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속 교대 면접
국어 점수는 역시나 처참했다. 총 일곱 문제를 틀려 원점수 83점. 작년 수능보다 무려 10점이나 하락한 점수였다. 착잡한 마음으로 등급 컷을 확인해보니, 어김없는 3등급이었다. 나머지 과목에서 만점을 받아도 서울대에 갈 수 없다. 국어 하나만으로 기세가 확 꺾였다.
수학은 객관식 21번 문제를 틀리고 말았다. 미적분 단원이었고, 풀이 과정 어딘가에서 문제가 있었던 게 분명했다. 30번 문제까지 맞췄지만, 결국 원점수는 96점. 물론 시험이 어려웠기에 백분위는 작년보다 높겠지만, 국어에서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영어는 찍었던 1번 듣기 문제를 틀리고 나머지를 전부 맞춰 98점을 받았다. 유독 아쉬웠다. 1번은 정답률이 90%가 넘는 서비스 문제였는데, 정신을 놓는 바람에 어이없이 틀린 것이다. 마킹 직전에 답을 굳이 바꾼 내 손을 한참 바라봤다. 정시 전형에서 한 문제, 한 문제는 곧 운명인데, 이렇게 놓쳐버린 것이다.
사회탐구도 만점은 아니었다. 윤리에서 두 문제, 세계지리에서 2점짜리 한 문제를 틀렸다. 특히 세계지리는 난이도가 평이했던 탓에 50점 만점이 1등급 컷이 될 게 뻔했고, 48점을 받은 나는 다시 한번 백분위에서 적잖게 손해볼 것이 자명했다.
수능을 폭삭 말아먹고 나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목표로 했던 한의대나 스카이는 이미 저 멀리 날아가버렸다. 그래도, 아직 할 일은 남아 있었다. 성적표를 바탕으로 한 '원서 영역'이 남아 있었으니까. 수능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원서다. 많은 수험생이 이걸 간과하지만, 점수에 맞춰 어디를 어떻게 지원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천차만별이 된다. 대학마다 유불리가 다르고, 지원자들의 동향도 늘 변하니, 분석하고 또 분석해야 했다.
수능 성적표를 받아보니 국어 3등급, 수학 1등급, 영어 1등급. 다행히 수학과 영어는 백분위 99였다. 만점을 받았다면 백분위 100이라는 꿈의 수치가 가능했을텐데, 참 아쉬웠다. 사회탐구 두 과목은 둘 다 2등급이었고, 다행히 현역 때의 한국사 '백분위 85 참사'보다는 높은 백분위였다.
진학사에 성적을 넣어 돌려보니 결과는 씁쓸했다. 연고대 방식으로 계산하면 백분위 2%, 성균관대, 중앙대, 경희대 등은 1.7%대였다. 현역 때보다 소폭 하락한 점수였다. 반면 서강대 방식으로는 1.5%대를 유지했는데, 서강대는 국어를 적게 보는 대신 수학과 영어를 상대적으로 많이 반영하는 대학이었기에 가능했다.
내가 경희대 회계세무학과에 다니던 시절, 1살 많은 형이 있었는데, 그 형은 경희대 무역학과에서 반수해서 회계세무학과로 온 케이스였다. 그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수능 망쳐서 결국 옆구르기 했구나.' 그런데 그게 지금의 내 모습일 줄이야.
이리저리 고민하다가 결국 차선책으로 교대가 떠올랐다. 당시 교대는 임용률이 90%에 육박할 만큼 취업이 잘 되는 학교였다.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교사라는 직업을 꿈꿔보지 않나? 나 역시 그랬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교대에 지원해볼까 싶었다.
서울교대는 점수가 높아 어려웠고, 경인교대나 지방 교대를 고려하게 됐다. 경인교대도 가능했지만, 면접의 비중이 높았다. 청주교대도 면접으로 당락이 갈리는 경우가 많다고 해서 배제했다. 그러다가 공주교대를 알게 됐는데, 공주교대는 재수생에게 비교내신을 적용하기 때문에 고등학교 3점대 내신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고, 면접 비중이 단 5%여서 사실상 수능 성적 줄세우기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군에 공주교대를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수능을 망친 김에, 그냥 교사나 해보자—약간 얄궂은 마음이었지만.
부모님은 말이 계속 바뀌는 나에게 진절머리를 내셨다. 뭐 어쩌랴. 원래 내가 좀 변덕이 많은 성격이기도 했고. 다군에는 제주교육대학교를 지원했다. 지금은 제주대학교로 통합되었지만, 당시 다군에서 제주교대는 정시 성적만으로 선발하고 면접도 보지 않았기 때문에 부담 없이 쓸 수 있었다. 가군은 한참 고민하다가 서강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를 지원했다.
이듬해 1월, 공주교대 1차 합격을 하고 면접을 보러 공주로 내려갔다. 생전 처음 가보는 공주시였다. 그날은 유난히 안개가 자욱했다. 학교에 도착했을 때 느꼈던 첫인상은—여기 맞나? 이게 대학 맞아?—였다. 주변이 너무 조용하고 황량했다. 죄다 원룸촌과 낮은 건물에 들어선 식당들뿐.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편했다. 경희대를 다닐 때는 늘 부산스럽고 번잡했는데, 이런 시골 느낌이 오히려 좋았다.
면접은 두 가지 문제가 나왔다. 첫 번째는 야간자율학습 의무화에 찬성하는가, 반대하는가. 두 번째는 마을에 1명 있는 지체장애인을 위해 1,000만 원의 세금을 들여 이동식 휠체어를 지원하는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였다.
나는 예비 교사로서 상식적이고 균형 잡힌 대답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면접장에 들어가니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는 떨리고 말도 자꾸 빙빙 돌았다. 첫 질문엔 야자 의무화에 반대한다고 했다. 나도 3년 동안 야자를 했지만,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획일적인 공부 방식은 오히려 독이 된다고 생각했다. 애들을 더 자유롭게 풀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문제는 너무 길게 말한 나머지 핵심이 묻혀버렸다는 것.
두 번째 질문엔, 장애인도 사회의 구성원이기에 지원이 필요하며, 세금 지원이 안 된다면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금이라도 해서 중고 휠체어를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답했다. 장애인 주제가 나와 왠지 내 왼손이 의식되었다. 내 왼손은 책상 아래 오른손 뒤에 다소곳이 숨어있었다. 나도 한 명의 지체장애인이라는 사실을 교수님들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면접을 보는 내내 왼쪽 교수님은 내내 환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고, 오른쪽 교수님은 종종 뚱한 표정을 지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왼쪽 교수님은 체육과의 태권도 교수님이셨고, 실제로 내가 입학한 후 “내가 널 뽑았어.”라며 장난스럽게 말씀하시기도 하셨다.
반면 오른쪽 교수님은 국어과에서 슬로 리딩 수업으로 유명하신 교수님이었다. 실제 수업에선 조별 프로젝트로 슬로 리딩에 대한 자료 조사, 글쓰기와 수업설계까지 결합한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느리지만 깊은 학습이 가능하다는 철학이 인상적이었다.
면접을 마치고 돌아온 후에도 마음이 영 개운치 않았다. 내 말이 꼬이고, 핵심이 흐려졌다는 느낌이 남았다. 점수만 보고 안심할 수 없었다. 면접실에서 어긋난 말들이 자꾸 마음을 흔들었다. 정말 붙을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합격자 발표 날짜를 손꼽아 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