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실 밖에서 배운 것들
세마고 학생들은 참 대단했다. 겉으로 보면 평범한 일반고였지만, 알고 보면 특목고 입시를 한 번쯤 거쳐온 친구들이 절반 이상이었다. 과학고, 용인외고, 민사고 같은 전국 단위 특목고에서 고배를 마신 뒤, 이곳으로 돌아온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 이들답게 기본기가 단단했고, 무엇보다 절실했다. 집중력도 좋고, 이해력도 빨랐다. 내가 있던 1학년 1반에서도 네 명이 서울대에 붙었다. 같이 기숙사 생활을 했던 친구들도 서울대, 중앙대, 육군사관학교 등에 진학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놀라운 결과였다. 이렇게 똑똑한 아이들만 모아놓은 학교에서도 누군가는 1등을 하고, 누군가는 꼴등을 한다.
내가 소개할 친구는 세마고 문과 전교 1등이다. 그는 놀라운 성적 향상으로 더욱 돋보였다. 여기선 H라고 부르겠다. H는 첫 중간고사 때까지만 해도 조용하고 평범한 친구였다. 딱히 눈에 띄지 않았지만, 영어 점수만큼은 예외였다. 당시 이미 텝스 820점. 고1이 텝스에서 이런 점수를 받는다는 건, 말 그대로 ‘괴물’이었다. 영어 모의고사에서 한 문제도 틀리는 법이 없었다. 영어 실력이 워낙 탄탄하다 보니, 독해력 기반 과목인 국어도 잘했다. 다만 수학은 조금 약했다. 약하다고 해도 2등급이었고, 사실 그건 ‘아직 공부를 안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H가 고1 2학기부터 달라졌다. 어떤 계기가 있었는진 모르겠지만, 갑자기 미친 듯한 몰입으로 공부에 임하기 시작했다. 눈빛부터 달라졌고, 집중력은 주위를 압도했다. 그리고 곧 결과로 이어졌다. 반 1등에 전교 2등. 단기간에 비약적인 상승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성적을 빨리 올렸지?’라는 말이 반에서 돌기 시작했다. 이내 H는 학교 전체에서 ‘문과 전교 1등’이라는 타이틀을 놓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고3이 된 H는 제2외국어로 아랍어를 선택했는데, 9월 모의고사에서 50점 만점에 고작 2점을 받았다. 그야말로 찍은 것만 못한 점수였다. 보통 여기서 멘탈이 붕괴되기 마련이다. 그런데 H는 달랐다. 그 이후로 인강을 돌려보며 독학을 시작하더니, 수능에서 아랍어 48점, 1등급, 백분위 100이라는 믿기 힘든 결과를 만들어냈다. 단 2개월 남짓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이 친구와 짝이었던 적이 있다. 바로 옆에서 지켜본 H는 정말 달랐다. 개념 하나를 설명해주면, 다음날 그 개념을 확장해서 되물어오는 사람이었다. 흡수력, 응용력, 회전속도… 뭐 하나 빠지는 게 없었다.
‘아, 이래서 재능이라는 게 있구나.’
그때 처음으로 나는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안 되는 공부의 정점이 있다는 것을, 그걸 처음 인정하게 만든 친구가 바로 H였다. 결국 H는 수시로 서울대 경제학과에 합격했다. 수능에서도 국어 영역에서 한 문제만 틀린 괴물로 남았다. 난 그저 옆자리에서 그걸 지켜봤을 뿐이다.
세마고는 학생들만 대단했던 게 아니었다. 선생님들도 무척 열정적이었다. 젊고 실력 있는 선생님들이 많았고, 수업 하나하나에 공이 들어가 있었다. 수학 선생님들은 매 시간 새로운 풀이를 보여주며 놀라움을 줬고, 영어 선생님들은 영어 원서를 함께 읽는 수업이나 독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문해력을 키워주려 했다. 그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학교 전체에 학구적인 분위기가 스며들었다. 경쟁은 치열했지만, 그 경쟁 안에서 서로 배우고 자극을 주는 관계들이 많았다. 나는 그 안에서 흔들렸다. 때로는 질투했고, 때로는 포기했고, 또 어떤 날엔 ‘나도 한번 해볼까’라는 마음을 품었다. 그게 고등학교 시절의 나였다.
학생 시절,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순간은 대개 교실 밖에서 만들어진다. 체험학습이든, 수련회나 수학여행이든, 교과서 밖의 하루는 특별한 추억으로 남는다. 특히 수련회는 ‘수련’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군대식의 규율과 일정으로 이루어져 있다. 교관은 으레 강당에 선 우리를 바라보며 외친다. "놀러 왔습니까!"라는 말로 고강도 일정이 예고된다. 솔직히 말하면 수련회는 놀러간 것인지 기합 받으러 간 것은 아니다.
첫 순서는 소지품 검사다. 담배나 술처럼 금지 물품이 발견되면, 그 즉시 얼차려가 주어진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얼차려를 피할 수 있었다. 아마도 담임선생님과 어머니 사이에 사전 통화가 있었던 것 같다. 물론 내 몸이 성치 않지만 남 보여주기 부끄러운 장애일 뿐, 그깟 수련회 훈련도 못할 몸은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나 말고도 몇몇 컨디션이 좋지 않은 여학생들도 열외 대상이었다. 물론, 몸을 아끼라는 배려였겠지만 기분이 마냥 좋지는 않았다. 저 정도의 오리걸음쯤은 나도 할 수 있는데, 힘들게 기마자세를 하고 있는 친구들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도 생겼다.
수련회의 밤은 언제나 갑작스레 진지해졌다. 낮에는 땀을 뻘뻘 흘리며 뛰던 아이들도, 밤이 되면 손에 촛불을 하나씩 들고 조용히 앉는다. 교관이 앞에 서서 말없이 분위기를 잡는다. 그리고 어김없이 시작된다. 부모님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 한평생 자식만 바라보고 살아온 어머니의 희생, 아무 말 없이 등을 밀어주던 아버지의 침묵 같은 것들. 그런 이야기들이 하나둘씩 흘러나오면, 처음엔 킥킥거리던 아이들도 점점 조용해진다. 적막한 분위기, 손에 쥔 촛불의 흔들림, 친구들과의 어깨동무. 그 공기는 이상할 만큼 무겁고 따뜻했다. 누군가 훌쩍이기 시작하면, 이상하게도 그 감정이 금세 전염된다. 그렇게 울음은 한 줄기 눈물처럼 번져간다. 나도 처음엔 어리둥절했다. 뭘 이 정도 가지고 울지 싶은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나도 눈가가 뜨거워졌다. 촛불을 내려다보며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눈물이 나올 만큼 슬펐던 것도, 감동받았던 것도 아닌데, 그냥 그 자리에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눈시울이 붉어졌다. 분위기라는 건 참 이상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날의 내 눈물도, 그 힘에 휩쓸린 작은 파편이었을 것이다.
중학교 시절의 수학여행은 그야말로 우정여행이었다. 역사탐방이니 문화체험이니 하는 명분이 있었지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건 ‘누구랑 같은 방을 쓰느냐’였다. 친한 친구들과 같은 방을 쓰게 되면, 이미 여행은 반쯤 성공한 셈이었다. 마음 맞는 친구들과 하루 종일 수다를 떨고 장난을 치며 웃고 떠드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특히 남학생들에게 ‘베개싸움’을 빼 놓을 수는 없다. 처음엔 웃으며 던지던 베개에 점점 힘이 들어가고, 어느 순간에는 진짜 주먹다짐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싸우다가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도 있었고, 말리는 친구의 안경이 부러지는 일도 종종 있었다. 그래도 아침이면 다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함께 아침밥을 먹었다. 중학생다운 우정이었다.
나는 여행 첫날에는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편이었다. 설렘도 있었지만, 낯선 공간에서는 몸이 쉽게 긴장되었다. 옆자리에서 코를 골며 단잠에 빠진 친구가 부러울 때가 많았다. 밤에는 자는 친구 얼굴에 치약을 짜놓거나, 침을 질질 흘리며 자는 얼굴을 몰래 찍는 아이들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유치하고 무례한 장난들이지만, 그 시절엔 그런 것들도 친구 사이의 유대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몰래 벌이는 진실게임도 빠질 수 없었다. 선생님의 눈을 피해 남녀가 조심스럽게 한 방에 모였다. 진실게임에서 지면 어김없이 ‘요즘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냐’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얼굴이 붉어지는 누군가는 결국 짝사랑 이야기를 꺼내며, 조용히 웃었다. 그 시절의 수학여행은 우리 안에 있던 감정의 진폭을 최대치로 흔들어주는 특별한 시간이기도 했다. 낯선 곳에서 친구와 함께 밤을 보내고, 웃고, 놀고, 또 싸웠다가 다시 웃는 그 경험들이, 어쩌면 성장이라는 이름의 사춘기를 가장 가까이서 비추는 장면이었는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수학여행 대신 국토대장정이라는 이름의 도보 순례에 참여했다. 첫날, 한계령 아래 백담사에서 출정식을 치른 후 통일전망대, 관동팔경, 남양주 다산유적지 등을 걸어 지났다. 3일째 되는 날에는 수원 시청 광장을 거쳐 세마고 운동장에서 해단식을 했다. 누군가는 교육공동체의 화합이라 했고, 누군가는 “자신에게 충실할 때 타인에게 베풀 수 있다”는 말로 우리의 여정을 격려했다. 그 여정은 말 그대로 ‘대장정’이었다. 중도에 다리가 풀려 버스를 타는 친구들도 있었다. 나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예전 수련회 때 몸에 장애가 있다는 이유로 열외를 당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나도 저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왜 나만 빠져야 했을까. 그때의 아쉬움이 나를 포기하지 않고 걷게 만들었다. 그렇게 버텼고, 결국 오른쪽 발바닥엔 커다란 티눈이 박혔다. 순례를 마친 뒤 동네 피부과에서 티눈을 절개하자, 수액 같은 액체가 왈칵 쏟아졌다. 칼끝의 감촉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 힘으로 완주한 국토대장정이 특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2학년이 되었을 때, 우리는 드디어 제주도로 수학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3이 되면 수능 준비로 바쁘기에, 이번이 마지막 여행이라는 생각에 들뜬 학생들이 많았다. 그런데 수학여행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오전 10시 무렵 우리는 TV 속보 한 편을 접하게 되었다. 단원고등학교 2학년 학생들이 제주도로 가던 도중, 그들이 탄 배가 침몰했다는 것이다.
세월호. 그 이름은 처음엔 낯설었지만, 곧 우리 모두의 뇌리에 영원히 박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뜨며 안도했다. 반 친구들 사이에서는 “휴, 다행이다.”라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 안도감은 얼마 가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며 분위기는 급변했다. 구조 소식은 오보였고, 다수의 학생들이 배에 갇힌 채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교실 곳곳에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여학생 몇몇은 책상에 엎드려 울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우리는 무언가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서서히 깨달았다. 뉴스는 연일 끔찍한 장면을 쏟아냈다. 학생들의 시신을 인양하려다 숨진 잠수부들, 그리고 참사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 단원고 교감 선생님의 이야기까지. 열여덟의 나이에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채 수장된 수많은 생명들. 물론 우리의 수학여행도 취소되었다. 누구 하나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제주도에 간다며 떠들던 목소리는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체험학습은 늘 특별한 추억으로 남지만, 그해의 수학여행은 가지 않아도 잊을 수 없는 비극으로 남았다. 누군가는 여행을, 누군가는 생을 마감했던 그날. 우리는 어른이 되는 문턱 앞에서 너무 일찍 현실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