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우리 가족은 화성시 봉담면의 작은 빌라로 이사를 갔다. 그즈음 다섯 살 터울의 동생 준하도 태어나, 우리는 네 식구가 되었다. 나는 봉담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입학 첫 주는 학급 적응 기간이라 매일 4교시 수업을 했다. 둘째 주부터는 5교시 수업이 하루 생겼다. 바보 같은 초1의 나는 그걸 몰랐다. 점심을 먹자마자, 가방을 싸 들고 의기양양하게 집으로 갔다. 뭔가 이상하긴 했다. 평소 같으면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집에 가야했는데, 다들 교실에 남아 청소를 하거나 삼삼오오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때 나는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
‘참, 여유도 많다. 바보들.’
하지만 바보는 바로 나였다. 담임선생님이 “오늘은 5교시까지 수업해요.”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을 텐데, 나는 그냥 흘려들었던 것이다. 그날 우리 엄마는 선생님으로부터 전화를 받았고 또 한 번 놀라셨다.
“건우가 말도 없이 집에 가버렸다구요?”
이랬던 아이가 지금은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교실 앞에 서 있다. 아이들이 엉뚱한 행동을 할 때마다 나는 한 번 더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왜냐고? 내가 옛날에 더했으니까.
그 시절, 초등학교 앞에는 꼭 문방구가 하나씩 있었다. 그리고 문방구 앞에는 늘 게임기가 몇 대씩 놓여 있었다. 아이들은 하교 후 그곳에 모여 서로의 게임 실력을 자랑했다. 나 역시 ‘메탈슬러그’ 게임기에 동전을 하나씩 밀어넣으며 시간을 보냈다. 어느 날은 한창 게임에 몰두하고 있는데, 갑자기 험상궂게 생긴 3학년 형이 다가와 내 동전 꾸러미를 낚아채 가버렸다. 화가 났지만 그 형의 험악한 표정에 기가 눌려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벌개진 얼굴로 쫄래쫄래 집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엄마에게 일러바쳤다. 엄마는 망설임 없이 내 손을 잡고 문방구로 향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문방구에 도착해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 형은 내게 빼앗은 동전으로 게임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엄마는 그 형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나는 엄마의 등 뒤에서 슈퍼히어로를 본 듯한 든든함을 느꼈다.
하지만 영웅같은 엄마도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당시 ‘학교에서 똥 싸기’는 남자아이들 사이에서 금기에 가까운 일이었다. 누가 변기 칸에 들어가면 꼭 확인하러 오는 애들이 있었고, 어떤 녀석은 위로 물을 끼얹기까지 했다. 그게 초등학생들의 유치한 놀이문화였던 것이다. 이해가 안 됐던 나는 그저 속으로 생각하곤 했다.
‘남이 똥 싸건 말건, 그걸 왜 훔쳐보고 괴롭히는 거지? 사람이 똥 싸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문제는 초등학교 1학년 어느 날, 나에게 갑작스럽게 배탈이 찾아왔다는 점이다. 수업 중에 배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나는 필사적으로 참았다. 목표는 단 하나-하교 시간까지 버티고, 집에 가서 해결하는 것.
‘어떻게든 버틴다. 집까지 전속력으로 달린다.’
집까지 거리는 도보 10분 남짓으로 멀지 않았다. 하지만 문제는 똥이 폭발 직전이라 ‘전속력으로 달리기’가 불가능했다는 점이다.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 어느 순간 확신이 들었다.
‘이건 집까지 못 가져간다.’
결국 나는 집 근처 허름한 공터 뒤 풀숲에 몸을 숨겼다. 조심스럽게 바지를 내리고 자세를 잡았다. 드디어 해방의 순간이 찾아왔다. 그런데 엉덩이 각도가 잘못되었는지 똥이 출렁하며 바지를 강타해버린 것이다. 당황한 나는 최대한 조심스레 바지를 다시 올리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집까지 걸어갔다. 그 모습이 얼마나 희한했는지는 상상에 맡긴다.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가 욕실에서 막 나오던 참이었다. “건우야, 뭐야? 이 냄새!” 라고 묻는 아버지 앞에서 나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아버지는 웃음을 터뜨리며 “그래, 1학년인데 그럴 수도 있지.” 라며 나를 씻기고 옷을 갈아입혀 주셨다.
그랬던 내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사실이 아직도 가끔 낯설다. 고학년 담임을 주로 맡아왔기 때문에 대소변을 치워본 적은 아직 없다. 토사물은 매년 한두 번쯤 치운다. 물티슈로 닦고 페브리즈를 뿌린다. 마지막에 에프킬라로 마무리하면 냄새가 싹 사라진다. 에프킬라는 살충제지만 냄새 제거에도 탁월하다. 어쨌거나 나는 똥쟁이 1학년이었다. 그래서 우리 반 아이들이 엉뚱한 실수를 저질러도 나는 조금 더 관대해지려 한다.
봉담초 1학년 생활은 즐거웠다. 나는 미술 학원과 태권도 학원을 다녔고, 집에 돌아오면 구구단을 외우며 집안을 청소하기도 했다. 청소를 마치면 WWE 프로레슬링을 보며 ‘더 락’의 말투를 흉내냈다. 동생 준하는 그 무렵 막 걷기 시작한 아기였는데, 참 귀여웠다. 얼굴을 가까이 들이대다 손톱에 자주 꼬집히곤 했다.
한 번은 준하가 커터칼을 들고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깜짝 놀란 나는 얼른 커터칼을 뺏으려다 오른손 중지를 베어버렸다. 붉은 피가 팍 튀었고, 나는 소리를 지르며 울기 시작했다. 엄마가 황급히 달려와 거즈로 손가락을 감쌌다. 그리고 나를 업고 근처 병원으로 달려갔다. 병원에서 마취를 하고 상처를 몇 바늘 꿰맸다. 너무 무서워서 의사 선생님께 발길질을 마구 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참 죄송한 일이다. 실밥을 꿰맨 손가락이 징그러워 소름이 끼쳤다. 나중에 실밥을 풀 때도 너무 아파 의사선생님께 발길질을 몇 번 더했다.
당시 이웃들과도 사이가 좋았다. 내 또래 아이들을 키우는 이웃이 세 집쯤 있었다. 특히 딸만 셋인 아랫집과는 자주 어울려 놀았다. 우리는 서로의 집을 드나들며 해가 질때까지 놀았다. 당시 동네에서 부업이 유행이었다. 우리 엄마도 부업을 하며 살림에 보탰다. 엄마 곁에 쪼그려 앉아 지켜보다 금세 방법을 터득한 나는 엄마를 따라 같이 부업을 하곤 했다. 성과가 크진 않았지만, 그저 함께 일을 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1학년 담임 선생님은 어딘가 유명 성악가 조수미를 닮았었다. 그래서인지 TV에서 조수미를 보고는 진짜 선생님인 줄 알고 엉뚱한 소리를 하던 기억도 있다. 하루는 조수미 선생님이 학 접기 대회를 열었다. 한 달 동안 가장 많은 학을 접어오는 아이에게 상품을 주겠다고 했다. 그때 똘똘한 친구 하나가 손을 들고 물었다.
"선생님, 집에 가서 엄마 아빠랑 같이 접어도 돼요?"
선생님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날부터 우리 집은 학 접기 프로젝트에 돌입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나—온 가족이 퇴근과 하교 후에 거실에 둘러앉아 종이를 접기 시작했다. 초반엔 어설펐다. 삐뚤빼뚤 접기도 하고, 학이 아닌 다른 것을 접기도 했다. 하지만 손이 익어가면서 점점 접는 속도가 빨라졌다. 나중엔 TV 드라마 ‘풀하우스’를 보면서 접는 경지에 이르렀다. 눈과 귀로는 드라마를 보지만, 손은 습관처럼 학을 접었다. 결국 수백 마리의 학을 유리병에 담아가 1등을 차지했다. 부모님이 나를 위해 학종이를 접어주셨다는 사실이 고맙다. 내가 학교에서 주눅 들지 않도록 응원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또 한 번의 기억. 어느 날, 친구가 내 왼손을 빤히 보며 물었다.
"건우야, 손가락은 나중에 자라나온다?"
부담스러운 시선에 나는 얼른 왼손을 숨겼다. 내가 무슨 도마뱀도 아니고 여지껏 8년을 살아왔는데 손가락이 자라날 기미 따위는 전혀 없었다. 나는 단호하게 "안 자라"라고 말했고, 친구는 끝까지 "자란다니까!" 하며 우겼다. 결국 말싸움이 주먹싸움으로 번졌다. 그리고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래. 네 말대로 내일 아침에 눈 떴을 때 왼손가락이 자라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또 한 번은 사람이 동물인가 아닌가를 두고 논쟁이 붙었다. 친구가 사람은 동물이 아니라고 주장을 펼쳤다. 나는 “사람도 동물이거든! 아니면 무슨 식물이냐?”라며 따졌지만, 선생님이 “사람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며 친구 편을 들었다. 내 친구는 그 말을 듣고 기세등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나는 끝끝내 수긍하지 않았다. 동물 백과사전에서 분명히 사람도 포유류라고 배웠으니까. 다음날 그 사전을 들고 다시 그 얘길 꺼냈던 내가 얼마나 골치 아픈 아이였는지-지금의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교실 한쪽에서 뜨거운 논쟁이 펼쳐지면, 나는 웃으며 아이들에게 말해준다.
“네 말도 맞고, 네 말도 맞아. 중요한 건 네가 생각을 멈추지 않는 것이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