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한 문제 차이, 하늘과 땅 차이

정시 지원은 눈치 싸움

by 김건우

일단 딱 봐도 이상한 등급은 없었다. 마킹 실수로 밀려 쓰는 경우엔, 중간에 전혀 말이 안 되는 등급이 하나쯤 튀어나오기 마련인데, 다행히 내 OMR 카드는 컴퓨터가 잘 읽은 모양이었다. 국어, 수학, 영어 모두 1등급. 하지만 국어와 영어는 백분위 96으로 간신히 턱걸이였다. 수학은 백분위 98이었다.

국영수 1등급이라고 해서 모두가 최상위권은 아니다. 나처럼 간신히 턱걸이한 1등급과 만점으로 1등급을 받은 수험생 사이에는, 전국 등수로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난다. 지원할 수 있는 대학도 달라진다. 중요한 것은 바로 백분위와 과목별 난이도에 따라 결정되는 표준점수다. 백분위 100과 백분위 96은 같은 1등급이지만 정시 지원에 있어선 꽤 큰 점수 차이라는 것이다.


문제는 사회탐구의 백분위였다. 예상대로 한국사의 1등급 컷은 50점 만점이었고, 나는 48점을 받아 백분위가 85에 불과했고 2등급이었다. 보통 2등급은 상위 11%까지 주어진다. 백분위 85는 원래 3등급에 해당한다. 하지만 50점이 1등급이고, 48점이 3등급을 받게 되면 ‘2등급 블랭크 현상’이 발생한다. 즉, 2등급이 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막기 위해 백분위85로 2등급을 받게 된 것이다. 하지만 대학 대부분은 등급보다 백분위를 보기 때문에, 2등급은 큰 의미가 없었다.

윤리와 사상도 백분위가 87로, 2등급 끄트머리에 해당했다. 나름 열심히 공부했지만 사회탐구 두 과목 모두 제대로 조져버린 것이다. 고3에 들어서 탐구를 시작한 업보였다. 아랍어는 4등급이 나와 망한 사탐을 대체하기엔 역부족이었다.


결국 나는 국영수탐을 합쳐 총 9문제를 틀렸다. 그 해 수능에서 문과 기준으로 서울대는 4개 이하, 연고대는 6개 이내를 틀려야 합격 가능성이 점쳐졌는데, 나는 그보다 3문제를 더 틀린 셈이다. 젠장. 어느 대학을 지원해야 할지 그때부터 고민에 빠졌다. 정시에선 수능 1문제 차이로 갈 수 있는 대학이 갈리는데, 최상위권에서 내가 변별 당해버린 꼴이었다.


대학마다 수능 점수를 반영하는 기준이 다르다. 과목별 가중치가 다르거나, 표준점수를 보는지, 백분위를 보는지에 따라 내 전국 누적 백분위는 천차만별로 달라졌다. 예를 들어, 국영수를 많이 반영하고 사탐 비중이 적은 성균관대나 중앙대의 경우 내 누적 백분위는 전국 상위 1.4%였다. 수학과 영어를 많이 반영하는 서강대나 경희대에도 유리한 등수로 지원할 수 있었다.

연세대·고려대 방식으로 계산해도 전국 1.8%에 해당하는 성적이었지만, 문제는 백분위를 기준으로 보는 한양대였다. 나는 사탐에서 백분위가 많이 깎였기 때문에 한양대식으로는 전국 2.2%에 해당했다. 이런 학교에 지원하면 합격을 장담할 수 없다.

그날부터 매일 진학사에 들어가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제일 좋은 학교와 학과가 어디인지 고민하며 하루하루를 일희일비했다. 하루는 친구와 함께 서울에서 열리는 대학 박람회에도 참여했다. 각 대학은 부스를 열어 학생들의 수능 성적을 보고 합격 가능성을 판별해 주었다. 그곳을 다녀와도 마음은 정착되지 않았고, 매일매일 마음이 바뀌는 나날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내가 서울시립대 세무학과에 지원하길 원하셨다. 취업이 잘 되는 유망한 학과였고, 게다가 아버지의 친구였던 서울시립대 출신 배구선수 오씨의 영향도 있었던 듯하다. 서울시립대는 한 학기 등록금이 100만 원 초반대인, 이른바 ‘혜자 대학’이었다.

나 역시 서울시립대 세무학과를 고려 중이라고 고3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다. 선생님도 “서울시립대도 좋은 선택이다”라며 긍정적으로 반응하셨다. 그리고는 원서 전략을 이렇게 짜보는 건 어떠냐고 제안하셨다. 가군에는 서울시립대 세무학과, 나군에는 서울시립대 자유전공학부, 다군에는 중앙대 경영학과. 서울시립대 자유전공학부에 입학하면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하게 되는데 대부분의 학생들이 세무학과를 선택한다는 것이다. 다군에는 쓸 수 있는 대학이 한정적이어서 중앙대 경영학과가 일부 한의대를 제외하면 가장 높은 대학이었다.

또 나군에 교대를 넣어보는 것도 괜찮겠다고 말씀하셨다. 당시 교대는 정시에서도 내신을 반영했기에 3점대 중반의 나의 내신으로는 불리했지만, 경인교대만큼은 예외였다. 정시 성적만으로 학생을 선발했기 때문이다. 충분히 합격 가능권이었지만, 문제는 2차 면접고사가 있다는 점이었다. 과거 동탄국제고 면접에서의 쓰라린 기억이 나를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렇게 여러 대학의 팸플릿을 들춰보다가 어느 학교의 장학제도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이었다. 국어, 영어, 수학 모두 1등급이면 전액 장학금을 준다는 것이었다. 그 문구를 보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공짜로 대학을 다닌다고?’


마침 등록금이 저렴한 서울시립대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터라 경희대 회계세무학과는 완벽한 대안처럼 보였다. 가군은 그렇게 경희대로 확정했다. 경희대 경영대학 내에는 경영학과, 회계세무학과가 있었고, 나는 그중 회계세무학과로 선택했다.

진학사에서 합격 예측을 해보니, 경희대는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가 없는 구조였다. 진학사의 합격 예측은 10칸 만점 기준인데, 6칸 이상이면 안정권, 4칸도 추가 합격 가능권으로 본다. 경희대 회계세무학과는 정시 원서 마감일까지도 6칸 아래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안정권 원서를 한 장 썼으니, 나군에는 도전적인 지원을 하고 싶어졌다.


나 군에 쓸 수 있는 대학 중 수험생들이 가장 선호하는 곳은 단연 연고대였다. 하지만 내 점수로는 연고대를 쓰기에 다소 부족했다. 연고대식으로 계산하면 전국 1.8%였기에, 매년 간헐적으로 발생하는 이른바 '빵꾸과'를 노려야 했다. 어디에서 빵꾸가 날지는 예측할 수 없었다. 인기학과인 경영학과에서 날 수도 있고, 수험생들이 많이 선호하는 심리학과나 미디어학과에서 날 수도 있었다. 반면 철학과나 신학과처럼 상대적으로 덜 선호되는 학과는 오히려 안정적인 입결을 유지하곤 했다. 그런 학과들은 보통 정원이 적고, 안정적인 합격을 노리는 상위권 학생들이 지원했기 때문이다.


나는 작년 입결을 뒤져봤고, 유독 낮았던 연세대 국어국문학과가 눈에 들어왔다. 올해도 운 좋게 빵꾸가 나지 않을까 기대가 되었다. 진학사에서는 합격 예측을 3칸 정도로 줬다. 불안하지만 한 발 쏘아보기로 했다. 나는 그렇게 연대 국문과를 조준한 정시판의 스나이퍼가 되었다.

keyword
이전 19화타발적 정시 파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