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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신이라는 착각

by 김건우

2008년, 나는 5학년이 되었다. 담임선생님은 중년의 여선생님이셨다. 그해 나는 학급 회장을 맡게 되었다. 하지만 카리스마 있게 다른 아이들을 이끄는 능력은 없었다. 아이들이 떠들 때 소리를 질러 조용히 시키기보다는, 같이 웃고 떠드는 쪽이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나에게 거는 기대가 컸던 것 같다. 그래서일까. 수업 종이 울렸는데도 다른 아이들을 앉히지 않고 같이 놀다가 자주 혼났다. 자주 혼나다 보니 그 선생님께 주눅이 많이 들었다. 선생님께 혼이 날 때 느꼈던 속상함이 마음 속에 남아있다. 지금 내가 남자 선생님이다 보니, 아이들이 나를 더 무서워할까 걱정되곤 한다. 그래서 ‘친구 같은 선생님’이 되려다 보면, 어느새 내 머리 위에 아이들이 올라와 앉아 있다.


5학년 어느 날, 학교에서 발명영재학급 학생을 선발하는 시험이 예정되어 있다고 했다. 어머니와 나는 한번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수학·과학 경시대회 문제집을 사서 풀어보았지만 정말 어려웠다. 도통 풀 수 있는 문제가 없었다. 이 정도 수준이라면 빵점을 맞을 게 분명했다. 다행히 실제 시험은 경시대회보다는 쉬웠지만, 만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중간, 기말고사와는 차원이 달랐다. 특히 수학은 지문이 어려워 문제 자체를 잘못 이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점수는 잘 기억나진 않지만, 수학은 반타작보다 조금 더, 과학은 딱 반타작 정도였다. 처음 받아보는 점수였다.


그래서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며칠 후, 어머니가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하시더니 기쁜 얼굴로 말씀하셨다. 내가 창용초등학교 대표로 뽑혔다는 것이다! 확실히 시험이 어려웠던 것 같다. 덕분에 창용초 대표로 발명영재 프로그램에 선발되었고, 매산초등학교에서 매주 금요일마다 발명교실 방과후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런데 사실 나는 그 수업에 가는 게 무척 싫었다. 금요일에 학교가 끝나자마자 버스를 타고 다른 학교로 이동해 2시간 가까이 수업을 듣는 건 힘들었다. 친구들과 놀 시간에 혼자 낯선 곳에 가야 한다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리고 ‘영재’라는 타이틀도 영 내 옷 같지 않았다. 나는 그저 평범한 머리로 열심히 공부했을 뿐, 다른 학교에서 온 아이들처럼 특출난 구석이 없었다.


어렵고 지루한 수업 속에서 결국 깨달은 건, 내가 과학과 발명에 큰 재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과학 실험 도구 냄새, 낯선 복도, 금요일 오후의 공기. 억지로 앉아 있었지만, 마음 한구석은 늘 멍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는 2025년. 내가 교사로 근무하고 있는 곳도 바로 그 매산초이다. 첫 발령지에서 3년을 근무하고 수원으로 관내 전보를 넣었다. 학군 분위기가 좋은 영통구를 희망했지만 떨어지고 매산초로 발령이 났다. 방과후 수업을 듣던 학교에 다시 돌아온 셈이다. 17년 만에 찾은 매산초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신관이 새로 지어졌고, 본관과는 구름다리로 연결돼 있었다. 교내 수목들은 봄꽃을 피울 준비를 하고 있었고, 학교 뒤편에는 아름다운 팔달산 자락이 펼쳐져 있었다.


이제 나는 6학년이 되었다. 보통 6학년이 되면 많은 학생들이 어린 티를 벗고 청소년기에 들어선다. 우리 반 담임은 젊은 여자 선생님이었다. 친절하지만 잘못을 저지르면 단호하게 혼내는 무서운 면도 있었다.


어는 날, 친구 두 명이 싸움을 벌였다. 한 명은 H였고, 그는 창용초 3짱으로 소문난 친구였다. 말 그대로 창용초 학생들 중 세 번째로 싸움을 잘한다는 뜻이다. 어떻게 모든 아이들과 싸워보지도 않고 서열이 정해지는지는 미스터리였다. 다른 한 명은 D였다. 순둥순둥한 성격과는 달리 엄청난 덩치를 가진 친구였다. 170cm에 달하는 키는 6학년 기준으로도 꽤 큰 편이다.

나는 D 집에 놀러가서 같이 게임도 하고 영화를 보며 지낼 만큼 가까웠기에, 마음속으로는 D를 응원했다. D는 큰 키에 살집도 있어서, H가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이기긴 어려울 것 같았다. 나는 그 당시 학급 회장이었지만,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싸움을 부추기기 바빴다. 점심시간에 학교 뒤편에서 맞짱을 뜨라고 것을 제안까지 했다. 원래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게 싸움 구경, 불 구경 아니던가.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예상대로 D가 초반에 밀어붙이는 양상이었다. 그러나 H가 괜히 3짱이 아니었다. 코피가 줄줄 나는데도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결국 D의 반팔 목이 쭉 늘어날 만큼 치열한 싸움이었다. 결과는 무승부. 하지만 개인적으로 D에게 판정승을 주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아이들이 교실에 들어오자, 담임 선생님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두 친구의 상태가 눈탱이 밤탱이였기 때문이다. 결국 그날 우리는 선생님께 다 같이 혼났다. 나는 반장이라는 이유로 가장 크게 혼났다. 선생님은 내 손바닥에 사랑의 매 10대를 때리셨다. 물론 양손 다 맞았다.


그 시절, 학교에서 주먹다짐이 흔했다. 거친 아이들이 많았고 싸움 실력으로 서열이 결정났다. 지금 아이들은 전반적으로 순해졌지만, 가끔 예외도 있다.


6학년은 내가 평생 가장 공부를 잘했던 시기였다. 당시 시험들은 유난히 쉬웠고, 1학기 중간고사에서 올백을 맞았다. 올백이라고 해봤자 국어, 수학, 사회, 과학-네 과목에서 모두 백 점을 맞은 것에 불과했다. 1학기 기말고사에서도 올백. 이쯤 되자 내 콧대는 하늘을 찔렀고, 친구들은 나를 ‘공부의 신‘이라며 치켜세워 주었다. 스스로가 영재는 아닐지언정, 수재쯤은 되겠거니 하는 착각에 빠졌다.

2학기 중간고사에서도 또다시 올백. 3연속 올백이었다. 이제는 천재라고 불러도 좋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대망의 2학기 기말고사까지 올백을 맞아, 나는 6학년 내내 시험에서 단 한 문제도 틀리지 않으며 전교에서 유명한 학생이 되었다.


이쯤 되니 공부는 내 자존심이 되었다. 그 무렵 감명 깊게 읽었던 책이 김현근 작가의 『가난하다고 꿈조차 가난할 수는 없다』라는 책이었다. 그는 가난을 딛고 영재학교에 입학했다. 수많은 영재들 사이에서 열등감을 느끼며 고군분투하다 결국 영재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하는 이야기였다. 나도 ’현근이 형처럼 열심히 하면 하버드도 갈 수 있겠다‘는 행복한 상상에 빠졌다. 그러나 독자들이여, 큰 기대는 마시라. 내가 공부를 가장 잘했던 시기는 바로 이때, 초등학교 시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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