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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T, 기타를 치다

by 김건우

1학기 내신 성적을 받아보니 3점대 중반의 내신이었다. 수시로 서울의 명문 대학에 진학하기엔 어려운 성적이었다. 내가 고등학교를 진학했을 시점부터 대입은 이미 수시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다. 수시로 대학 총원의 70%를 뽑을 정도였다. 수시엔 크게 세 가지 전형이 있다. 학생부교과전형, 학생부종합전형, 논술전형이 그것이다.

학생부교과전형은 말 그대로 내신 성적만으로 승부가 갈린다. 서울에 있는 대학, 그중에서도 경쟁력 있는 대학은 내신 1점대 초반에서 커트라인이 끊긴다. 수능 최저학력기준이 없는 경우엔 커트라인이 더 높아진다. 1학년 1학기 내신에서 3점대 중반을 맞은 것은 학생부교과전형에서 이미 탈락이라는 뜻이다.

다음으로 학생부종합전형은 내신과 함께 생기부, 자소서, 면접도 평가의 대상이 되는 전형이다. 소위 학종이라 불리는 이 전형은 특목고 학생들이 유리한 전형이기도 한데, 대학에서 외고나 자사고 같은 특목고를 우대한다고 공공연히 알려졌기 때문이다. 3점대 중반의 내신으로 학생부를 잘 관리해서 성균관대에 간 선배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나의 마음은 어린 허영으로 가득했다. 초등학생들의 목표가 하버드인 것처럼 말이다.

‘3점대 중반의 내신으론 학생부를 잘 만들어도 성균관대라니. 안 가고 만다.’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고 오만한 생각이었다. 마지막으로 논술 전형은 대학별 고사를 수능 전후에 치르는 형식이다. 내신의 영향이 적은 만큼, 경쟁률은 살벌하다. 문제는 서울대는 논술 전형을 실시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서울대병에 걸려있었던 고1의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했다. 정시를 위주로 공부를 하되 내신 기간엔 전략적으로 내신 공부를 하기로 했다. 하루는 시험기간이었는데, 다음날 시험과목이었던 도덕을 제대로 외우지 못한 상태였다. 밤11시면 방에 들어가 강제로 취침을 해야했기에 나는 사감 선생님의 눈을 피해 방 안 화장실 변기에 책을 두고 달달 외웠다.

이렇게 모든 과목을 골고루 챙겼기에 내신은 반에서 3~5등 정도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다. 반면 어떤 친구들은 내신 공부를 전혀 하지 않았다. 평소에 수업만 열심히 듣고 평소 실력 그대로 내신 시험을 치는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곤 평소 공부 시간을 수능 중심으로 가져가는 친구들이었다. 말 그대로 정시 올인이라는 배수의 진을 치는 것이다. 그렇게 공부했던 친구들 중에서 서울대가 꽤 많이 나왔다.


고1에서 고2로 올라가는 겨울방학은 중요한 시기다. 바로 문과와 이과 중 어디를 선택할지 결정해야 할 시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문과가 끌렸다. 사회 과목 점수가 과학보다 좋았고, 어릴 적 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던 법조인의 멋도 나를 유혹했다. 하지만 어머니는 단호했다.

“요즘은 이과가 대세야. 문과는 취업도 안 돼.”

그 말은 지금 생각하면 전적으로 맞다. 사실, 고등학교 선택부터 어머니는 줄곧 반대했다. 내신 따기 어려운 자율형 고등학교보다, 가까운 일반고에 가서 수시를 노리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말씀이었다. 그때도 나는 끝내 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돌아보면 문·이과 선택도, 고등학교 진학도 결국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 완벽한 ko승이었다. 학생 독자들은 부디 어머니 말을 잘 듣길 바란다.

겨울방학 동안 난 키가 무섭게 자랐다. 키 작은 걸로 반에서 1~3등을 차지하던 내가 한순간에 170cm를 넘겼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양 다리 길이 차이가 눈에 띄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중학교 시절 내 다리 길이 차이는 2-3cm 정도였는데 키가 자라면서 그 차이가 점점 더 심해졌다. 두 다리 길이 차이가 4cm 가까이 벌어졌다. 왼쪽 신발에 깔창을 신지 않으면 보행이 불편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난 중학생때부터 목이 긴 운동화만을 고집했다. 왼쪽 신발 안에 3cm 두께의 깔창을 넣기 위해선 슬리퍼나 단화로는 어림없었기 때문이다. 한때는 서울에 있는 ‘이세창장애인구두’에서 맞춤 신발을 맞추곤 했지만 시간과 비용의 문제로 운동화에 깔창을 끼고 다니는 편이 나았다.

그렇게 학교 실내에서도 실내화를 신지 않고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3선 슬리퍼라도 신으면 왼발로 항상 까치발을 들게 되고 이로 인해 왼발이 아팠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학교때부터 난 늘 깍두기처럼 학교에서도 운동화를 신고 다녔다. 학교 실내에서 운동화를 신는 나를 보고 지적하는 선생님들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내 다리에 대해 해명을 해야 했다.


양발 크기 차이의 문제도 있었다. 오른발 크기는 250mm이었지만 왼발 크기는 230mm에 불과했다. 3cm 깔창을 깔아도 왼발엔 운동화가 헐거워 불편했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가 구멍 난 양말을 운동화 앞쪽에 집어넣어 내 왼발에 딱 맞는 신발을 만들어 주시곤 했다. 때론 얇은 깔창 몇 장을 접착제로 붙여 최대한 편한 신발을 맞춰주시곤 했다. 신발 한 짝에 두 가지 문제(다리 길이 차이와 발 크기 차이)를 동시에 맞춰야 하니, 신발 고르기도 전쟁이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든든한 건 역시 우리 엄마였다.

집에서는 왼발에만 슬리퍼를 신고 다닌다. 해가 갈수록 그 슬리퍼의 높이는 점점 높아져만 갔다. 어렸을 땐 높이 2cm 정도의 얇은 슬리퍼였지만, 이제는 4cm 이상의 두툼한 단화를 신어야 한다. 의사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리 길이 차이가 5cm 이상이면 수술을 고려해야 합니다.”

지금은 아직 4cm 차이니까 성인이 될 때까지 더 지켜보기로 했다. 그 수술은 흔히 ‘키 커지는 수술’로 알려진 바로 그것이다. 내 경우는 왼쪽 다리만 이 수술을 받는 것이다. 어릴 적 발가락 수술을 위해 아주대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 수술을 받은 아주머니를 본 적이 있었다. 다리에 철심을 박은 채 고통을 견디는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아직은 아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내 왼손은 항상 내 왼 주머니 속에 있었다. 하루 종일 공부만 하니 내 왼손의 비밀이 드러날 일도 없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친구들 대부분은 오랫동안 내 왼손에 대해 알지 못했다. 그러다 음악 시간에 기타를 배우게 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원래라면 왼손으로 줄을 눌러 음을 만들고 오른손으로 줄을 튕겨야 하지만, 내 왼손은 힘도 약하고 손가락 수도 부족했다. 그래서 남들과는 반대로 오른손으로 줄을 잡고 왼손으로 초크를 들고 줄을 튕겼다. 얼추 따라 치긴 했지만 깊게 연습하진 못했다. 리코더, 단소에 이어서 기타 마저 반대로 운지해야 하다니. 역시 나에겐 캐스터네츠뿐인가?

키가 크면서 다리 길이에 차이가 생겼듯, 팔도 그랬다. 어느 순간부터 내 왼팔과 오른팔은 눈에 띄게 길이 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마치 소아마비가 한쪽 팔에 온 것처럼, 내 왼팔은 오른팔보다 훨씬 짧고 야위었다. 여름날 반팔을 입고 '차렷' 자세를 취하면 한눈에 티가 날 정도였다.

내 왼팔의 뼈는 놀라울 만큼 가늘다. 놀랍게도 내가 가르치는 초등학생들의 팔뚝보다도 얇다. 팔꿈치 위로는 양팔 간 큰 차이가 없지만, 팔꿈치 아래부터는 확연히 달라진다. 왼팔은 점점 가늘어져 나뭇가지처럼 말라붙고, 그 끝에는 손가락 세 개만이 붙어 있다. 이 모든 형상은 오랜 시간 서서히 만들어진 결과였다. 손가락을 쭉 펴고 양팔을 마주 대면, 그 차이는 더 명확해진다. 길이로 10센티미터가 족히 차이 난다. 손가락이 세 개뿐이다 보니 물건을 단단히 잡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지금 이렇게 타자를 잘 치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을 한다.


한 친구는 내 왼팔을 보고 '극세사' 같다고 표현했다. 그 친구는 통뼈였기에, 우리가 손목을 나란히 대보면 두께 차이가 두 배였다. 거리에서 걸을 때도 나는 항상 왼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닌다. 어른들 앞에서 한쪽 손만 주머니에 넣는 게 버르장머리 없어 보인다는 걸 알면서도, 주머니 밖으로 빼놓는 순간 누군가가 내 왼손을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 같아 노심초사했다. 가방이나 들 것이 있으면 항상 왼손으로 든다. 물건을 들고있으면 왼손이 가려져서 눈에 덜 띈다.


고등학교엔 매점이 없었다. 다만 층별로 간식 자판기가 있었다. 학생들이 자주 사먹던 것은 커피나 탄산음료, 그리고 프레첼 같은 과자류였다. 특히 잠을 깨기 위해 레쓰비를 자주 사서 마셨는데, 달달한 커피 맛이 자꾸 땡겼다. 결국 운동 부족으로 뱃살이 점점 나오기 시작했다. 또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구부정한 자세로 있으니 거북목은 덤이었다. 거북목, 툭 튀어나온 배, 거기다가 세 손가락까지. 내 외모는 점점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역작 ET와 닮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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