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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손 쥐고 일어서

꾸리스마스와 목장갑

by 김건우

발표 날 아침,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모니터 앞에 앉아 있었다. 손끝이 얼어붙을 듯한 긴장 속에서 클릭한 합격자 명단. "합격" 두 글자를 확인하는 순간, 지난 몇 주의 불안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결국, 나군 공주교대와 다군 제주교대에 모두 합격했다. 가군? 묻지 마라. 처절하게 떨어졌다. 하지만 설령 붙었다 해도, 나는 교대를 선택했을 것이다. 공주와 제주 중에서 본가와 그나마 가까운 공주를 택했다. 마음속 합리화와 함께 현실적인 선택이었다. 그렇게 나는 공주교대 영어과로 진학하게 되었다. 모든 학과가 초등교육과로 통합되어 있지만, 세부 전공은 나뉘어 있었다. 국어, 수학, 사회, 과학, 영어, 음악, 미술, 체육, 실과, 윤리, 컴퓨터과 등으로 말이다.

이번엔 OT 같은 건 참여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과 섞이는 게 불편하고 어색했다. 그렇게, 나의 두 번째 대학생활은 조용히 3월부터 시작되었다.

수원에서 공주로 통학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래서 나는 ‘학선사’라는 교대 기숙사에서 지내기 시작했다. 2인 1실 구조였고, 고등학교 시절의 4인실 기숙사보다 나았다.

교대 1학년 생활은 여유로웠다. 빡빡한 수험생활과 비교하면, 하루하루가 느슨하고 넉넉하게 흘러갔다. 수업은 각 과목의 교과교육론과 교육심리학, 교육철학 등, 이름만 들어도 딱딱한 과목들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재미가 있었다. 초등교사가 되기 위해선 전과목을 두루 배워야 한다는 말 그대로, 영어과에 속해 있더라도 국어, 수학 등의 주지교과부터 체육, 음악 등의 예체능까지 모두 다뤘다. 체육 실기 시간에 공을 던지고, 음악 수업에서 장구 장단을 익히며 "사실 나는 초등학교에 다시 다니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다.


보통 교대는 여학생의 비율이 높다. 한 학번에 남학생이 2~3명밖에 없는 미술교육과는 거의 여초의 끝판왕이었다. 영어과는 조금 달랐다. 남학생이 10명이나 되는 과였다. 우리과 동기들은 96~98년생들이 섞여 있었고, 분위기는 대체로 유쾌했다.


공주교대에는 선후배 간 친목을 위한 오랜 전통이 있었다. 바로 선배들과의 대면식이었다. 영어과는 A반과 B반으로 나뉘어 있었고, 2학년부터 4학년까지 각 반 선배들과 한 번씩 밥을 먹는 자리가 필수적으로 마련됐다. 합치면 총 6번. 누가 이 전통을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왠지 피할 수 없는 관문처럼 느껴졌다. 대학 근처의 한식집에서 식사가 이뤄졌다. 분위기도 그럭저럭 부드러웠다. 다만 4학년 선배들과의 식사 자리는 조금 달랐다. 임용 준비를 시작한 그들의 얼굴엔 늘 피로가 가득했다. 말수가 적었고, 웃는 얼굴에도 잔뜩 눌린 중압감이 느껴졌다. 겨우 두세 살 차이인데도 왠지 모르게 딴 세상 사람처럼 보였던 기억이 있다.

이외에도 ‘동번’ 문화라는 것이 있었다. 예를 들어 내가 17학번 영어과 1번이라면, 선배 중 영어과 1번인 선배가 ‘동번 선배’가 되는 것이다. 입학 연도만 다를 뿐 학번 뒷자리가 같다는 이유로 맺어진 관계였다. 동번 선배는 일종의 ‘신입생 멘토’처럼 역할을 해주었다. 가끔은 밥을 얻어먹기도 하고, 필요한 교재나 정보도 먼저 챙겨주는 정겨운 문화였다. 누가 만든 문화인지 몰라도, 당시 신입생이었던 나에겐 큰 도움이 되어주곤 했다.

대면식 자리마다 신입생의 장기자랑은 필수였다. 지금 생각하면 웃기지만, 당시에는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준비했다. (17학번이 2학년이 되면서부터 이 관행은 사라졌지만 말이다.) 우리 과 남학생들은 5명씩 두 팀으로 나뉘어 춤을 준비했다. 우리가 선택한 노래는 그때 유행하던 크레용팝의 '꾸리스마스'.

문제는 내 왼손이었다. 장기자랑 무대는 누구보다 내게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평소에도 숨기기 바쁜 손인데, 춤을 추면서 그것을 드러내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그런데 한 동기가 재치 있는 아이디어를 냈다. 뮤직비디오에서처럼 모두 하얀 목장갑을 끼고 익살맞게 춤을 추자는 것이었다. 그 아이디어 덕에 나는 왼손을 노출하지 않고도 무대에 설 수 있었다. 내 왼손을 알고 그런 아이디어를 낸 건 아니었지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장갑을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꼈다. 엄지는 그대로 엄지 자리에, 검지는 장갑의 중지에, 마지막 손가락은 새끼손가락 자리에 끼웠다. 그러면 장갑의 검지와 약지 자리는 비게 되는데, 그 두 마디를 손바닥 쪽으로 접어 자연스럽게 묶으면 티가 잘 나지 않았다.

그렇게 대면식을 마친 뒤엔, 저녁마다 동기들과 술자리가 많았다. 술게임도 자주 했다. 하지만 나는 늘 소극적이었다. 술도 잘 못 마시거니와, 왼손을 써야 하는 술게임이 특히 싫었다.


내가 잘하는 건, 옆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어주는 일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내가 무뚝뚝한 성격인 줄 알았다고들 한다. 사실은 덜 친해서 그런 것이고, 친해지면 나도 제법 말이 많다. 교대 1학년은 그렇게 흘러갔다. 초등교원 양성기관 특성상 음악, 미술, 체육 등의 과목에 실기 수업이 많았고, 내 왼손이 장애물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는 마인드로 임했다.


수업 중 한 번은 태권도 교수님이 내 왼손을 보고 눈이 휘둥그레지시기도 했다. 친구들과 당구를 치러 간 날에 처음으로 내 손을 본 친구도 있었다. 어느 정도 친해지면 내가 먼저 이야기해야 되나 고민도 했다. 하지만 언젠가는 자연스럽게 다 알게 될 테니까. 굳이 내 입으로 먼저 호들갑 떨고 싶진 않았다.


음악 시간엔 피아노 수업이 있었다. 시험은 실기 평가. 양손으로 정해진 곡을 정확히 연주해야 A학점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내겐 ‘피아노를 잘 치는가’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바로, 왼손을 드러내야 한다는 것. 실기 시험날, 피아노 건반보다 더 눈에 밟힌 건 내 손이었다.


시험이 부담스럽다기보다는, 왼손을 들키는 그 순간이 고통스러웠다. 마치 잘못을 저지른 죄인처럼, 건반 앞에 앉은 내 마음은 무거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 손으로 피아노를 칠 수밖에. 나만의 방식대로 할 수 있는 만큼 연습했다. 시험 당일, 떨리는 손가락으로 음 하나하나를 눌러갔다. 완벽하진 않았지만, 최선을 다했다.

교수님은 편견 없이 내 연주를 지켜보셨고, 씨플(C+)을 주셨다. 솔직히 말하자면, 피아노에 약한 남학생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나 말고도 몇몇 남학우들이 굳은 손으로 어설픈 연주를 했다. 그 사실이 작은 위안이 되었다. 결국 음악 시험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왼손이 불편하다고 해서, 음악을 즐길 자격까지 잃는 건 아니라는 것. 완벽하진 않아도, 나만의 리듬으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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