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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난 발로 다시 걷기

by 김건우

초등학교 1학년을 마치고, 우리 가족은 다시 한 번 이사를 했다. 이번에는 화성시 안화동 주공아파트였다. 30평대 넓은 집, 깨끗한 대단지, 방 세 개에 화장실 두 개. 그때 나는 우리집이 갑자기 부자가 된 줄 알았다. 훗날 알게 되었지만, 그 아파트는 임대주택이었다.


이사와 함께 안화초등학교로 전학했다. 2학년 생활의 시작이었다. 담임은 곽 선생님. 키가 작고 피부는 까무잡잡했으며, 안경 너머로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분이었다. 말투는 딱딱했고 원칙주의자였다. 나는 수업 시간마다 말이 많았고, 그 탓에 자주 혼났다. 어느 날엔 알림장에 이런 말까지 적혔다.


“건우가 수업 시간에 너무 시끄럽습니다. 조용히 시켜주세요.”

나는 그날 알림장을 엄마에게 숨겼다. 이걸 들키면 난 죽은 목숨이다. 하지만 엄마는 날카로웠다.


“김!건!우! 너 오늘 알림장 왜 안 보여줘?”

엄마가 성을 붙여 부르는 건 몽둥이 찜질의 전조였다. 모든 게 들통났고, 비 오는 날 먼지 나듯 호되게 혼났다.


부반장 친구와 수업시간에 또 떠들다가 둘 다 손 들고 무릎 꿇는 벌을 선 적도 있다. 그 친구는 “너 때문에 혼났잖아!”라고 화냈지만, 나는 그냥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조용히 앉아 있는 건 내 성미에 안 맞았다.

그랬던 내가 어느 날 수학시험에서 뜻밖의 백점을 받았다. 늘 모범적인 애들과 같은 점수라니! 곽 선생님이 내게 지은 표정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니가?" 하는 눈빛이 생생하다. 놀람과 의심이 뒤섞인 그 눈빛은 어린 나에게 묘한 통쾌함을 안겨주었다. 엄마와 매일 한 시간씩 기탄수학을 풀었던 노력이 빛을 본 순간이었다. 기탄수학은 기본적인 사칙연산 문제로 구성된 산수 문제집이었다. 처음에는 실수도 잦고 틀리는 문제도 많았지만, 반복해서 문제를 푸는 과정에서 산수력은 차츰 올라갔다. 그때 닦은 기초 덕분인지, 학창시절 내내 나는 계산 실수가 비교적 적은 편이었다. 요즘 우리 반 아이들이 수학 시험에서 엉뚱한 오답을 쏟아낼 때마다, 어린 시절에 기초적인 산수 연습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느낀다.


기초를 다진 뒤, 도전한 것이 ‘왕수학’ 시리즈였다. 왕수학은 기본 문제부터 왕문제, 왕중왕문제까지 난이도가 올라갔다. 특히 왕중왕문제는 경시대회 급 문제로 도배돼 있었다. 엄마가 옆에서 하나하나 풀이과정을 설명해줘도, 내 머리는 좀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문제 푸는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엄마가 없을 때 답지를 베껴 쓰기 시작했다. 평소에 절반도 못 맞추던 왕중왕문제를 갑자기 다 맞추니, 수상했을 것이다. ‘띨띨한 2학년 김건우’는 어머니를 속일 깜냥이 안 됐다. 엄마는 조용히 나를 불러 왕중왕문제를 다시 풀어보라고 했다. 나는 문제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고, 풀이과정 한 줄도 제대로 적지 못했다. 그날 엉덩이에 매운 몽둥이 찜질을 받았다.

그날 나는 배웠다. 남을 속이려다 결국 스스로를 속이게 된다는 것을. 거짓말은 쉽지만 불편한 진실은 언젠가 돌아온다는 것을. 지금도 공부를 하기 싫어 답지를 베끼는 아이들을 보면, 내가 겪었던 그날의 공포와 창피함을 생생하게 이야기해준다.


나는 태권도, 피아노, 영어학원까지 다녔다. 영어 알파벳을 외우지 못해 엉덩이를 맞아가며 1시간 만에 외웠다. 학원을 뺑뺑이 돌다가 친구 꼬임에 넘어가 영어학원을 땡땡이 치고 피시방에 갔다가 엄마에게 걸렸다. 영어학원에 뒤늦게 도착해 “오늘 그냥 온 걸로 해주시면 안 돼요?” 했던 나의 뻔뻔함은 선생님의 표정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한 대 쥐어박고 싶은 걸 어떻게 참으셨을까? 그 시기 내 별명은 ‘구타유발자’였고, 지금 생각해도 참 절묘한 별명이었다.


내 왼발은 엄지발가락 빼고 네 발가락이 붙어 있었다. 그럼 발가락을 떼어내는 수술만 한다면 내 왼발은 정상이 되는 것일까?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성장하면서 양다리의 길이가 차이났다. 정강이뼈의 길이가 달랐고, 발 크기도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 무렵 발가락을 떼어내는 수술을 받았다. 다리 길이 차이는 아직 1cm 정도 차이에 불과했기에 성장에 따른 길이 변화를 지켜보는 편이 좋다고 했다.


수술 날짜를 잡고 아주대학교 병원에 입원했다. 수술 전 빵을 먹고 체해서 관장을 했는데, 최악의 경험이었다. 처음으로 전신 마취를 경험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던 것처럼 숫자를 하나둘 세다가 스르르 잠에 들었다. 눈을 떴을 때 이미 수술은 끝나 있었다. 몽롱한 기분과 함께 왼발에서 통증이 밀려왔다. 의사가 진찰을 하러 올 때나 수술 부위 거즈를 갈 때면 통증에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소리를 어찌나 크게 질러댔던지, 젊은 남자 선생님이 내게 농담을 던질 정도였다.

“이 병원 건물에 금 가면 너 때문이야.”

수술 후에도 나는 회복을 위해 병실에 입원해 있었다. 주로 6인실에서 지냈는데 하루종일 앉아만 있으니 심심했다. 만화책 보는 것도 질릴 정도였다. 앞자리에 입원해 있던 고등학생 형이 휴대용 플스로 재밌는 게임을 하고 있었다. 부러워서 계속 쳐다봤는데도 게임 한 판 시켜주지 않는 형이 야속했다.

한 달간의 입원 생활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갔다. 며칠 동안 왼발에 깁스를 한 채 목발을 짚고 등교했다. 깁스를 풀고 걸으려고 하는데 아뿔싸! 왼발에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다. 수술 기간 동안 왼발을 전혀 쓰지 않아서였다. 나는 제대로 걷지 못했고, 엄마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차츰차츰 왼발의 감각을 새롭게 느끼면서, 마치 갓난아이가 첫 걸음마를 배울 때처럼 다시 걸음마를 연습했다. 수술받은 왼발을 내려다보았다. 울퉁불퉁한 칼자국과 흉터가 남아 있었다. 새끼발가락엔 빨갛게 다른 색깔의 피부가 보였다. 이렇게 못생긴 발이지만 결국 내 발이다. 나와 함께 걷는다.


다시 즐거운 일상이 시작됐다. 문방구에서 피카츄 돈가스, 슬러시, 300원 컵떡볶이와 불량식품을 잔뜩 사 친구들과 나눠먹는 재미. 문방구 앞 게임기에서 ‘섹시 파로디우스’를 하던 기억도 선명하다. 첫 보스는 강냉이를 튀기는 옥수수 괴물이었고, 나는 붕어 캐릭터—레이저를 쏘는 사기 캐릭터—를 선택해 500원으로 한 시간씩이나 플레이할 수 있을 정도로 잘했다. 학교에선 공기놀이, 메이플딱지, 학종이 따먹기, 유희왕 카드처럼 놀거리가 가득했다. 반 친구들과 공포 만화책을 돌려보는 것도 유행했다. 빨간 마스크는 당시 최고의 호러 아이콘이었다. 모든 게 빛나는 추억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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