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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점짜리 모범생

by 김건우

중학교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나이가 지긋한 국어 선생님이셨다. 고요한 목소리와 단정한 손짓, 문학작품을 대하는 태도 속엔 오랜 세월 교단에 서온 분의 품위가 묻어났다. 선생님은 나에게 유독 많은 기대를 거셨던 것 같다.

한 번은 국어 시험에서 90점을 맞은 적이 있었다. 시험 자체가 어렵지 않았고, 반에는 100점을 받은 아이들도 여럿 있었다. 선생님은 성적표를 보시더니,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건우야, 너라면 100점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왜 이렇게 대충 봤니?”

그 말이 괜히 마음에 남았다. 문학 수업 시간엔 시 감상을 자주 했다. 선생님은 억지 해석을 요구하지 않았다. 시를 여러 번 낭독하신 뒤, “어떤 기분이 드니?” 하고 조용히 물으셨다. 학생 한 명 한 명의 말에 귀를 기울이시며, “그럴 수도 있겠다.”고 말해주셨다.

시란 감각으로 읽는 거란 걸, 나는 그 수업을 통해 처음 배웠다. 그래서일까. 지금 내 교실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를 만들고 싶다. 억지 해석이 아닌 감상과 몰입, 성적을 위한 국어가 아니라 마음을 움직이는 국어. 아이들이 시를 소리 내어 읽고 싶어지는 그런 시간. 국어 시간 속에, 내가 받았던 그 따뜻한 영향력이 흐르고 있기를 바란다.


이 무렵, 우리 반에 이상한 공부 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누가 시작했는지는 몰라도, 어느샌가 반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하나둘씩 학원을 다니고, 쉬는 시간에도 문제집을 펼치는 아이들이 생겼다. 급기야 한 남학생은 공부에 전념하겠다며 머리를 아예 빡빡 밀고 등교했다. 지금도 그 반질반질한 두피가 생생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공부에 소질이 없었다. 누구보다 시간을 많이 들였지만, 방향이 어긋나 있었다. 엉뚱한 문제에 매달리고, 잘못된 방식으로 암기하다 보니 성적은 좀처럼 오르지 않았다. 그 친구를 통해, 노력과 성과가 항상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반면, 눈에 띄게 성적이 오른 친구들도 있었다. 형이 의대에 다닌다는 S군, 그리고 나와 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한 Y군. 둘 다 원래는 중상위권으로 알려졌지만, 마음을 다잡고 공부를 시작하자 Y군은 전교 2등, S군은 9등으로 올랐다. 그 변화는 곧 반 분위기 전체를 바꿔놓았다. 경쟁이라기보다는 자극에 가까운 기운이었다.

'저 친구도 해냈는데, 나도 좀 더 해볼까?'

그 긍정적인 압력이 내게도 전달됐다. 그 무렵 나는 처음으로 깨달았다. 공부는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같이 만들어가는 흐름’ 속에서 더 잘할 수 있다는 것을. 반 분위기가 학생을 바꾼다는 말을 그때처럼 실감한 적은 없었다.

그러던 중, 기말고사 음악 시험에서 무려 59점을 받아버렸다. 그때까지도 나는 장조와 단조, 음계 같은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였고, 말 그대로 '음포자'였다. ‘설마 시험에 많이 나오겠어?’ 하는 마음으로 음계만 대충 외우고 나머지는 건너뛰었다. 그런데 막상 시험 문제의 절반 이상이 내가 건너뛴 개념에서 나왔다.

채점을 마친 뒤, 생전 처음 보는 점수에 책상에 얼굴을 묻고 눈시울을 붉혔다. 결국 음악 점수가 전체 평균을 끌어내려 전교 12등이 되었다. 재수 없게 들릴지 몰라도, 나에겐 받아들이기 힘든 등수였다. 엄마에게는 전교 10등이라고 살짝 둘러댔다. 물론, 우리 엄마는 내가 거짓말을 할 때마다 기막히게 알아챈다. 성적표를 확인한 엄마에게 들통났고, 그날 집 안엔 울음소리와 호통이 동시에 울려 퍼졌다. 지금 돌아보면 시험 한 과목쯤 못 본다고 인생이 흔들리는 건 아니었다. 설령 빵점을 맞았더라도 괜찮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몰랐다. 모범생이라는 자아가, 그렇게 작은 실패 하나에도 무너질 줄은. 그땐, 공부가 인생의 전부라고 믿고 있었다.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은 일본어를 가르치던 분이었다. 별명은 ‘또치 선생님’. 만화 속 캐릭터처럼 생긴 외모 덕분에 붙여진 별명이었지만, 그만큼 친근하고 정감 넘치는 분이셨다.

일본어 수업은 정말 재미있었다. 평소 공부에 전혀 흥미가 없던 아이들조차 이 수업만큼은 눈을 반짝이며 들었다. 선생님은 수업 참여가 좋은 학생들에게 일본 사탕 ‘오찌찌’를 나눠주셨다. 우유 맛이 나는 그 사탕 하나에 아이들은 열광했고, 수업 분위기도 자연스레 살아났다.

그 시절의 기억을 간직한 나는 아이들에게 츄파춥스를 자주 나눠준다. 사람은 결국 먹을 것으로 움직인다는 진리를 그때 알았다. 그해, 나는 처음으로 중학교 전교 1등을 차지했다. 1~2학년 내내 3등에서 10등 사이를 오가며 늘 만족하지 못했던 나는, 3학년 1학기 중간고사에서 총 9과목 중 두 문제만 틀렸다. 기말고사도 우수한 성적으로 마무리하면서, 결국 1학기 평균 전교 1등에 올랐다. 담임이셨던 또치 선생님은 정말 놀라셨다.

"건우가? 설마 그 똥꼬발랄한 건우가 전교 1등이라고?"

평소 수업 시간에 까불던 모습 때문이었을까. 선생님은 나와 동명이인인 다른 학생이 있는 줄 아셨다고 했다. 전교 1등이라고 하면 까칠한 성격에 공부 잘하는 애들이랑만 어울리는 줄 아셨다는데, 내가 친하게 지낸 친구들이 하위권인 것도 한몫했다.

선생님은 우리 반에서 전교 1등이 나왔다며 내 이름을 호명하셨다. 친구들은 전교 1등을 축하한다며 환호를 보냈다. 나는 그 말이 참 기뻤다. 돌이켜 보면, 나는 타인들의 ‘인정’을 갈망했던 것 같다. 내가 똑똑하다는 것, 노력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남들이 알아봐주길 바랐다. 그래서 수행평가 하나까지도 허투루 넘기지 않았고, 시험 전날이면 늘 초조했다. 그 노력의 대가는 성적으로 돌아왔지만, 마음과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그 무렵부터 이상한 증상이 생겼다. 밤에 잠이 들면 갑자기 심장이 미친 듯이 뛰다가, 귀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리며 심장이 멎을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네 내과에서 이상이 있는 것 같다는 소견을 들었다. 아주대병원에 가서 24시간 심전도 검사를 받았다. 일주일 동안 기계를 달고 지낸 끝에, 다행히 큰 이상은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 하지만 그 증상은 이후로도 2년 가까이 간헐적으로 계속됐다. 죽을 만큼 공부한 건 아니었다. 그저 성적에 대한 걱정, 끝없는 수행평가, 자기관리. 그 모든 것들이 어린 나의 마음을 조용히 짓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내신 성적표 뒤엔, 파르르 떨고 있던 내 심장이 숨어 있었다.


만약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날도 밤을 새워 공부하고 있는 중학생 김건우에게 덕담 한마디를 해주고 싶다. 쉬엄쉬엄하라고. 중학교 내신 쓸 데 없다고. 진짜는 고등학교부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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