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열했고, 유쾌했던 열일곱
4월 말에 세마고등학교에서의 첫 중간고사가 시작됐다. 한국사 시험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문제를 다 풀고 나서 100점을 확신했다. 한 문제도 막히는 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점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다른 과목 답안으로 채점했나 싶을 정도로 마구 틀렸다. 결과는 82.5점. 틀린 문제들을 다시 살펴봐도 왜 틀렸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용을 아는데도 틀릴 만큼 문제가 꼬여 있었다. 그런데 그런 시험에서도 100점을 받은 친구가 있었다. 나는 조용히, 무표정하게 점수를 받아들였다.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진짜 공부 잘하는 애는 따로 있구나.’
그렇게 첫 중간고사가 끝났다. 주변 친구들과 점수를 비교해 보면 나름 선방한 편이었다. 국영수 주요 과목에만 집중했던 다른 친구들과 달리 난 암기과목 공부도 틈틈이 챙겨 고른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반 몇 등일까? 전교 몇 등일까? 궁금한 나날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3주 후 성적표가 나왔다. 무려 반 3등이었다. 그런데 전교 등수가 이상했다. 반 3등이면 열 개 반 기준 전교 20~30등은 되어야 할 것 같은데, 내 전교 등수는 39등이었다. 우리 반이 남자반이라 내신에 약했기 때문일까? 그렇다고 공부를 못 하는 반은 아니었다. 나중에 의대나 서울대에 진학한 친구들이 제법 많았으니까 말이다.
전교 39등이 아쉬운 이유는 또 있었다. 당시 고등학교는 의무 야자였다. 밤 10시까지 야간자율학습을 해야 했고, 각 반에서 야자가 진행됐다. 하지만 전교 20등 이내의 학생들은 '정독실'이라는 별도 공간에서 특별히 관리되며 공부할 수 있었다. 나는 정독실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그 조건을 충족하지 못했다. 반 2등에게까지만 정독실 기회가 있었고, 그게 참 부러웠다.
세마고등학교에는 ‘다겸관’이라는 이름의 기숙사가 있었다. 나는 고등학교 1학년 내내 이곳에서 기숙사 생활을 했다. 수련회나 수학여행처럼 하루 이틀 잠깐 떨어지는 게 아니라, 가족과 아예 떨어져서 사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족이 그리워져 괜히 우울해지기도 했지만, 새로운 생활은 감회가 남달랐다.
기숙사 1층에는 무서운 사감 선생님들의 관리실이 있었다. 2층은 여자 기숙사, 3층은 남자 기숙사였다. 사감 선생님은 한 분을 제외하고 전부 남자 선생님들이었다. 그들은 매서운 눈빛으로 우리를 감시하며 기강을 잡았다. 취침 시간이 되면 사감들은 각 방을 순찰했다. 친구와 속삭이다 걸리기라도 하면 곧바로 벌점을 부여받고 기합을 받았다. 기합이라 해봐야 가벼운 꾸중과 주의 정도였지만 사감들의 카리스마는 무시무시했다. 특히 취침 시간 점호는 마치 군대 훈련소를 방불케 했다. 각 방마다 사감들이 돌아다니며 점호를 진행했는데 우리는 일렬로 도열한 채 바른 자세로 앉아 있어야 했다. 장난 한번 칠 엄두도 나지 않는 분위기였다.
기숙사 방은 4인 1실 구조였고, 우리 방은 전부 1학년 1반 남학생들이었다. 하루 이틀만 자는 것도 아니고, 한 학기 내내 이 녀석들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긴장됐다. 기숙사 생활은 규율이 엄격했다. 아침 7시면 기상, 이후 간식실에 모여 기상 체조를 했다. 체조를 마치고 씻은 뒤엔 학교 급식실로 가 아침을 먹었다. 메뉴는 간단한 편이었지만, 그마저도 거르는 친구들이 꽤 많았다. 식사 후엔 가방을 챙겨 바로 학교로 향했다. 솔직히 말하면, 가족을 못 본다는 단점을 제외하곤 꽤 효율적인 생활이었다. 학교가 가까우니 등교 스트레스가 없었고, 시간도 많이 절약됐다. 8시쯤 학교에 도착하면 그때부터는 아침 자율학습 시간이 주어졌다. 나는 그 틈에 부족한 잠을 메웠다. 책상에 엎드려 자는 게 내 일상이었고, 8시 50분쯤 학생자치회에서 틀어주는 뮤직비디오 소리로 눈을 떴다. 하루는 걸그룹, 다음 날은 보이그룹 뮤직비디오가 번갈아 재생됐다. 나는 걸스데이가 부르는 ‘썸씽’ 노랫소리에 그제야 잠에서 깨 1교시 수업을 준비하곤 했다.
고등학교 수업은 7교시까지 이어졌다.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나면 곧바로 수준별 국영수 보충수업이 이어졌고, 보충수업까지 끝난 후에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저녁을 먹고 나면, 마침내 야간자율학습, 일명 ‘야자’ 시간이 시작된다. 야자는 80분씩 두 타임. 이 시간만큼은 학교 전체가 숨을 죽인 듯 조용했고, 교실 안 집중력은 대단했다. 졸음이 몰려오면 조용히 뒤에 나가 서서 공부를 이어가는 학생도 많았다. 누군가 자는 모습을 보기는 어려웠다. 누구보다 치열하게 공부하는 열 일곱이었다.
밤 9시 50분이 되서야 야자가 끝났다. 셔틀버스를 타고 귀가하는 학생들은 분주히 짐을 싸고 교문을 나섰다. 기숙사생들은 느긋하게 가방을 둘러메고 기숙사로 향했다. 기숙사 내 간식실에 도착하면, 집에서 바리바리 싸온 빵과 과자들이 냉장고에서 우리들을 기다렸다. 누군가는 라면을 불려 먹었고, 누군가는 초코파이를 천천히 음미했다. 이 짧은 간식 시간이 하루 중 가장 웃음이 많은 순간이었다. 하지만 곧 점호 시간. 사감이 학생들을 호명하며 인원 파악을 마치면 취침할 학생은 방으로 돌아갔고, 더 공부하고 싶은 학생들은 11시까지 자율적으로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학생들은 11시까지 남았다. 힘들어도, 다들 묵묵히 그 자리를 버텼다.
기숙사 내 독서실 분위기는 숨소리조차 낼 수 없을만큼 팽팽했다. 좌우 양옆에 앉은 2학년 선배들의 포스에 눌려, 1학년인 나는 꼼짝없이 조용히 있어야 했다. 바스락 소리조차 낼 수 없었고, 다리 떠는 건 진작 포기했다. 어느 날은 화이트(수정액)가 필요해졌다. 하지만 바로 옆자리 선배에게 말을 거는 게 망설여졌다. 잔뜩 힘이 들어간 표정으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배님... 저 화이트 한 번만 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세마고 생활이 공부만으로 가득 찬 건 아니었다. 매주 주말이면 본가로 돌아갈 수 있었다. 금요일 저녁, 짐을 챙겨 곧장 집으로 향하는 학생들도 있었지만, 나는 토요일 점심까지 기숙사에 남아있곤 했다. 왜냐하면 매주 토요일마다 기숙사생들을 위한 명사 특강이 열렸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인물 중엔 축구 해설가 박문성 위원, 그리고 전설적인 투수였던 박철순 선수가 있다.
특히, 축구를 좋아했던 나에게는 박문성 위원의 강연이 인상 깊었다. 정작 강연 내용은 가물가물하지만, TV에서만 보던 인물이 눈앞에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했고, 묘하게 들뜨는 기분이 들었다. 명사 특강이 끝나면 그제야 짐을 싸서 수원 본가로 향했다. 운 좋게도 오산에 있는 우리 학교에서 우리 집 앞까지 한 번에 가는 버스가 있었다. 배차는 뜸했지만 나는 그 느릿한 리듬이 오히려 좋았다. 토요일 오후의 따스한 햇살 아래, 버스 정류장에서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기다리던 그 순간들이 선명하다. 버스에 몸을 실으면 40분 남짓—그 시간만큼은 온전히 내 것이었다. 아무도 나를 닦달하지 않고, 문제집도 펼칠 필요 없고, 누구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작은 자유.
집에서 보내는 하루는 늘 짧았다. 일요일 저녁이면 다시 기숙사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편안한 일요일 저녁은 고1 내내 없었다. 기숙사 입실 시간을 맞춰야 했다. 일주일치 짐을 바리바리 챙기고 저녁밥도 허겁지겁 먹은 후 아버지 차에 실려 학교로 향했다. 다시 시작되는 일주일. 일요일 저녁, 기숙사로 향하는 길에는 늘 이유 모를 멜랑콜리가 함께했다. 창밖 풍경은 그대로인데, 내 마음은 어딘가 늘 무거웠다. 기숙사에 도착하면, 여느 때처럼 11시까지 자습을 시작한다. 그렇게 또 한 주가 시작되었다.
모의고사나 내신 시험 기간이 끝나고 나면, 기숙사의 공기에도 묘한 풀림이 감돌았다. 다들 말은 안 해도, 무언의 약속처럼 컴퓨터실에 모였다. 그곳에서 다 함께 '롤'을 했다. 누가 가장 잘했느냐를 두고 한밤중까지 싸우기도 하고, 패배의 분을 못 이겨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다 사감 선생님께 걸려 크게 혼났다. 급기야 게임하는 모습이 사진으로 찍혀 부모님께 전송됐다. 돌이켜보면, 그 모든 치열함이 있었기에 더 유쾌했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