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는게 미덕인줄 알았다.
"하나하나 다 맞서면서 살 수는 없어. 지연아, 그냥 피하면 돼. 그게 지혜로운 거야."
"난 다 피했어.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게 됐어.
눈물은 줄줄 흐르는데 가슴은 텅 비어서 아무 느낌도 없어."
최은영 소설 『밝은 밤』 중
어머니는 삶의 고통을 피하는 것이 ‘지혜’라고 믿으며 살아왔다.
그러나 지연은 그런 삶이 결국 감정을 잃어버리는 삶으로 이어졌다고 하였다.
삶의 어려움을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피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여겼던 세대를 살았다.그리고 그 방식을 그대로 물려받은 다음 세대. 나 또한 그 삶을 살아왔으며
참는 것이 미덕이라 여겼던 세대이다.
"하나하나 맞서면서 살 수는 없다"는 생각을 당연하게 여기며 살아왔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목소리를 내는 것조차 버릇없고 건방진 행동으로 여겼다.
논쟁의 중심에 서는 것이 두려웠고, 그래서 피하는 것이 더 편하였다.
내가 그렇게 살아왔고, 나의 아이들에게도 같은 방식으로 가르쳤다.
학교에선 발표 잘하고 똑똑한 아이로 커주길 바라며 다투지 말고 논쟁하지 말고 화나면 참아야 하고 싸우지 말고... 하지 말고를 얼마나 강조했던가. 똑똑하고 잘난 아이로 커주길 바라면서 너무 나서지 말라.
그렇게 키운 아이들은 어땠을까? 가슴이 먹먹해진다.
피하는 삶이 남긴 것들
살면서 부딪히지 않는 것이 과연 지혜로운 일일까?
시집살이를 하면서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 아니라 수년을 그렇게 살았다.
내 안의 불뚝 불뚝 쏟아 나는 감정조차도 숨기고 회피하며 자존감은 바닥을 치며 공황으로 이어졌다.
아이들에게 집착했다. 그것도 첫아이에게 , 잘난 아이로 키우겠다는 명목으로 집착과 패악질을 일삼았다.
"나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핑계이다. 어쩌면 나의 힘듦을 아이를 통해 보상받으려 했던 것이다.
나는 나와 다른 삶을 살기를 바라며 아이를 닦달하고 몰아쳤다.
하지만, 어쩌면 나 자신에게 끊임없이 찾아오는 감정들과도 맞서지 못하고 시집살이를 회피하려 아이에게 집착했는지 모른다.
피하는 것이 정말 지혜로울까?
참는 것이 미덕이었을까?
오늘의 필사 내용 중 지연의 말처럼
"엄마, 그래서 이렇게 됐잖아. 내가 무슨 기분인지도 모르게 됐어."
맞다 내가 그랬다.
고통을 회피하는 것은 순간적으로는 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살다 보면 감정조차 잃어버린 채 텅 빈 마음만 남게 한 된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직도 난 감정을 끄집어내는 일이 익숙하지 못하다.
부족한 내가 , 아이들에게 내 방식대로 이래라저래라 누르는 법을 알려 주었다.
내 아이들은 나와 다른 당당 함으로 세상과 부딪치며
사람들 속에서 자신을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인이 되길 바란다,
살면서 부딪히는 것과 피하는 것의 균형은 어디쯤일까?
그 답을 찾는 과정이 어쩌면 인생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