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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지는 것과 남겨지는 것

추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by 은빛지원


오늘의 필사

윌리엄 셰익스피어 소네트,

<내 그대를 여름날에>

"모든 아름다움은 언젠가 시들고

우연이나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모습이 퇴색할 테지만

그대의 영원한 여름만은 시들지 않고

그대의 아름다움과 함께 영원하리니"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되었다. 겨우내 실내에서 보호받던 식물들은 이제 밖으로 나갈 준비를 한다. 따스한 바람을 맞으며 햇빛을 머금고 다시금 생명을 틔울 것이다. 내 뜨락 정원에도 곧 봄꽃들이 피어나겠지. 하지만 새로운 꽃이 피어나기 위해서는 먼저 겨울의 흔적을 정리해야 한다. 추위에 시들어버린 나뭇가지들을 다듬고 말라버린 잎들을 걷어내야 비로소 새로운 생명이 움틀 수 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지 않은가 싶다. 한때는 생기발랄하고 아름다웠던 날들이 있었지만, 어느새 우리는 계절을 따라 서서히 겨울을 맞이한다. 그러나 봄이 만물의 소생이라면, 우리의 삶도 그렇게 다시금 피어날 수 있지 않을까.

어제, 나는 친정집에 다녀왔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곳. 아마도 백 년은 족히 넘은 집이다. 몇 번의 리모델링을 하며 살아왔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사라질 차례다. 새집을 지었고, 곧 철거를 하기로 했다. 빈집에 버려질 것들만 남아 있는 집을 둘러보며 지난 시간들을 떠올렸다.

이 집은 나의 어린 시절을 품고 있다. 할아버지의 손때가 묻은 오래된 물건들, 내가 뛰놀던 마당, 창문 너머 보이던 풍경까지. 그 모든 것이 사라진다 해도, 그곳에서의 기억만큼은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손으로 만져지고 눈에 보이던 것들은 사라지지만, 마음에 새겨진 추억은 그대로 남는다. 나의 옛집은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추억은 기억 속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우리는 늙고 변해가도 사랑과 글은 순간을 영원히 남긴다. 오래된 집이 사라져도 그곳에서의 기억이 내 안에 살아 있듯이, 글이란 것도 그렇다. 내가 떠난 후에도 내 삶의 조각들은 이렇게 글로 남아 누군가에게 닿을 것이다. 사라지는 것과 남겨지는 것. 그 경계에서 나는 다시금 봄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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