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드라마 주인공이었다
처녀농군 <최정자 노래>
홀 어머니 내 모시고
살아가는 세상인데
이 몸이 처녀라고 이 몸이 처녀라고
남자 일을 못 하나요
소 몰고 논 밭으로 이랴 어서 가자
해 뜨는 저 들판에 이랴 어서 가자
밭갈이 가자
홀로 계신 우리 엄마
내 모시고 사는 세상
이 몸이 여자라고 이 몸이 여자라고
남자 일을 못 하나요
꼴망태 등에 메고 이랴 어서 가자
해 뜨는 저 들판에 이랴 어서 가자
밭갈이 가자.
이 노래를 아는 사람은 아마도 60년 전후에 태어난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창고 속 깊숙한 곳에 존재조차 모르고 있던 앨범을 꺼내듯, 스무 살의 나, 처녀 농군이었던 시절을 회상하다 보니 이 노랫말이 떠오른다.
지난 글을 읽은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같은 세월을 살았는데 도대체 그 얘기는 어느 세월 이야기냐며 묻는다. 맞다. 동시대를 살았어도 서울 사람은 모를 이야기다.
흑백텔레비전과 가끔 두드려야 소리가 들리던 박스만 한 트랜지스터 라디오, 안테나 방향을 돌려가며 들어야 했던 그 시절의 노래였다.
‘처녀농군’은 좋아하는 노래도 아니고 입 밖으로 불러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농사일이 너무 힘들고 내 꼴이 흑두루미처럼 되어갈 무렵, 나도 모르게 흥얼거리게 된 노래였다.
스멀스멀 자존감이 낮아질 때, 아무도 모르게 내 안에서 나를 끌어올려주는 힘이 되어줬던 노래. 홀어머니 내 모시고…
아마도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토닥이며 위로하기 위한 나만의 노래였을 것이다. 모노드라마 주인공처럼, 나만의 드라마를 그렇게 써가고 있었다.
사람은 추억을 먹고 산다더니, 유별나게 오래된 기억들을 나는 쓸데없이 잘 기억해낸다. 어릴 적 초등학교 시절의 에피소드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수십 년이 지난 기억들을 어떻게 기억하느냐고? 아마도 좋은 기억은 자존감이 살아나는 기분 좋은 추억으로 남고, 좋지 않은 기억은 지우고 싶지만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것 아닐까.
학교를 졸업하면 모두 도회지로 나가는 시대에, 나는 내 발로 농사짓겠다고 시골에 내려앉았다. 내려놓아야 했던 것들에 대한 아쉬움과 부러움이 왜 없었겠는가. 하지만 슬프지 않으려, 외롭지 않으려 씩씩한 척 겉포장을 잘하는 연기자였다.
나는 늘 씩씩한 여장부였다. 그렇게 보이길 원했고, 그렇게 연기했을지도 모른다.
보시요들~ 나는 말이지, 부족해서 취직 못해서 시골에서 농사짓는 처녀가 아니랍니다!
누가 뭐라 했냐고? 사실은 아무도 그런 말 한 적 없다. 하지만 나 스스로 자존심의 깃을 세우려 했던 거다. 내 나름 폼나는 농사꾼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 시대엔 시골에서 농사짓는 처녀라는 시선이 마음속 어딘가를 건드렸던 것 같다.
그래서 늘 얼굴을 단장하고 일터로 나갔다. 보여줄 사람도, 봐주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게 자존심이었다.
라디오는 내 친구였다.
80년대, 그 시절 DJ들의 목소리를 사랑했다. 2시의 데이트 김기덕, 김광한의 팝스다이얼, 이종환의 '밤을 잊은 그대에게'.
팝송을 많이 틀어주던 라디오는 나의 유일한 벗이었다. 밭고랑을 옮겨 다니며, 존 바에즈, 에릭 클랩튼, 스모키, 아바, 사이먼&가펑클, 보니 엠을 들었다. 농사꾼 처녀에게 음악은 유일한 위로였다.
아~ 나는 처녀 농군이었지.
할아버지는 대문간에 들어서면서 늘 나를 부르셨다. 관정에 나가 물이 잘 나오는지, 석유가 떨어졌는지 보고 오라고 하셨다.
“천수답에 건답직파.” 관정에 쓰여 있던 문구다. 하늘만 바라보는 땅은 비가 오지 않으면 농사를 지을 수 없다. 그래서 지하수를 끌어올리는 물 방앗간이 필요했다.
관정에선 하루 종일 물을 뿜어냈고, 나는 자전거를 타고 기계를 확인하러 달려갔다. 시원한 물이 콸콸 나오는 모습에 기분 좋은 통쾌함을 느꼈다.
40~50년 전 시골 이야기다. 전기도 들어오지 않아 등잔불에 의지하던 시절. 전깃불이 초등학교 6학년 때쯤 들어왔다.
할아버지는 누에를 키우지 않게 되면서 뽕나무를 다 캐어냈다. 경운기도 있었지만, 왜인지 소에 쟁기를 걸고 밭으로 나가셨다.
소가 말을 안 들었는지, 나에게 코뚜레 줄을 잡고 앞에서 소를 끌라고 하셨다. 이 난감한 상황, 거역도 못 하고 눈물 머금고 스무 살 처녀는 소를 끌었다.
할아버지는 뒤에서 채찍질을 하며 "이랴~ 이랴~" 외쳤다. 80년대, 경운기도 있었고 소를 거의 쓰지 않던 시대였다. 그럼에도 처녀에게 소몰이를 시키셨다.
집에 와서 엄마에게 화를 냈다. 막아주지 못한 엄마에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을 것이다.
그건 딱 한 번의 일이었지만,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날의 모습은 생생하게 기억난다.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으니, 나도 이제 진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지금 돌이켜보면, 할아버지는 경운기보다 소가 편하셨던 것 같기도 하다. 혹은 소가 초보라 훈련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셨을지도.
무섭기만 하던 할아버지와 농사일 하며 쌓인 추억이 참 많다. 나 혼자 가슴속에 묻어두었던 지난 시절의 이야기들을 꺼내 보며 생각한다.
지금의 나, 겁대가리 없이 도전하는 이 성격도, 어쩌면 우리 할아버지 덕분이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