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Chapter는 가보고 싶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가보지 못한 곳에 대한 소개를 그 내용으로 한다. 그런 점에서 리투아니아를 자동차로 누비고 다닌 내 여행의 기록을 담고 있던 지금까지의 글들과는 그 성격을 많이 달리한다. 이처럼 가보지도 않은 곳에 대하여 다른 분들의 블로그를 뒤적이고 개개 관광지별 홈피도 들락날락해 보면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카우나스의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를 소개하는 것에 그친 내 글만 읽고) 혹시 카우나스를 방문하게 될 여러분들이 여기서 이야기하는 3곳의 존재 자체를 몰라서 이곳들을 그냥 스쳐 지나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다만 내가 가보지도 않은 곳을 이야기하는 것인 만큼 이번 글은 그저 "이런 곳이 있다"라는 정도에 그치도록 하겠다. 내가 가보지도 않은 곳을 굳이 이렇게라도 쓰는 이유는 이곳들이야말로 카우나스(주변)에서 가장 볼만한 곳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각기 독특한 의미를 갖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 둘째 마당: 제9 요새
카우나스 구시가지와 신시가지는 아래 지도상에 카우나스(Kaunas)라고 쓰여 있는 부분, 즉 위아래의 두 개의 강(네리강과 네무스강)이 만나는 곳에 형성되어 있는 삼각형 모양의 땅에 해당한다. 그리고 그렇게 보면, "제9요새(9th Fort)"는 카우나스 중심으로부터 북쪽으로 꽤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제9 요새는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러시아의 군사 요새로 지어진 곳인데, 1924년부터는 감옥으로 사용되기 시작했고, 나치 독일이 이곳을 점령한 때에는 약 20만 명에 이르는 유태인과 나치에 비협조적인 사람들의 학살 장소로 쓰였다. 그리고는 소련이 다시 이곳을 지배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었다고 하니, 도대체 이 좁은 공간에 어찌 이렇게도 짙은 암흑의 역사가 드리워지게 된 것인지는 가늠할 길이 없다. 제9 요새에 관한 글과 사진들은 주로 "suekang21"이란 이름으로 naver에서 활동하셨던 블로거분의 글(https://blog.naver.com/suekang21/60205863931)을 참조한 것인데, 지금 다시 확인해 보니 어찌 된 일인지 열리지가 않는다.
우선 제9 요새에 들어섰을 때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것은 근래에 새로이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박물관인데, 단순히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보여주는 차원을 넘어서 이곳에서 삶을 마감하신 분들의 넋을 달래기 위해 예배를 드리는 공간으로서의 기능 또한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건물 전체가 교회 느낌을 풍긴다.
2. 역사의 현장
박물관을 나서게 되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옛 감옥(정치범 수용소), 유태인 등을 학살했던 장소 등과 같은 끔찍한 역사의 현장과 마주치게 된다. 여기서부터 그야말로 어두운 과거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게 되는데, 먼저 높은 담과 담 위에 둘러 쳐져 있는 철조망이 시선을 잡아 끈다. 한 번 저 담 안으로 들어가면, 살아서 다시 밖으로 나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던 과거가 떠오른다.
요새이자 감옥이었던 이곳의 벽에는 이곳에서 희생된 사람들의 시신을 발굴하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옆으로 길게 걸려 있고(왼쪽 사진), 나치가 유태인들을 총살하던 곳의 벽에 남아 있는 수많은 총탄의 흔적은 그날의 비극을 웅변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오른쪽 사진).
그리고는 감옥인데, 바닥에 일부러 물을 뿌려 놓았을 리는 없건만 무언가 음습한 기운이 감옥 안을 감돈다. 한기도 느껴지고. 수도 빌뉴스에서 봤던 '리투아니아 집단학살박물관(The Museum of Genocide)'의 모습이 자연스레 오버랩된다.
옛 감옥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이외에 감옥을 전시실로도 활용하고 있는데, 제9 요새의 옛날 모습을 보여주는 전시물(왼쪽 사진)과 일본 영사 스기하라 치우네에 관한 전시물(오른쪽 사진) 등이 전시되어 있다. 스기하라 치우네에 관하여는 이하에서 별도로 이야기한다.
3. 기념 조형물
소련 체체하에서 감옥과 정치범 수용소로 사용되었던 곳에서 벗어나 밖으로 나오면 기념(?) 조형물이 우뚝 서있는데, 통상적인 경우 만나게 되는 기념물들과는 조금 다른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멀리서 볼 때에는 "독특하다" 그리고 어찌 보면 "멋있다"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념물을 가까이 가서 보게 되면, 그런 느낌은 일순간에 사라진다. 누가 봐도 고뇌와 고통에 내몰린 것으로 여겨지는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아마도 이곳에서 처참하게 삶을 마감하신 분들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Tip: Dark Tourism ?
언젠가부터 Dark Tourism이란 말이 부쩍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Dark Tourism이란 한마디로 어두운 과거 속으로 헤집고 들어가는 여행을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제주 4.3 항쟁과 관련된 장소를 돌아보는 것과 관련하여 많이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나 또한 Dark Tourism이란 말을 처음 만난 것은 제주도였다. 어두운 과거를 돌아보면서 다시는 이 땅 위에 그런 흑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의미 있는 여행을 의미하는 Dark Tourism, 이곳 제9 요새는 그를 제대로 맛보게 해 준다.
### 셋째 마당: 스기하라 하우스
스티븐 스필버그(Steven Allan Spielberg, 1946~)는 "유태인이 경영하는 그릇공장을 인수했던 독일인 쉰들러가 유태인 회계사와 가까워지면서 심경에 변화가 일어 자신이 구해낼 유태인의 명단(쉰들러 리스트)을 만들어서 유태인들의 생명을 구한다"는 스토리를 가진 영화 쉰들러 리스트(Schindler's List)를 1994년에 제작하여 발표한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 상황이 리투아니아에서도 벌어졌고, 당시 생사의 갈림길에 선 유태인들에게 생명의 길을 제공해 준 사람이 있었는데, 주 핀란드 일본대사관에 근무하다가 리투아니아로 파견을 나와 1인 영사 대리로 근무했던 스기하라 치우네(杉原千畝/Sugihara Chiune, 1900~1986, 사진 참조)가 바로 그 사람이다.
스기하라가 근무했던 일본 영사관은 현재 "스기하라 하우스"란 이름으로 일반에게 공개되어 있는데, 스기하라 하우스는 카우나스 신시가지의 끝자락 정도에 있으니,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도 둘러볼 수 있다.
이하의 글과 사진은 다음 두 분의 블로그를 참조한 것인데, 그 가운데 한 분의 글은 지금도 이렇게 쉽게 만날 수 있다.
스기하라가 유태인에게 생명의 길을 열어준 사람으로 평가받는 이유를 이해하려면 당시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나치 점령하에 리투아니아 내에 있는 유태인들이 생명을 부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소련을 거쳐 제3국으로 이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소련은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소련으로 넘어 들어가려면 일본 통과 비자를 받을 것을 요구했고, 이 때문에 유태인들은 스기하라가 근무하는 일본 영사관 앞으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문제는 당시 독일과 돈독한 관계에 있던 일본 정부가 일본 통과 비자의 발급을 불허하는 방침을 세웠다는 것이었는데, 이런 상황에서 스기하라는 일본 정부의 방침에도 불구하고 총 2,139장의 일본 통과 비자를 발급한다. 아래 사진이 당시에 스기하라가 발급한 일본통과 비자이다.
당시에는 1장의 비자로 1 가족이 이주할 수 있었기 때문에 스기하라가 발급한 2,139장의 비자를 통해 실제로는 6,000명이 넘는 유태인이 소련을 거쳐 제3 국으로 이주하여 생명을 건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처럼 많은 이의 생명을 구한 스기하라를 동방 정교회에서는 성인 반열에 올려놓고, 동방 정교회의 이콘(ICON: 흔히 아이콘이라 하며, 성인을 그린 그림이나 조각) 형태로 스기하라의 초상도 만들어 놓고 있다. 아, 이런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스기하라가 정교회 신자였기 때문이다.
스기하라가 근무했던 일본의 옛 영사관 건물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물론 일본의 노력도 있겠지만, 내 생각에는 유태인들의 자금이 이를 가능케 하는 실질적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아, 당시 일본이 빌뉴스를 제쳐두고 카우나스에 자신들의 영사관을 설치했던 이유는 1차 대전 후 1930년대까지 리투아니아의 임시 수도가 카우나스였기 때문이다. 아래 사진 속 2층 건물이 스기하라 하우스인데, 현재 2층은 대학의 아시아연구소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스기하라 하우스 앞에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는데, 오른쪽 기둥엔 리투아니어로, 그리고 왼쪽 기둥엔 일본어로 "희망의 문, 생명의 비자"라고 새겨져 있다. 기둥 사이로 철제문 형상의 구조물이 보이는데, 이는 희망의 "문"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스기하라 하우스 내부는 당시 스기하라가 근무했던 사무실의 모습을 재현해 놓고 있다. 정면에 보이는 일장기가 살짝 눈에 거슬리기는 하지만, 일본 영사관이었던 곳이니 그것을 문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 넷째 마당: 파자이슬리스 수도원
사진만으로 판단하건대 카우나스에서 가장 멋있는 공간, 다시 말해 카우나스를 찾은 이상 반드시 가보아야 할 곳은 17세기에 수도사들을 위해 지어졌다는 파자이슬리스 수도원(PažaislisMonastery)이다. 리투아니아 관광청 홈페이지는 한술 더 떠서 파자이 슬리스 수도원을 리투아니아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실제로 리투아니아 여행도중에 이런 멋진 경치는 어디에서도 마주친 적이 없다.
그렇다면 파자이슬리스 수도원은 Must-See라고 할 수 있는데, 문제는 파자이슬리스 수도원이 카우나스의 중심으로부터 꽤 떨어져 있어서 접근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다녀오신 분들의 말로는 카우나스 중심에서 드문 드문 다니는 버스로 25분 정도를 달려 버스에서 내린 후, 다시 또 2km 정도를 걸어야 한다고 하니 말이다.
수도원은 네무스강으로부터 이어지는 커다란 라군 호수 쪽으로 돌출된 부분에 들어서 있는데, 그 바운더리가 워낙 크기 때문에 라군 호수와 수도원 전체를 조망하는 것은 단순한 여행객의 시선으로는 불가능하다. 결국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리투아니아 관광청 홈페이지에 하늘에서 바라본 수도원의 환상적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 올라와 있다.
파자이슬리스 수도원에 관한 블로그들에 많은 수도원 사진이 올라와 있지만, 그것들은 수도원의 모습을 그야말로 단편적으로 보여줄 뿐이다. 때문에 그들 사진만으로는 수도원 전체의 모습을 이해하기 어려운데, 결국 또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하다. 내 생각에 수도원의 전체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으로는 이만한 것이 없다.
자동차를 이용하지 않고 여행을 하는 경우라면 수도원에 접근하는 첫 관문은 아래 사진과 같은 모습의 문이다. 물론 자동차를 가지고 여행하는 경우라면, 이 문의 양옆으로 나있는 길을 따라 주차장으로 접근하면 될 일이다.
저 문을 지나면 이런 숲길이 펼쳐지고, 그 길이 끝나가는 곳에 희미하지만 붉은 지붕의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건물 너머에 종교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때문에 이러한 광경과 마주치게 되면, 그 누구라도 눈앞에 보이는 붉은 지붕을 가진 건물이 수도원으로 들어가는 메인 엔트런스에 해당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즉, "저곳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거나 수도원에 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라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니다. 저곳은 그저 Monte Pacis란 이름을 가진 호텔일 뿐이다.
그럼 수도원의 입구는 도대체 어디에 있으며, 수도원으로는 어떻게 들어가냐고? 결론은 호텔 옆으로 나가서 벽에 붙어 있는 초인종을 누르면 된다. 문이 열릴 것이고, 문안으로 들어가면 그 오른쪽에 진짜 수도원 매표소(인포 데스크)가 있다. 입장료는 2019년 기준으로 6유로. 아, 실제로 이곳을 찾을 계획을 세웠다면, 입장시간을 유의해 두기를...
다시 수도원 전경을 보여주는 사진을 보여주는 이유는 한 가지 말해 둘 것이 있어서이다. 위에서 보여 준 호텔과 그 뒤의 교회 사진을 보면 호텔 바로 뒤에 교회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쉬운데, (아래 사진에서 보듯이) 사실 호텔과 그 뒤쪽의 교회 사이에는 꽤 널찍한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아래 사진은 호텔 뒤쪽에 자리한 둥근 돔을 가진 건물을 하늘에서 바라본 것인데, 이 건물이 바로 북유럽의 후기 바로크 양식의 걸작으로 꼽히는 '성모 마리아 방문 기념 교회'이다. 교회의 돔 위로 떨어지는 석양이 빚어내는 빛깔의 향연은 가히 예술적이다.
성모 마리아 방문 기념교회는 그 외관도 멋들어지지만,
대리석 기둥이 돋보이는 내부의 모습 또한 밖에서 바라본 교회의 모습만큼이나 아름답다. 이곳은 특히 성지순례 일정에도 빠지 않는데, 실제로 교회 안팎에서 그룹투어를 하시는 분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다.
교회 내부의 경우 천장과 벽면을 가득 메운 프레스코화가 압권인데, 이 프레스코화는 이탈리아 출신으로 리투아니아에서 활동한 미켈란젤로 팔로니의 작품이다. 아, 미켈란젤로 팔로니는 바르샤바의 빌라노프 궁전에도 프레스코화를 남기는 등 17세기에 활동한 화가로,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르네상스 시대를 살아갔던 천재 화가이자 조각가인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와는 다른 인물이다.
수도원에서 라군 호수로 바로 이어지는데, 라군 호수가 만들어내는 물빛과 나무들, 그리고 모래사장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바닷가의 고급 휴양지에라도 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