의 대통령이 거하는 곳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대통령이 거하는 곳이 여전히 삼엄한 경비로 접근이 여의치 않은 느낌을 주는 것에 반하여, 리투아니아 대통령 궁 앞의 넓은 광장에는 견학을 나온 무리들이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다. 


리투아니아 대통령궁의  기원은 15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데, 처음 축조된 이래 폴란드와 리투아니아가 분할되기 전까지는 빌뉴스 대주교의 레지덴츠로 사용되었다. 그 후에는 이 지역 사령관의 관저로 사용되었다고 하는데, 1812년에 러시아로 향하던 나폴레옹이 이 곳에서 하루를 묵는 등 많은 역사적 인물들이 이 곳을 찾았었다. 그 후 1824년부터 1832년에 걸쳐 개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통령궁 왼쪽으로 나 있는 골목에 약간은 권위적 느낌을 주는 문이 보이는데, 이 곳이 대통령궁 안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느낌이 들었다. 굳게 닫혀 있는 문이 주는 딱딱한 분위기, 그리고 문위에 그리핀(Griffin, 사자 몸통에 독수리의 머리와 날개를 지닌 상상속의 동물)이 리투아니아의 문장(紋章)을 안고 있는 모양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나와 같은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대통령궁 앞에 서 있는 입간판을 보면, 대통령 궁의 내부 정원과 공원은 토요일과 일요일 11시부터 18시까지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이 곳을 개방하지 않는 이유는 대통령이 국사를 돌보는 일에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 아닐까 싶다.    


2. 구 시청사(Town Hall)


필리에스 거리를 지나 디죠이 거리로 접어들어 새벽의 문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넓은 광장을 만나게 되는데, 아래 사진은 디조이 거리쪽에서 필리에스거리 쪽을 바라보며 찍은 광장의 모습이다. 오른 쪽에 보이는 교회가 앞에서 이야기 했던 '니콜라스 러시아 정교회'이다.

이 광장의 끝 부분, 다시 말해 아우시오스 바르티 거리가 시작하는 지점에  구 시청사가 자리하고 있다. 기록상으로는 이 자리에 건물이 처음 들어선 것은 15세기라고 하는데, 지금 우리가 보는 구 시청사건물은 18세기에 축조된 것이다. 건물의 느낌이 웬지 대성당을 닮은 듯하여 찾아보니, 역시... 이 건물 또한 대성당을 지은 건축가 스투오카 구체비츄스(Stuoka Guceviciua)의 작품이다. 

졸업식을 끝낸 한 무리의 학생들이 시청사 계단에서 졸업식의 대표적 세레모니인 학사모를 하늘에 던지는 광경을 연출했는데, 내가 그것을 인식한 순간에는 이미 학사모는 제 주인을 찾아가고 있었다. 세레모니를 끝낸 후에 삼삼오오 모여 지인들과 담소하며 연신 플래쉬를 터뜨리는 모습은 우리에게도 너무도 익숙한 그것인데, 특이하게도 압도적으로 여학생수가 많았다. 


3. 새벽의 문(The Gates of Down)


빌뉴스의 구시가지를 둘러싸고 있는 성벽은 16세기에 만들어졌고, 성벽과 함께 성안으로 통하는 5개의 문이 축조되었다. 그런데 그들 5개의 문들 가운데 예전의 모습을 온전히 간직하고 있는 문은 새벽의 문이 유일해서, 이제 새벽의 문은 많은 관광객들이 빌뉴스 관광의 출발점으로 삼는 랜드마크가 되어 버렸다. 구시가지 바깥쪽에서 바라다 본 새벽의 문(사진 왼쪽, 신호등 뒤)과 새벽의 문과 이어져 있는 성벽의 모습인데, 솔직히 "아름답다"라는 찬사가 터져 나올만한 수준은 못된다.  

위의 사진만 봐서는 새벽의 문이 빌뉴스 구 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라는 느낌이 잘 안들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보면 입구라는 느낌이 강하게 묻어 나오는데, 새벽의 문을 좀 더 자세히 바라 보면서 문의 구조를 이야기 해 보고자 한다. 


우선 문 위쪽과 성벽을 따라 나 있는 구멍들은 성의 본래의 기능인 군사적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적들을 향해 몸을 숨기고 사격을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벽화의 주인공은 의심의 여지 없이 물론 예수님이시다. 한편 문의 맨 윗부분에는 대통령궁의 문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맥락의 문양이 새겨져 있다. 이 부분은 르네상스양식의 '다락방'에 해당하는데, 문안으로 들어가 뒤로 돌아서서 문쪽을 바라보면 다락방의 모습을 알아 볼 수 있다. 

옛날에 구시가지를 찾은 상인이며 여행자들은 바로  이 새벽의 문을 통해 빌뉴스의 구시가지로 들어갔는데, 나 또한 그들의 발길을 좇아 빌뉴스의 구 시가지 안으로 들어가 본다. 이렇게 성 안으로 발길을 내딛을 때면 지구라는 별을 찾은 외계인이라도 된 듯한 설레임 속으로 빠져 듦과 동시에, 과거의 시간 속으로 여행을 하는 낮선 방랑자가 갖게 되는 두려움 또한 마음 한 켠에 또아리를 틀곤 한다.

새벽의 문 뒤쪽의 모습인데, 다락방의 꼭대기에 십자가가 선명하게 보인다. 꼭 십자가가 아니더라도 전체적인 모습에서 다락방은 예배당의 느낌을 한껏 풍기는데, 십자가 밑에 금빛으로  써 있는 "MATER MISERICORDIA"는 "자비로우신 어머니", 즉 성모 마리아를 의미한다. 

무심코 다락방을 바라보다 특이한 점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다락방에 가득 들어서 있는 사람들이 예외없이 항건을 두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다락방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기에 다락방을 올라가는 것은 내 여행 계획에 없던 것이었지만,  궁금한 것을 참지 못하는 내 성미가 또 한번 폭발해서 올라가 보았다.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같은 모습의 항건을 두르고 있는 일단의 사람들이 가득하다. 다락방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도 경건한 모습으로 무릎을 꿇거나 일어선채로 기도와 묵상에 잠겨 있는 모습으로 보아, 아마도 어떤 종교단체의 성지순례의 한 과정이었지 않을까 싶다. 

"저 일단의 사람들 사이를 뚫고 계단을 오르지는 말아야 한다"는 생각과 "도대체 다락방에 무엇이 있길래 이런 광경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라는 궁금증이 잠시 대립하였지만, 어느새 나는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지금 생각해도 많이 부끄러운 결정이었다). 계단의 끝에 있는 자그마한 다락방 안에는 예배가 진행 중이었는데, 사람들의 시선과 마이크를 잡으신 분 그리고 그 뒤쪽의 사제복을 입으신 분의 행동을 보아 사진 왼쪽에 무언가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감지할 수 있었다.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이 분들이 예배를 마칠 때까지 꽤 많은 시간을 흘려 보내야 했다. 이윽고 예배가 끝나고 사람들이 물러간 뒤에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보니 17세기에 이름모를 화가가 그렸다는 '기적을 불러 오는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눈에 들어온다. 은박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특징적인 것은 성모 마리아의 얼굴과 손이 검게 채색되어 있는 것인데, 유럽을 여행하며 검은 얼굴의 성모 마리아를 이미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어색하지는 않았다. 


이처럼 성스러운 곳을  요한 바오로 2세가 그냥 지나칠 리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두리번 거려보니, 아니나 다를까 다락방으로 오르는 계단 참에 1993년에 당신께서 이 곳을 방문하여 기도를 올리셨다는 이야기가 적혀 있다. 


4. 바질리안 대문


구시가지의 수도원으로 이어지는 대문이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의 여행 안내 책자는 물론이고 현지에서도 바질리안 대문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자료를 구할 수가 없었다. 하여 대문 앞의 동판에 적혀 있는 내용인 '1347년에지어졌다가 화재로 소실되어서, 1748년에 로코코양식으로 다시 지어진 것'이라는 설명만을 이 곳에 그대로 옮겨 놓는다.   



######## 여덟째 마당:  잠자리



근래들어  '부띠크 호텔'이라는 이름의 호텔들이 성업 중인데, 이들 호텔은 각각의 객실의 차별성을 강조하고, 따뜻함을 느끼게 하는 차별화된 서비스로 호텔을 찾는 손님들에게 어필하고 있다. 입구의 아치 위에 세익스피어의 얼굴 모습이 나무판으로 새겨져 있고, 그 안쪽으로 넓은 전용주차공간이 있는 빌뉴스의 세익스피어 부띠끄 호텔 또한 그에 속한다.  

이 호텔의 객실은 유명 문호들의 이름으로 구분되며, 객실마다 전혀 다른 인테리어로 꾸며져 있다. 아래 사진은 내가 머물렀던 3층의 객실인데, 방의 이름은 '디킨스'. 이름에 걸맞게 객실안의 책상과 자그마한  책꽂이에는 영국 소설가 찰스 디킨스(Charles Dickens, 1812~1870)의 작품들이 가지런히 꽂혀 있다. 덕분에 여행 중에 어린 시절에 읽었던, 그러나 내용은 생각나지 않는 디킨스의 작품들을 떠울리게 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올리버 트위스트, 두 도시 이야기, 위대한 유산... 등등.  

레스토랑 역시 넓고 황량한 하나의 공간이 아니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여러개의 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방들마다 벽지의 톤을 달리하여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그리고 비록 간단한 메뉴이기는 하지만, 이른 아침에도 메인 요리는 오더를 받아 따뜻하게 서비스를 해서 무언가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림 속에 두개의 계란 후라이, 해쉬 포테이토와 토스트, 소시지와 베이컨, 빈과 구운 토마토 등이 보이느 것으로 보아서 아마도 내가 잉글리쉬 블랙퍼스트를 주문했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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