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술 1장의 패기
수능은 모의고사와 달리 시험지를 집으로 가져올 수 없다. 그래서 채점을 하려면 가채점표에 내가 고른 답을 미리 적어두어야 했다. 나는 수험표 뒷면에 붙어 있던 가채점표와 모니터에 띄운 정답 화면을 번갈아 보며 살 떨리는 채점을 시작했다.
가장 걱정이던 국어의 과학 지문. 찍었던 두 문제는 역시나 둘 다 틀렸다. 찍기의 신은 이번에도 날 외면했다. 이상하게도, 감으로 고른 답은 늘 틀린다. 게다가 급하게 풀다가 틀린 문제까지 더해 국어 영역에서만 총 세 문제를 틀려버렸다. 2점짜리 두 문제에 3점짜리 한 문제. 원점수로는 100점 만점에 93점이었다.
나는 부랴부랴 인터넷 강의 사이트를 열어 1등급 커트라인을 찾아보았다. 대부분의 강사들이 93~94점을 1등급 예상 컷으로 잡고 있었다. 겨우 턱걸이라니,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이번 수능으로 서울대를 가려면 국영수 세 과목에서 총 세 개 이하만 틀려야 한다는데, 국어에서만 벌써 세 문제를 놓친 셈이었다. 서울대의 꿈은, 아마 이 순간 물거품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1교시 채점의 여운을 삼키며, 나는 수학 답안을 펼쳤다.
수학은 찍은 30번 문제를 제외하고는 자신 있었다. 여러 번 검토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수학은 30번만 틀린 96점이었다. 수능에서 100점 과목이 하나라도 있으면 대학 지원 시 정말 유리한데, 수학을 하나 틀리는 바람에 매우 아쉬웠다.
다음은 영어였다. 영어는 예측할 수 없는 복병 과목이었다. 찜찜하게 푼 문제가 많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결국 빈칸 추론 유형에서 두 문제를 틀리고 말았다. 다행히 헷갈렸던 간접쓰기 문제들(순서, 문장 삽입)은 모두 맞췄다. 3점짜리 문제 2개를 틀려 영어는 94점이 나왔다. 그날 시험장을 나서며 느꼈던 당혹감이 다시 되살아났다. '불수능'까지는 아니지만 '끓는 물 수능'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였다.
한국사는 난이도가 평이했다. 그래서일까. 2점짜리 하나를 틀린 게 더 뼈아프게 느껴졌다. 한국사는 서울대를 목표로 하는 학생들이 응시하는 과목이라 표본 수준이 높다. 이렇게 쉬운 시험은 1등급 커트라인이 50점일 가능성이 높고, 48점이면 백분위에서 큰 손해를 보게 된다.
조금 까다로웠던 윤리와 사상도 두 문제를 틀렸다. 45점. 이 역시 1등급은 물 건너갔다. 사회탐구 과목 특성상 개념이 쉽기 때문에, 시험이 조금 어렵더라도 1등급 커트라인은 47~48점에서 형성되기 때문이다.
제2외국어 영역인 아랍어는 50점 만점에 10점대 중반의 점수를 맞았다. 이 정도 점수면 과연 몇 등급이 나올까 궁금해졌다. 수능 답안지는 냉정했고, 나는 서서히 정시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수능이 끝났다고 고등학교가 바로 놀자판이 되는 것은 아니다. 대학별 논술 전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수능 가채점 성적을 바탕으로 내가 논술을 보러 가야 할 대학이 정해진다. 예를 들어 연고대에 갈 만한 수능 성적이 나오면 그 이하 대학은 논술을 보러 가지 않는 식이다. 수능 성적에 따라 여유있게 논술 시험을 거르는 친구들도 있었다. 반면에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지원한 모든 논술 시험을 치러 가야 한다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고3 당시 호기롭게 수시 카드를 단 한 장만 썼다. 수시는 최대 6장까지 쓸 수 있지만, 나는 '스카이 아니면 안 간다'는 마음으로 고려대 논술 한 장만 지원했다. 연세대를 쓰지 않은 이유는 간단했다. 연세대는 수능 전에 논술을 치렀다. 만약 수능이 대박 나 서울대를 갈 수 있는 성적이 나왔는데, 연세대에 붙어버리면 '납치'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미친 짓이었다.
그렇게 수능에서 애매한 성적을 받은 나는 고려대학교 논술 시험을 보러 갔다. 고풍스러운 건물과 멋진 과잠을 입은 대학생들. 고려대 경제학과에 논술을 지원했기 때문에 인문논술과 수리논술을 모두 치러야 했다. 인문논술은 형식에 맞춰 그럭저럭 써냈다. 문제는 수리논술이었다. 처음 보는 형식, 처음 보는 유형. 수능 30번보다도 더 괴랄한 문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손끝은 굳었고, 뇌는 작동을 멈췄다. 결국 수리논술을 망치고 집에 돌아와 한숨만 내쉬었다. 보통 인문논술과 수리논술 모두 정답에 가깝게 풀어야 합격 가능성이 점쳐지는데, 나는 그 기준에 한참 못 미쳤다.
이제 정말 나에겐 남은 것은 정시 파이터의 길이었다. 수시로는 대학에 갈 수 없는 '타발적' 정시 파이터인 셈이었다.
수능을 본 후 약 3주가 지나면 성적표가 나온다. 담임 선생님이 우리의 수능 성적표 뭉치를 교탁 위에 가볍게 올려두셨다. 번호 순서대로 자신의 성적표를 받는다. 과연 몇 등급일까, 백분위는 얼마나 나올까, 마킹 실수를 하진 않았겠지? 떨리는 마음으로 나의 수능 성적표를 받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