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화초등학교에서 3학년 1학기를 맞았다. 담임은 젊고 활기찬 여선생님이었고,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특히 공부 잘하고 조용한 아이들을 예뻐하셨다. 그 영향이었을까? 나는 선생님께 인정받기 위해 수업도 열심히 듣고 공부도 했다. 결국 필기고사에서 반 1등을 차지했고, 친구들에게도 인정을 받아 학급 회장이 되었다. 말썽꾸러기였던 예전과는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러나 행복했던 안화초 생활은 오래가지 않았다. 또다시 이사를 가야 했다.
우리 가족은 수원 연무동에 있는 신미주아파트로 이사했다. 복도식 구조에 우리 집은 7층. 지금도 그 집에 대한 애정이 크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곳에서 스무살까지 거의 10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아파트의 준공년도도 1997년.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난 동갑내기 집이었다.
연무동은 참 살기 좋은 동네였다. 아파트 앞으로 광교산이 펼쳐져 있었고, 광교공원과 저수지는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매년 봄이면 관광객들이 모여드는 동네였다. 광교산 자락엔 음식을 잘하는 농원이 많았다. 주말이면 가족들과 도토리묵과 비빔밥을 먹었다.
나는 아파트 바로 뒤에 있던 창용초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집에서 1분 거리였지만 학교 가는 길은 즐겁지 않았다. 낯선 교실, 처음 보는 얼굴들, 익숙하지 않은 공기. 나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안화초등학교가 그리웠다.
3학년 말의 어느 날, 같은 반이었던 인성이를 등굣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다짜고짜 나에게 시비를 걸었다.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았고,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 분위기는 험악해졌다.
그러다 그가 뱉은 한마디—"세 손가락 장애인 새끼가."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본능적으로 그의 뺨을 후려쳤다. 누군가에게 그런 모욕적인 말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그렇게 때려본 적도 없었다. 뺨을 맞은 인성이는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눈물이 나오는 걸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남들과 달라서 이런 욕을 먹는 건가?’
억울하고 슬펐다. 내가 원해서 그렇게 태어난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의 뺨에 닿던 내 손보다, 내 뺨을 타고 흐르던 눈물의 감촉이 더 선명하다. 나는 어렵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니는 심각한 표정으로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했다. 그리고 학교에 잠깐 찾아와 쉬는 시간에 인성이를 좋게 타일렀다. 그 이후로 그 아이에게 그런 욕지거리를 다시 듣지는 않았지만, 그날의 상처는 서른 살을 바라보는 지금까지도 내 마음에 남아있다.
며칠 뒤 또 한 번의 일이 있었다. 동환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같은 반도 아니었지만, 그는 내 왼손에 대해 알고 있었다. 분명 인성이가 소문을 퍼뜨린 게 틀림없었다. 동환이는 등굣길에 내가 보이면 다른 아이들에게 내 왼손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야야 너 그거 아냐? 쟤 손가락 3개야.”
그 말을 들은 친구들의 반응은 제각각이었다. 별 관심이 없는 친구도 있었고, 정말인지 내게 확인하려고 내게 다가오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동환이에게 따져 물었다.
“야, 아무도 안 물어봤는데 왜 내 얘길 해?”
그러자 그는 갑자기 내게 헤드락을 걸었다. 학교 건물 앞, 친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당한 굴욕적인 헤드락이었다. 내 힘이 너무 약해 헤드락을 풀 수 없었고, 그 녀석은 내게 까불지 말라며 좀처럼 풀어주지 않았다. 나는 무력감과 수치심에 눈물을 한껏 쏟고 말았다. 하지만 이 사건은 부모님께 말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너무 부끄러워 스스로 별것 아닌 일이라 위로하며 넘기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게다가 나는 3학년 2학기 기말고사도 망쳐버렸다. 수학 문제를 세 개나 틀려 85점을 맞았다. 결코 나쁜 점수는 아니었지만, 안화초에서처럼 1등을 하기엔 부족했다. 그때부터 나는 점점 내성적이고 소심한 아이가 되어갔다. 누가 내 왼손을 볼까 봐 노심초사했고, 왼손은 꼭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체육 시간조차 싫어졌다. 준비운동을 할 때면 누군가 내 손을 보고 내 약점에 대해 알게될까 두려웠다. 왼손의 장애가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되는 비밀처럼 느껴졌다.
거친 아이들에게 장애로 놀림받았고, 학업에서도 나름의 작은 실패를 겪었던 3학년 겨울방학에는 조용히 울던 날들이 많았다. 나는 아직도 날 놀렸던 아이들을 용서하지 못했다. 그래서일까. 난 장애 학생이나 외국인 학생에게 못된 행동을 하는 학생들을 따끔하게 혼내는 편이다. 평소에는 널널하게 풀어주는 자유방임형 담임에 더 가깝다. 하지만 1년에 한두 번은 옆 반 선생님들이 깜짝 놀랄 정도로 사자후를 내지를 때가 있다.
장애 학생의 외모에 대해 함부로 말하거나 외국인 학생을 피부색으로 차별하는 경우가 그렇다. 놀린 친구는 그저 장난이라고 이야기하지만 그 장난이 가슴 속 상처로 남아 오랜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다.
내가 학교에서 장애로 놀림을 받자 우리 부모님은 많이 걱정하셨을 것이다. 아버지는 항상 세상은 냉혹한 곳이고, 너는 장애 때문에 더한 차별을 받을 수도 있다며 걱정하셨다. 그리고는 건우, 너는 공부 머리가 있으니 꼭 판검사가 되라고 말씀하셨다. 그 당시 부모님의 자식 희망 직업 1순위는 법조인이었다. 어머니 역시 법조계는 신체적 장애로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셨고, 나는 으레 학교 장래희망란에 판검사를 적어냈던 것 같다. 판검사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말이다.
어머니는 교육열이 높았다. 매 학기가 시작되면 엄마와 함께 서점에 가서 초등학교 전과를 샀다. 엄마와 함께 교과서를 예습하고 학교에 갔다. 그러다 보니 학교에서 배우는 내용은 이미 알고 있는 경우가 많았고, 나는 발표를 자주 했다. 엄마는 포스트잇에 중요한 교과 개념을 적어 교과서에 붙여주시기까지 했다. 학교 선생님은 포스트잇으로 뒤덮인 교과서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내가 이 사실을 전달하면 우리 엄마는 은근히 뿌듯해하시곤 했다.
4학년이 되자 우울했던 학교 생활이 나아졌다. 새롭게 만난 친구들과 금세 친해졌고, 같은 반 학생들의 어머니들끼리도 서로 친하게 지내셨다. 덕분에 나는 친구들 집에 놀러 다니면서 행복한 일상을 되찾았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시험성적도 반에서 1등을 차지했다.
이 무렵, 어머니께서 나를 수영장에 보내셨다. 수원 우만동에 위치한 장애인체육센터였다. 그곳에서 약 1년 동안 수영을 배웠다. 수영을 배우는 것은 쉽지 않았다. 빼빼 마른 체형에 나는 처음엔 물 위에 뜨는 것조차 버거웠다. 왼팔에 힘이 없으니 헤엄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처음 몇 주는 그저 물 속에서 허우적대며 ‘음-파’, 호흡 연습만 했다. 그래도 매주 수요일마다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수영장을 찾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물과 친해졌다. 호흡법, 자세, 팔 젓기, 발차기—하나하나 몸에 익혀가며 1년쯤 지나자 어느 정도 수영이라고 할 만한 자세가 나오기 시작했다.
수영은 힘든 운동이었다. 무엇보다도 에너지 소모가 엄청났다. 수영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늘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밥 두 그릇을 뚝딱 해치울 정도였다.
5학년이 되고나서 수영을 그만두었다. 그렇게 수영장은 내 일상에서 멀어졌지만, 몸이 기억한 감각은 사라지지 않았다. 교육대학에 진학해서 수영 과목을 들을 때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교대에서 필수 과목과 교양 수업으로 수영을 두 차례 들었는데, 모두 A+를 받았다. 물속에 들어가니 어릴 때 익혔던 호흡과 동작이 자연스럽게 되살아났다. 오랜만에 수영을 하다보니 금세 지치긴 했지만, 그 감각만큼은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몸이 먼저 기억하는 기술이 있다는 걸, 수영을 통해 처음 실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