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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자전거

옥수숫대 먹어본 사람?

by 은빛지원

종갓집에 태어난 우리 형제들은 집 밖에만 나가면 비슷한 또래의 아줌마, 아재들이 많았다. 심지어 태어나지 않은 할아버지도 있었으니 말이다.

할아버지는 삼형제셨다. 작은할아버지들의 자식들은 나에게 당숙이 되는 셈이다. 예전에는 항렬을 정해 놓아, 아버지 돌림자를 쓰는 사람은 아재로, 할아버지 돌림자를 쓰는 사람은 할아버지로 불렀다. 친고모들과도 나이 차이가 거의 없었다.

아버지가 큰집 장남이다 보니 작은할아버지들과의 나이 차이가 크지 않았다. 자식들이 많던 그 시절, 아버지의 자식들인 우리는 태어나기도 전에 당숙들이 생겨난 셈이다.

동네엔 황 씨 성을 가진 집이 많았다. 엄마는 혹여 우리가 싸움이라도 할까 걱정이 되어 늘 말하셨다. “주변엔 다 아줌마, 아재들이니 말조심, 행동 조심해라.” 복잡한 촌수 속, 나이 어린 어르신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옆집에는 나보다 두 살 아래 당숙 아재가 있었다. 그 아재는 우리 집에 와서 놀다가 갈 때면 우리 형제들을 약 올리고 튀었다. 언니도 동생도 순둥이어서 그냥 넘겼지만, 맨발로 대문까지 우다닥 쫓아 나가는 건 나였다. 잡히면 죽는다는 마음으로 뛰지만, 대문 밖은 못 나간다. 거기까지가 한계다. 엄마는 그 장난꾸러기 아재를 ‘짜증 도련님’이라 불렀다.

아주 어릴 적 이야기다. 대략 일곱 살쯤이었을 것이다. 나보다 한 살 더 먹은 고모들과 당고모들은 다음 해 국민학교에 입학해야 했기에 단체로 보건소인지, 학교인지 간다고 했다. 어른들도 없고, 조용한 동네에 당숙아재와 나만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당숙아재는 울고 불고 생떼를 부렸다. 나는 아재를 달래보려 낫을 들고 텃밭으로 향했다. 그 시절엔 옥수수대를 잘라 껍질을 벗기면 달달한 간식이 되곤 했다. 아마 어른 흉내를 내고 싶었던 것 같다.

옥수수 나무 맨 밑동을 자르려 낫을 내리치는 순간, 내 오른쪽 새끼발가락을 베어버렸다. 여름이라 맨발이었을 것이다. 기억은 거기서 멈춘다.

아버지가 자전거에 나를 태우고 안배미 논길을 달렸다. 예전 시골엔 의사는 아니지만 약도 팔고 치료도 해주는 분들이 계셨다. 어른들은 그분을 ‘의상’이라 불렀다. 그분은 갑오징어 뼈 같은 걸 갈아 상처에 뿌려 지혈해 주셨던 기억이 있다.

지금도 내 오른쪽 새끼발가락엔 그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아팠던 기억이나 자세한 정황은 잘 떠오르지 않지만, 아버지와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그 장면은 생생하다. 그게 아버지와 나의 유일한 추억이다.

나는 열 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 이전의 기억은 거의 없다. 아버지는 집보다 외부 일을 많이 하셨고, 집엔 손님이 많았던 것 같다. 건강이 악화되신 이후엔 집에 누워계셨는데, 그때 언니와 고모는 학교에 가고, 동생들은 어렸기에 나에게 다리를 밟으라고 자주 하셨다.

지금도 생각난다. 아버지의 다리는 살이 없고 많이 가늘었다. 아플까 봐 살살 밟았는데, 그 다리 밟기가 끝나면 아버지는 벽장 속에서 단팥빵 하나를 꺼내 주셨다. 아마 본인이 못 드시니 숨겨두셨던 듯하다.

36세, 너무 짧은 생이었다. 자식들에게 많은 추억을 남기지 못하셨다. 아버지와의 추억 보따리를 풀어보려 해도, 너무 없다. 나보다 세 살 많은 언니에겐 더 많은 보따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7살, 5살, 3살, 그리고 유복자인 막내 동생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려온다.

우리 집 대청마루엔 군복 입은 아버지 사진이 걸려 있었다. 추억은 없지만, 사진 속 아버지를 보며 나는 세상에서 제일 멋진 분이 우리 아버지라며 자랑스러워했다.

아버지 없는 딸.

6학년 담임 선생님은 방과 후 오르간을 치며 나에게 자주 노래를 시키셨다. 그때는 내가 노래를 잘해서 그런 줄 알았다.

어머니날이었을까. 전교생이 모인 자리에서, 운동회 때 입었던 흰 저고리와 파란 치마를 입고 무대에 올랐다. 선생님이 정해주신 곡은 ‘꽃밭에서’였다.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마 나는 많이 떨렸을 것이다. 어리바리하고 야무지지 못했던 내가, 교단에 올라 노래를 부르며 실수를 하고 말았다.

“애들하고 재밌게 뛰어놀다가”를 “아빠하고 재밌게 뛰어놀다가”라고 부른 것이다.

놀랐지만, 끝까지 부르고 내려왔다. 실수한 자신이 너무 부끄러웠고, 자신감 없는 나는 그 작은 실수에 쪼그라들었다.

몇 년 전, 심리치료를 받으며 어릴 적 가장 부끄러웠던 기억을 적다 보니 이 일이 떠올랐다. 누군가 그때 "괜찮아. 잘했어."라고 위로해주었다면 기억조차 없을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어린 내 안의 나에게 말해준다.

“괜찮아. 실수했지만 끝까지 잘 불렀잖아.”

그리고 나중에 알았다. 6학년 담임선생님은 아버지 없는 나에게 자존감을 키워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꽃밭에서’를 왜 부르게 하셨는지도, 이제야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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