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름 우리만의 네버랜드
오늘의 필사
제임스 매튜 배리, 『피터 팬』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된다. 한 사람만 빼고.”
피터팬은 어른이 되지 않기로 한 아이였다. 오늘 이 문장을 마주하자,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났다.
예순이 훌쩍 넘은 나도 어른이 되었지만, 내 마음속엔 아직 열세 살짜리 피터팬이 살아있다.
기억의 문을 열어본다. 농촌의 여름은 먹을 게 천지였다. 들판엔 오이, 토마토, 참외가 널브러져 있었고,
그중 몇 개쯤은 살짝 따 와도 누가 뭐라 하지 않았다. 소심한 나는 그저 언니 오빠들 뒤에 숨어,
한입 가득 베어 무는 장면을 재미있게 구경하곤 했다. 우리 마을은 유난히 장난꾸러기 오빠들이 많았다.
물 맑은 냇가는 우리의 놀이터였다. 개울물엔 붕어, 송사리,. 도랑물엔 미꾸라지 넘쳐나는 천국이다
철엽 하기 딱 좋은 계절이었다. 솥단지 하나, 고추장 한 주걱, 밀가루 한 봉지, 국수,대파랑 풋고추까지 챙기면 준비 끝. 고기잡이 체까지 들고 우린 냇가로 달려갔다.
붕어는 냇물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미꾸라지는 도랑물 밑에 숨바꼭질하듯 숨어 있었다.
한쪽에선 발을 첨벙첨벙 구르며 미꾸라지 몰이를 하고 반대편에선 체를 들고 받을 준비를 한다.
미꾸라지에 소금을 뿌리면 펄쩍펄쩍 뛰고, 거품을 뿜어내며 마지막 발악을 했다.
조금 미안했지만, 우리에겐 그게 만찬 준비였다. 커다란 돌 위에 솥단지를 올려 철엽국을 끓이기 시작했다.
고추장을 풀고, 야채를 듬뿍 넣고, 손으로 찢은 수제비와 소면을 넣어 바글바글 끓이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철엽국 완성! 모래바닥에 주저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마시던 그 맛! 지금 생각해도 군침이 돈다. 어죽인지 매운탕인지 이름은 몰라도 우린 ‘철엽국’이라 불렀다.
그건 우리만의 이름이었고,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맛이었다.
여름밤에 하는 철엽이 있다. 하이라이트는 뭐니 뭐니 해도 ‘횃불’이었다. 면으로 된 헌 옷을 돌돌 말아 철사에 감고, 석유에 푹 적셔 불을 붙이면 우린 순식간에 불빛 전사로 변신했다. 불이 꺼지지 않게 석유를 살짝살짝 더 묻혀줘야 했고,텀벙 담그면 불이 꺼져버리는 건 필수 상식! 묘한 스릴과 요령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어스름 냇가에 불빛이 일렁이고, 매캐한 연기와 함께 웃음소리가 퍼졌다. 그 밤, 그 냄새, 그 기운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서 반짝인다. 솥단지를 들고, 횃불을 들고 냇가로 향하던 우리들은 마치 모험 영화 속 주인공 같았다. 나는 맨 뒤에 쫓아가는 졸병이었지만, 고추장 한 주걱과 밀가루는 우리의 무기였고,
솥뚜껑은 방패였으며, 우린 누구보다 당당하고 신났다.
생각해 보면, 철엽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그건 세상이 온통 우리 것 같던 순간이었고 우리만의 세상을 만들어 가던 놀이였다장마철엔 미꾸라지가 더 많아졌다. 비가 오면 “미꾸라지 잡으러 가자!”라고 외치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내키지 않아도 끌려가곤 했는데, 가보면 또 그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미끄러운 도랑물 속에서 친구들이 미꾸라지를 낚아채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코믹한 한 편의 영화 같다.
이따금 추억의 책장을 펼쳐본다. 피터팬이 되어 어린 시절의 나를 다시 만나고,그때의 냄새, 햇빛, 소리를 떠올리며 웃는다. 추억은 참 묘하다.지금의 나를 따뜻하게 끌어안아 주는 인생의 조미료 같은 존재다.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 하지만 그 기억은, 어쩌면 내 안의 피터팬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나는 가끔, 아주 가끔, 그 아이와 함께 다시 철엽 냇가를 걷는다.
여름날의 햇살과 비릿한 내음, 친구들의 웃음소리와 횃불 타는 냄새…
그 모든 것이 내 안의 네버랜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