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세대 국문과, 작년엔 입결이 뚝 떨어졌던 학과. 올해도 그럴 거라고 희망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나처럼 생각한 수험생들이 몰리면서 국문과는 그해 정상적인 입결로 회복됐다. 예비 8번이었지만, 단 한 명도 빠지지 않았다. 그해 연세대 국문과의 최종 입결은 백분위 0.8%로 마감되었다.
반면 가군에 썼던 경희대 회계세무학과는 무난하게 최초합을 받았다. 다군에 썼던 중앙대 경영학과도 최종 합격했다. 중앙대 경영경제대학은 2학년 때 세부 전공을 선택할 수 있었고, 전공으로 경제금융학부를 선택하면 사실상 전액 장학생이 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하지만 나는 입학금부터 바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었던 경희대를 선택했다.
대학 등록 후 집으로 경희대에서 보낸 선물 꾸러미와 오리엔테이션 안내장이 도착했다. 평소 내성적인 성격 탓에 가기 망설였지만, 어머니가 등 떠밀 듯 OT비를 입금해주셨다. 첫 MT 날, 처음 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 어색했다. 조용히 점심을 먹은 후 숙소에 도착했다.
저녁부터 술파티가 시작된다. 처음 본 사람들끼리 친해질 땐 술게임만한 것이 없다. 신입생들 사이에 섞인 x맨 선배들이 술게임을 가르쳐주며 분위기를 주도한다. 양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술게임에 참여할 수 있다. 007빵, 바니바니 같은 게임들이 그렇다. 하지만 나는 내 왼손을 이 낯선 사람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ot까지 와서 방 안에 혼자 박혀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게임에 소극적으로 참여했고, 자주 지면서 벌주를 마셨다. 소주 여섯 잔쯤 마셨을까. 얼굴이 빨개지고 세상이 빙빙 돌았다. 선배들이 걱정하며 일찍 들어가서 쉬라고 했다. 그제서야 난 어색하게 자리를 떠 숙소 방안에 누울 수 있었다. 선배들 중 몇몇은 내 왼손을 눈치챘지만, 모른 척해주었다. 이렇게 나의 첫 대학 체험은 썩 유쾌한 추억이 아니다. 그 시간에 차라리 집에서 포근한 이불을 뒤집어 쓰고 영화나 한 편 보았더라면, 더 기억에 남았을지도 모르겠다.
경희대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수원 본가에서 경희대 서울 캠퍼스까지의 거리는 상당했다. 교내 행복기숙사에 들어가려 했지만, 지방 거주자에게 우선권이 있어 경기도 거주자인 나는 들어갈 수 없었다. 학교 주변에서 자취하려니 고시원조차 한 달에 30만 원 가까이 했고, 그 돈을 감수할 마음도 없었다. 결국 통학을 택했다. 여러 루트를 시도했는데, 가장 나은 방법은 바로 '설국열차'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경희대는 수원에 국제캠퍼스를 두고 있었고, 국제 캠퍼스와 서울캠퍼스를 오가는 셔틀버스가 있었다. 이 버스를 학생들은 '설국열차'라고 불렀다. 먼저 집에서 국제캠퍼스까지 버스로 40분 정도 걸린다. 그 후 설국열차를 타고 서울캠퍼스까지 가는데 1시간 10분이 걸린다. 가장 빨리 가는 방법도 왕복 4시간 가까이 되었다. 멀어도 너무 멀었다. 통학 시간에 핸드폰으로 게임을 하거나 넷플릭스로 영화를 보는 것도 금방 지쳤다. 체력적으로 부담이 되었다. 과 행사도 불참이 잦아졌다.
그러다보니 학교에 애정이 붙지 않았다. 알코올도 싫었다. 내성적인 나는 인싸처럼 선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거나 본관놀이-벚꽃 피는 봄날 교내에서 노는 것-에 흥미가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그저 집에 가고 싶었다. 점차 대학을 혼자 다니게 되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친구가 많았는데, 대학교에선 완전한 아싸가 되어버렸다.
학생증을 만들기 위해 청운관 1층 하나은행 앞에 줄을 서 있던 날, 한 선배가 말을 걸었다. 같은 경영대학의 경영학과 선배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밥을 사주겠다며 약속을 잡았고, 나는 학식을 얻어먹으러 따라갔다. 그런데 밥을 먹는 도중 선배가 이상한 교회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한참 교리에 대해 설명하더니, 축구 동아리도 있다며 내 신발 사이즈를 물어봤다. 신발까지 공짜로 맞춰주겠다는 말에 부담을 느꼈고, 신천지임을 직감한 나는 얼른 자리를 피했고 연락도 차단했다.
수업에도 흥미가 없었다. 회계학, 통계학 등의 수업은 교수의 설명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다른 동기들은 적극적으로 질문하며 수업에 임했지만 경영학 공부에 흥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교양 글쓰기와 비즈니스 영어 같은 과목은 재밌게 들었다.
그렇게 무미건조한 대학 생활을 이어갈 무렵, 나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떠올렸다. 경희대 4년 전액 장학금을 유지하려면 평균 학점 3.5 이상, 즉 올 B+ 이상을 받아야 했다. 이 상태로는 장학금도 끊길 것이고, 그렇다면 이 학교에 다닐 이유도 사라진다. 비싼 사립대학 등록금을 내야 한다면 처음부터 서울시립대를 갔어야 했다.
문득 내 머릿속엔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수능을 한 번 더 보면 어떨까? 경희대를 걸어두고 반수로 수능에 도전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문송합니다(문과라서 죄송합니다)' 같은 말들이 떠돌며 취업에 대한 불안도 컸다. 문과생이 도전할 수 있는 메디컬 계열인 한의대를 목표로 다시 공부하자고 마음먹었다. 운 좋게 수능 대박이 나서 경희대 한의대로 재입학하는 상상도 했다.
나는 점점 경희대생이 아닌 반수생의 삶으로 기울고 있었다. 수업은 일주일에 절반 이상 빼먹기 일쑤였고, 도서관에 가서는 수업자료가 아니라 수능특강을 풀기 시작했다. 그리고 기말고사도 응시하지 않았다. 다 빠진 건 아니었다. 그나마 흥미가 있었던 글쓰기랑 비즈니스 영어, 딱 이 두 과목만 기말시험을 쳤다. 나중에 1학기 학점을 확인했을 때, 결과는 가관이었다. 시험을 본 교양 과목은 B+가 나왔지만, 나머지 경영학 전공 과목들은 죄다 F였다. 그렇게 만들어진 내 첫 대학 성적표는, 총합 평점 1점대를 찍어 버렸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부분이 눈에 띄었다. 바로 통계학 과목이었다. 기말고사를 아예 치지 않았는데, 그 과목의 학점이 F가 아니라 D+였다. 교수님이 어떤 마음으로 그런 학점을 줬는지는 모르겠다. F는 재수강을 통해 학점을 복구할 수라도 있는데, D+는 재수강조차 안 되는 학점이다. 아마도 기말시험을 거른 학생에게 보내는 교수님의 복수였을지도 모르겠다.
부모님께 이 사실을 말하자 아버지는 크게 화를 내셨다. 어머니는 반수를 은근히 찬성하는 눈치였지만, 아버지는 내가 회계세무 전공으로 커리어를 쌓아 회계사나 세무서 공무원이 되길 원하셨다. 그런데 갑자기 휴학하고 수능을 다시 보겠다고 하니 분노하신 것이다. 갈등이 점점 깊어지고 가정에 불화가 찾아왔다. 그래도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했던가. 결국 나는 경희대에 2학기 휴학을 걸어놓고, 반수를 위한 학원을 알아보며 두 번째이자 마지막 수능을 준비하게 되었다.
이 무렵, 우리 집으로 우편 한 통이 도착했다. 바로 병역판정검사, 일명 신체검사 통지서였다. 4급 지체장애인으로 등록돼 있는 나는 당연히 병역면제일 거라고만 생각하고 있었지만, 막상 신검 통지서를 받아드니 묘하게 긴장이 되었다. 징병제를 시행하는 나라에서 태어난 남자라면 누구나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