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에 들어서면 아이들은 본격적인 사춘기를 맞는다. ‘중2병’에 대한 설명은 진부하니 생략하겠다. 남학생들 사이에서는 ‘주먹 서열’이 중요하다. 눈빛 몇 번이면 강자와 약자가 감지된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게 최선이지만, 서열이 애매하거나 감정이 격해지면 피를 보는 수밖에 없다.
중학교 시절, 기억에 강하게 남은 맞짱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당시 우리 학교는 수학과 영어를 우열반으로 운영해서, 과목마다 교실을 옮겨 다녀야 했다. 그날도 수학 수업을 마치고 본래 반으로 돌아온 순간, 일이 터졌다. 같은 반 친구 O의 책상이 낙서로 엉망이 돼 있었던 것이다.
평소엔 푸근한 성격이던 O였지만, 그날은 달랐다. 그는 누가 자기 자리에 앉았는지 일일이 확인하고 다녔다. 범인은 옆반의 J였다. J는 1학기 말에 전학을 왔지만, 거친 외모와 카리스마로 금세 1학년 ‘3짱’으로 불렸다. 키는 작지만 단단한 주먹을 가진 녀석이었다. 반면 O는 싸움을 자주 하지는 않지만 덩치만큼은 어지간한 어른 뺨쳤다.
쉬는 시간, O는 J에게 다가가 왜 낙서를 했냐고 따졌다. 낙서를 직접 지우라고 덧붙였다. 만약 J가 웃으며 사과했더라면 좋았겠지만, 그는 자존심을 택했다.
그는 입에 핏대를 세우며 이렇게 말했다.
“싫은데, 씨발새꺄?"
O의 눈빛에도 불이 붙는다.
J는 한 술 더 떠 도발한다.
”꼬우면 함 뜨던가.“
이쯤되면 서로 물러설 수 없다. 결국 방과후 결투가 성사되었다. 장소는 학교 뒤편 아파트 단지의 놀이터였다. J가 얼마나 잘 치는지 궁금해서 나도 쫄래쫄래 따라갔다. 놀이터는 이미 구경꾼들로 북적였다. 긴장되는 순간. 두 사람은 말다툼으로 감정을 끌어올린 후, 본격적으로 주먹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J는 확실히 싸움꾼이었다. 주먹이 매서웠고, 금세 O의 코에서 피가 흘렀다. 하지만 O도 버티는 힘은 강했다. 맞으면서도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J를 눕히듯 끌어안고 땅에 넘어뜨렸다. 체급 차이 탓에 J는 몇 번이고 깔렸다가 간신히 빠져나왔다.
몇 분 뒤, 서로 숨이 턱까지 차오른 둘은 결국 싸움을 멈췄다. 명백한 승자는 없었고, 구경꾼들만 신났을 뿐이다.
다음날 O는 결석했고, J는 자신의 승리라고 떠들어 댔다. 그런데 며칠 후, 코에 부목을 댄 O가 학교에 나타났다. 붕대를 풀자 오똑했던 코는 시퍼렇게 멍든 돼지코가 되어 있었다. O의 코뼈가 부러졌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J한테 치료비 청구할 거야.“
O는 가방에서 의료비 청구서를 꺼냈다. 그걸 들고 J를 찾아가자, 그의 표정이 싹 바뀌었다. 그렇게 의기양양하던 J는 돈 얘기가 나오자 순한 양처럼 작아졌다.
”이거 우리 아부지 알면 나 진짜 죽어... 한 번만 봐주라.“ 라며 울먹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이래서 객기는 함부로 부리는 게 아니다. 그래도 중학생 아니면 언제 그런 객기를 부려보겠는가?
그 시절, 중학생 사이에서 유행하던 허세는 지금 보면 참 기이하다. 초등학생 때부터 담배를 피웠다는 얘기를 자랑처럼 늘어놓거나, 잘나가는 고등학생 형들과 오토바이를 탔다며 으스대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땐 그런 이야기가 멋져 보였다. 지금 보면 철없는 허세일 뿐이다.
지금도 아침 출근길, 등교 중인 중학생들과 마주칠 때가 있다. 욕 없이 이어지는 대화를 듣기 어렵다. 거칠고 조악한 말투에 놀랄 때도 있지만, 나도 그 시절엔 비슷했으니 이해는 간다. 그런 아이들과 부대끼며 하루하루 살아가는 전국의 중학교 선생님들에게는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고 싶다. 정말 대단한 일이다.
중학교에서도 나는 영재반에 들어갔다. 매주 방과후 과학실에 모여 실험을 했다. 같은 학교 친구들과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과학 캠프에 갔던 기억도 선명하다. 영재반 선생님과 함께 농촌진흥청을 방문했다. 트럭을 타고 비포장도로를 덜컹거리며 달렸다. 생태박물관에서 다양한 박제 곤충들을 구경했다.
밤에는 낯선 환경 탓에 쉽게 잠들지 못했다. 그렇게 뒤척이던 도중 옆에서 남자애 둘이 낄낄대기 시작했다. 무슨 재미난 얘기라도 하는 건가 싶었는데, 갑자기 웬 여성의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들은 PMP에 다운받은 야동을 보고 있었다. 당시 나는 성에 눈을 뜨기는커녕 또래보다 체격도 작았다. 그 신음소리는 내게 마치 공포영화의 배경음처럼 들렸다. 나는 오들오들 떨며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다. 그 녀석들은 지금쯤 뭘 하며 살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 무렵 나는 늘 왼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다녔다. 중학교 수업은 대부분 강의식이라 손가락 개수를 들킬 일은 없었다. 내 비밀을 알게 된 친구들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왼손을 몰래 확인하려는 곁눈질은 피할 수 없었다.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지, 슬쩍슬쩍 보는 건 다 티 나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