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아빠가 화가 났어요

교권은 어디에 있습니까

by 김건우

학교폭력으로 공식 접수된 사안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학부모가 예민했던 일이 있었다. 학폭은 아니지만 학폭처럼 다뤄야 했던 사건이었다. 그 사건은 내가 교권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뼈저리게 실감하게 만든 경험이기도 했다.


그 학생은 ‘공주님’이라는 별명이 어울릴 만큼 모든 조건을 갖춘 아이였다. 단정한 용모, 우수한 성적, 원만한 교우관계, 거기에 임원직까지 맡고 있었다. 교실에서든 복도에서든 항상 밝고 얌전했다. 나 또한 이 아이에게 큰 신뢰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날 이 아이의 아버지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선생님, 혹시 우리 아이가 요즘 학교에서 무슨 일을 겪고 있는지 알고 계시나요?”


낯선 긴장감이 전화 너머로 전해졌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대답했다.


“별다른 말은 없었습니다. 학교생활을 정말 잘하고 있어요.”


그러자 아버님의 목소리가 한층 격해졌다.


“담임이면 이 정도는 알고 계셔야죠. 선생님에 대해 들은 얘기도 있고,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시는 것 같네요.”


그 말에 나는 머리가 멍해졌다. 이어진 설명은 이랬다. 같은 반에 있는 특수교육대상 학생이 지속적으로 자신의 딸을 괴롭히고 있다는 것이다. 툭툭 건드리거나, 째려본다는 것이었다.


그 학생은 하루에 두 시간씩 특수학급인 ‘사랑반’에서 수업을 받는 아이였다. 체구도 작고 말수도 적은 아이였다. 교실 안에서는 조용하고 순한 아이였기에, 다른 학생을 괴롭힌다고 하니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아이들과 하나씩 이야기를 나눠봤다. 공주님은 그 상황을 담담히 전했다. “자꾸 저를 건드려요. 가끔 째려보기도 해요.” 그 말을 듣고 사랑반 아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안 때렸어요.” 단 한 문장이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소통이 원활하지 않은 아이였기에, 정확한 맥락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나는 곧바로 특수학급 선생님과 함께 지도에 들어갔다. “친구 몸을 툭툭 치는 것도, 계속 바라보는 것도 상대에겐 불편할 수 있어. 다음부턴 조심하자.” 학생 어머니에게도 재발 방지를 위한 협조를 부탁드렸다.


이후 공주님의 아버지께 다시 전화를 드렸다. 최대한 신속히 조치했고, 문제는 잘 정리되었다는 내용을 정중히 설명드렸다. 그러나 돌아온 반응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아직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시는 것 같네요. 우리 애가 요즘 경기를 일으켜요. 학교 가기가 무섭다고 운다구요!”


그리고는 격앙된 목소리로 학교를 직접 찾아가겠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나는 순간 너무 당황했고, 내심 억울했다. 사안을 과민하게 해석하고 있다는 판단도 들었다. 그러나 그 순간 중요한 건 내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차분히 말했다.


“아버님, 따님은 교실 안에서 누구보다 주목받는 아이입니다. 성실하고, 밝고, 친구도 많고요. 반면 그 학생은 수업 시간도 제한적이고, 말도 많지 않으며, 교실 안에서 오히려 위축되어 있는 모습이 많습니다. 물론, 불편한 행동은 분명 지도했습니다. 조금만 믿고 기다려 주시면, 아이들에게 더 좋은 학급 분위기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그날 이후, 다행히 더 큰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이 일을 오래도록 잊을 수 없었다. 내가 화가 났던 건 그 상황 자체가 아니라, 그 상황을 누군가가 너무 쉽게 단죄하고 몰아갔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교권이라는 말은 멀게 느껴졌지만, 실제 교권이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 정도는 아셔야죠.” “선생님 젊으시다면서요? 벌써 이야기 다 들었습니다.” 이런 말 한 마디가 교사를 무력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분명히 배웠다. 어떤 상황에서도 중요한 건 ‘상호 존중’이라는 것. 학생과 학생, 학부모와 교사, 그 미세한 줄타기 속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노력만이 유일한 해답이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바로 교육이라는 길을 선택한 이가 지켜야 할 품위라는 것을 말해준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해도 선생님은 하늘 같은 존재였다. 지금의 아이들처럼 교사를 친구처럼 대하거나, 때때로 농담 따먹기나 하며 기어오르는 분위기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초등학교 4학년 때 복도를 달리다가 옆 반 선생님께 명치를 한 대 맞은 적이 있었다. 숨이 턱 막혀 몇 초간 제대로 호흡조차 못 했지만, 그 상황에서 잘못한 건 나였다. ‘뛰지 말랬잖아.’ 그 한마디면 설명은 충분했다. 벌을 받는 건 잘못에 대한 당연한 대가였고, 아이는 순응해야 하는 존재였다.


그 시절에는 교사의 권위뿐만 아니라 학부모의 태도도 지금과는 사뭇 달랐다. 김영란법 제정 이전이라 스승의 날이나 학기 초가 되면 교사들에 대한 선물 공세가 어지간한 연례행사처럼 이어졌다. 내 어머니도 언젠가 이렇게 말씀하셨다. 담임선생님께 고급 과자 세트뿐만 아니라 책에 현금을 끼워넣어 드린 적이 있었다고 말이다. 물론 촌지 문화가 올바르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 <선생 김봉두>에 나오는 잘못된 옛 교직 문화를 미화할 의도도 없다. 다만, 그 시절엔 교사가 ‘존경의 대상’이자, ‘조심스러운 존재’로 대우받았던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어느새 시대가 바뀌었다. 학생의 권리는 높아지고, 교사의 권위는 바닥을 치고 있다. 정당한 훈육조차 학부모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아동학대’로 낙인찍히는 시대다. 부당한 체벌이 사라진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문제는 훈육까지 위축된 교실 분위기다. 학생에게 ‘그건 아니야’라고 단호히 말하는 순간부터, 교사는 학부모와의 갈등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오늘 아침, 스마트폰 화면을 스치던 속보 하나가 눈을 붙잡았다. 제주도의 한 중학교 교사가 악성 민원에 시달리다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는 기사였다. 처음엔 눈을 의심했다. 똑같은 사건을 또 본 걸까. 아니었다. 또 다른 사건이었다. 2023년 서이초 사건 이후, 교권 추락은 여전히 끝나지 않은 전염병처럼 교직 사회를 망가뜨리고 있었다.


스물네 살. 이제 막 교단에 선 초등학교 신규 교사가 있었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어떤 선생님이 되고 싶었을까? 그러나 그녀는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학부모들의 악성 민원 때문이었다. 경찰은 무혐의 내사 종결로 마무리했다. 죽은 이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었다. 한 생이 사라졌는데, 그에 대한 책임은 아무에게도 없었다.


이건 단순히 개인의 문제, 우울증, 스트레스 탓이 아니다. 사회의 시스템이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학생들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든 중재할 수 있다. 하지만 학부모들 사이의 감정은 다르다. 아이보다 어른이 더 복잡하고, 더 깊게 다친다. 교사는 그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야 한다. 중립적으로 공평하게 균형의 무게추를 잡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배웠고, 그렇게 해보려 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그건 말처럼 되지 않는다. 교사들은 학부모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다. 나는 학생과 학부모의 사이에서 통역자였다. 한쪽의 말을 다른 쪽에 전달하다보면, 어느새 말은 왜곡되고, 감정은 커져 있었다. 그러면 그 책임은 교사 몫이 된다. 학부모는 교사를 적으로 생각하게 된다. 말꼬투리를 잡기 시작한다.


나도 당했다. 전화 한 마디, 메시지 한 줄에도 스트레스를 받았다. 말조심이 몸에 배었다. 몇 번의 통화가 지나고 나면, 전화벨 소리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진동도 울리지 않았는데, 진동 소리를 환청으로 듣곤 했다. 나는 내가 무너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2023년, 선생님들이 일어섰다. 매주 주말, 광화문에 모였다. 그리고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을 기획했다. 교육청은 협박했다. “참여한 교사들을 징계 조치하겠다.” 교육청이란 조직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곳인가. 현장에 대한 이해도 없이 탁상행정으로 교사의 무거운 등 위에 공문을 얹는다. 교사 출신인 장학사들도 교육청만 들어가면 권위의 껍질을 두른다.


그리고 나는 또 하나의 기억을 꺼낸다. 신규 시절, 학폭 피해 학생이 있었다. 어머니와 단둘이 살았지만, 케어를 전혀 받지 못하는 상태였다. 집도 없이 허름한 모텔에 살던 아이. 사이버 성폭력 피해로 학폭을 겪던 그 아이는 돌연 학교에도 나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았다. 사안 처리가 멈춰버렸다. 나는 다급한 마음으로 장학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장학사는 짜증이 묻어나는 말투로 말했다. “아니, 학생과 연락이 안 되면 이메일로 사인받으면 되잖아요.”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 아이는 이메일로 사인을 보낼만한 가정환경 처지가 아니었다. 툴툴대는 장학사의 말 한마디가, 지금의 기형적인 교육 행정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쓸데없는 공문, 복잡한 보고 체계, 매년 의미없이 바뀌는 교육 정책들. 국회의원은 영화 상영 횟수 같은 엉뚱한 자료를 요구하고, 교육청도 쓸모없는 자료집계를 요청한다. 교사는 국가직 공무원으로서 행정 업무를 해야할 의무가 있다. 하지만 그것의 비중이 아이들과의 수업보다 커져버리면 이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격이다.


2023년 9월 4일, 공교육 멈춤의 날. 나도 광화문에 나갔다. 병가를 썼다. 평소 앓던 아토피 진료를 받고, 약을 탔다. 아이들에겐 조심스럽게 미리 말했다. “내일은 선생님이 없을 거야.”


광화문엔 정말 많은 교사들이 있었다. 5만 명이 넘는 선생님들. 질서를 지키며 모였다. 그러나 분명하게 우리의 요구를 외쳤다.


뙤약볕 아래, 다들 지칠 법도 했지만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시위가 끝나고 돌아가는 발걸음엔 폭언도, 폭력도 없었다. 쓰레기 하나 없이, 선생님들은 조용히 귀가했다. 그 장면을 보며 생각했다. 선생님이란 직업은, 아이들을 좋아해서 시작한 사람들의 집단이다. 그런데 이 사회는 선한 사람들을 자꾸 망가뜨린다. 착하면 손해 보는 구조. 정직하면 바보 되는 시스템. 그게 과연 선진국이라 불리는 대한민국의 모습인가?


시간이 흘렀다. 그날로부터 2년이 지났다. 교권은 회복되지 않았다. 오늘도 중학교 교사 한 명이 세상을 등졌다. 고등학생들은 이제 교육대학을 기피한다. 교육의 비정상화가 계속 된다면 결국 그 피해는 사회 전체가 떠안게 될 것이다. 교대생 시절, 상담심리학 교수였던 H 교수님의 말씀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지금은 교권이 최저점입니다. 반등할 날만 남았어요.”


그 말이 현실이 되기를, 그래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 모두가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건강한 교육 환경이 하루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교권 반등은 요원한 일처럼 느껴진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그 무너진 자리 위에서 교사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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