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킬 수 없는 반수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반수를 위한 여러 학원을 알아봤다. 수원스카이에듀학원에서 마침 반수생을 모집하고 있었고, 나는 작년 수능 성적으로 학원비를 전액 면제 받았다. 6월에 늦게 시작한 만큼 더 열심히 해야 했다.
작년 수능과 전반적인 내용은 비슷했지만, 국어는 예외였다. 문제 스타일이 바뀌었다. 비문학 지문은 더 길어지고, 한 지문당 문항 수도 늘어났다. 지문의 수는 줄었지만, 독해의 밀도는 훨씬 깊어졌다. 나는 바뀐 스타일에 적응하지 못해 6월 모의고사에서 국어 3등급을 받았다. 작년 수능도 지문 하나를 찍었을 정도로 국어는 시간이 부족했는데, 그 정도가 더 심해졌다. 특히 비문학 독해에서 발목을 잡혔다. 글을 읽을 때 내용이 잡히지 않고 그저 글자만 읽는 느낌을 받았다. 애매한 독해 후, 문제를 풀면 답이 딱 떨어지지 않았다. 지문을 반복해 읽으며 문제를 풀다보니 시간 부족은 당연했다.
수학과 영어는 안정적인 1등급을 유지했지만, 국어를 올리지 않으면 작년 수능보다 못한 성적을 받을 게 뻔했다. 그래서 국어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하지만 독해력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겠고, 실력이 는다는 감각도 없었다. 그렇게 국어는 늘 애매한 과목이었다. 학원 수업도 크게 도움이 되지는 못했다.
탐구 과목에도 변화가 있었다. 한국사가 수능 필수과목으로 전환되면서 평가체계가 절대평가로 바뀐 것이다. 40점만 넘으면 1등급이었고 아주 쉬운 난이도로 출제되었다. 그래서 윤리와 사상 외에 한국사를 대체할 과목을 선택해야 했다. 그때 반수반에서 친해진 친구가 세계지리를 추천해줬다. 한국지리처럼 덕후가 많은 과목도 아니고, 개념도 적은 꿀과목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개념 강의를 들어보니 꽤 괜찮았다. 다만 가끔 지엽적인 위치 문제가 나왔다. 그래도 이만한 과목이 없겠다 싶어 세계지리를 탐구 과목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그렇게 9월 모의고사를 치렀다. 수학, 영어, 탐구는 안정적인 점수가 나왔지만 국어는 여전히 3등급이었다. 계속해서 국어가 골칫덩어리였다. 비문학 지문은 여전히 버거웠고, 한두 개 지문은 시간에 쫓겨 날려버렸다. 이대로라면 두 번째 수능도 끝장이다. 그래도 낙장불입이다. 난 다시 한 번, 마지막까지 달려가보기로 했다.
반수반 생활은 생각보다 괜찮았다. 학원 스케줄은 빡빡했고, 수면시간이 부족해 졸던 날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런 강제적인 생활이 내게 안정감을 줬다. 혼자 경희대에 통학하며 느꼈던 공허함과 무기력함 대신, 다시 뭔가에 매달리고 있다는 감각이 좋았다. 새로운 친구들도 생겼다. 한 친구는 부산해양대를 다니다 반수하러 올라온 친구였는데, 그 친구 말로는 해양대 군기가 장난 아니라 했다. 진짜 군대급이라고 했다.
그렇게 두 번째 수능날이 다가왔다. 2016년 11월 17일. 1교시 국어 영역이었다. 6, 9월 모의고사 모두 국어 3등급을 받은 입장에서 국어는 항상 불안한 과목이었다. 수능 국어는 쉽게 출제될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시험지 첫 장을 펼쳤다. 하지만 역시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그해 수능 국어도 6, 9월 모의고사의 기조대로 길고 어려운 비문학 지문들이 출제되었다. 그리고 나는 끝내 비문학의 벽을 넘지 못하고 무너졌다. 비문학 두 지문을 통째로 날려버렸다. 글이 도무지 읽히질 않았다. 읽은 문장을 되풀이하다 결국 멘탈이 터졌고, 결국 찍은 문제가 8개에 달했다. 작년 첫 수능에선 두 문제가 딸려있는 지문 한개만 날렸는데 이번엔 진짜 제대로 망했다고 직감했다.
그렇다고 시험을 포기하거나 나가버릴 용기는 없었다. 가끔 1교시가 끝나자마자 수능장을 박차고 나갔다는 수험생이 있지만, 나는 그럴 배짱까지는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그저 희망 회로를 최대치로 돌리는 것뿐이었다. ‘찍은 거 많이 맞았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2교시 수학 시험을 준비했다.
그런데 수학도 작년보다 어려웠다. 작년 수능 수학은 30번만 빼면 기출 반복으로 커버가 됐는데, 이번엔 4점짜리 객관식 문제들부터 헷갈리기 시작했다. 특히 21번 문제, 답이 나오질 않아 가장 적게 나온 번호로 찍었다. 그리고 마지막 30번. 대망의 문제에 돌입하려는 찰나, 내 뒤에서 코 고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내 착각인 줄 알았다. 근데 점점 소리가 커졌다. 수학 시험 50분 만에 자는 거면, 그 학생은 천재거나 아예 수포자일 것이다. 코를 대놓고 고는데도 감독관은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한숨을 땅 꺼지듯 내쉬자 그제야 감독관이 다가가 그 학생을 살짝 깨우는 눈치였다. 하지만 그 친구는 이내 다시 코를 골며 잠에 빠졌다. 진짜 어이없고 짜증났다. 그 와중에도 이를 악물고 30번에 달려들었고, 다행히 정답이 나왔다. 검산까지 해보니 확신이 섰다. 수학은 100점이려나? 그런 생각이 스쳤다.
국어를 말아먹었지만, 다른 과목이 다 받쳐준다면 승산이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점심을 먹고 영어 시험에 돌입했다. 영어는 반수 기간 동안 가장 철저히 준비했던 과목이었다. 문제 유형별로 양치기 하듯 풀었고, EBS 연계 교재도 한 글자 한 글자 외우다시피 했다. 현역 때는 양이 많다는 이유로 EBS를 포기했지만 이번엔 달랐다. 만반의 준비를 했다.
그런데 1번 듣기 문제를 풀 때 사고가 났다. 잠깐 멍을 때린 순간 듣기가 끝나버린 것이다. 처음엔 정답을 찍었지만, 마킹 직전에 괜히 바꿔버렸다. 하, 객관식은 처음 찍은 게 답이라더니. 그래도 이후 문제는 괜찮았다. EBS와 연계된 지문 덕분에 체감 난이도도 낮았고, 시간도 절약됐다. 빈칸, 순서, 어휘 등 간접쓰기 문제도 확신을 가지고 풀었다.
이제 마킹만 하면 되겠다 싶었는데, 이번엔 옆자리에서 사건이 터졌다. 어떤 학생이 중얼중얼대기 시작했다. 귀 기울여보니 “하... 올해도 이러면 망했잖아...”라며 울먹였다. 아마 시간 조절에 실패한 것 같았다. 국어 시간의 내 모습과 똑같았다. 그 학생은 손을 벌벌 떨며 OMR 마킹을 하다가, 결국 울음까지 터뜨릴 듯한 얼굴이 되었다. 보다 못한 감독관이 다가가 어깨를 토닥이며 조용히 위로를 해줬다. 그 마음, 이해한다. 그 학생의 눈물은 곧 나의 마음이었다.
윤리와 세계지리는 작년과 비슷하게 풀었다. 늘 그렇듯이 1~2문제가 애매했지만 전반적으로 무난했다. 그렇게 긴 하루가 지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마음이 복잡했다. 채점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한숨만 나왔다. 수능에 기적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느꼈다. 모니터 앞에 앉았다. 희망회로 따위 모두 끊어진 상태에서 마우스를 움직였다. 무거운 마음으로 정답을 검색했다. 다시, 익숙한 그 화면. 수능 정답표가 눈앞에 펼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