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붙잡아준 100일의 기록
빅터 프랭클 에세이,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할 것이다.
『더 나은 어휘를 쓰고 싶은 당신을 위한 필사책』을 펼친 1월 3일,
그날부터 오늘까지 단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을 만년필과 함께 시작했다.
졸린 눈을 비비며 한 줄 한 줄 베껴 쓰는 시간이 어느새 내 하루의 의식이 되었고,
나를 붙잡아 일으키는 힘이 되었다. 오늘은 필사 100일째 되는 날. 만년필을 내려놓는 순간,
뭔가를 끝냈다는 후련함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이 시간들에 대한 아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단순히 글자를 옮겨 적는 일이 아니었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흔들리는 마음을 붙들었고,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단단해졌다.
100일의 마지막 날,
나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필사했다.
얼마 전 오디오북으로 여러 번 들으며 마음 깊이 새긴 문장들. “삶이 우리에게서 모든 것을 앗아가도,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자유만큼은 빼앗을 수 없다.” 프랭클은 말한다.
인간은 아무리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왜 살아야 하는가’를 알 수 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견딜 수 있다고. 나도 그 말처럼, 이 100일의 시간 속에서
내가 왜 이 글을 쓰는지, 왜 이 시간을 견디는지를 되새기며 걸어왔다.
어떤 날은 무기력했고, 어떤 날은 울고 싶었지만, 그래도 다시 일어선 건 매일 아침의 필사 덕분이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찾아낸, 아주 작고 단단한 의미들이 있었다. 끝끝내 희망을 지켜낸 수용소 사람들처럼,
나도 내 삶 속에서 불씨 하나를 끝까지 놓지 않고 살아가고 싶다.
100일 동안 나를 살게 했던 그 한 줄 한 줄처럼.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도, 하루 한 줄의 조용한 사각거림을 권하고 싶다.
어쩌면 그 사각거림 속에서 당신을 붙잡아 줄 단단한 이유 하나가
피어나기 시작할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