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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에 대한 열정이 담긴 글

글쓰기는 전략이 중요하다

by 메리골드

2021. 11월 한 권의 책 테디 웨인의 APARTMENT를 읽고


“빌리와 ‘나’와의 문학에 대한 열정이 담긴 이 책은 내 눈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내가 전에 읽은 [APARTMENT]는 테디 웨인은 소설이다. 그는 소설가로 파이팅 작가상을 수상한 작가이며 전미예술기금 문예창작 펠로십에 선정되었다. 또한 영 라이언스 소설 상, 펜/빙엄상,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문학과 관련되어 대학에서 주는 상일 것이라는 추측을 함) 데이턴 문학평화상 최종 후보에도 올랐다.


또한 작가님은 컬럼비아대학과 세인트루이스 워싱턴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뉴요커] [뉴욕 타임스] [맥스위니스](1998년 하나의 아이디어로 시작해서 출판에 대해 전무한 사람들이 모여 만든 계간지)에 정기적으로 기고하고 있다. 또한 [조니 밸런타인의 사랑 노래] [외톨이] 등의 작품도 썼다. 지금은 브루클린에서 살고 있다.



처음 이 소설을 읽었을 때, 글을 쓰는 작가의 삶을 다룬 작품이라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글쓰기 수업을 하는 독자 거나 글을 지금 쓰고 있는 작가, 또는 전략적 글쓰기가 안 되어 머리가 온통 하얘지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저마다의 고통을 해소하기 위해 한 번쯤 읽어나가야 하는 작가들을 위한 필수 책 읽기 코스가 아닐까 한다. 이 글의 시대는 1996년이며 화자는 컬럼비아대학 순수예술 석사과정에 등록한 남자 작가 지망생이다. 그리고 그의 동료인 빌리는 자신의 아파트에서 집세를 내지 않고 살 기회를 얻은 운 좋은 사람이다.



소설의 초반부는 아무 일이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 지망생들의 일상의 삶을 열거했을 뿐 불운하지 않게 보인다. 하지만, 두 주인공의 관계가 권력, 계급, 남성성에 관한 질문들을 만들어 내면서 내용이 점차적으로 급반전된다. 소설의 초반부는 우정을 다루고 있고 중반부에는 글을 써 나가는 동안 보통 작가들이 겪는 시련, 그리고 마지막 후반부에는 급반전이 되어 둘 사이에 우정에 금이 가고 만다.

그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가슴속에서 이런 말들이 쏟아져 나올 뻔했다. “아뿔싸! 이래도 되는 거야? 너무 오버 액션 아니야! 꼭 이렇게 해야겠어? 결말을 도출하기 위해” 테디 웨인식 복수는 글 속의 빌리를 강물 속에 잠수시키고 이 땅에 발을 못 딛게 만들 정도로 극악무도한 반전이다.

아메리칸 스타일, 친밀했다가 분노를 삼키고 볼케이노처럼 돌진하는 엄청난 변덕, 무너지는 우정, 금이 가는 작가의 정신, 맨 정신으로는 인정할 수 없는 잔인함의 기교가 가끔 읽은 모 일본 소설의 기교와도 비슷한 구석이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테디 웨인은 자신의 독자들을 몰입하게 하고 섬광처럼 번쩍 정신이 들게 하는 명장면을 연출한다. 바로 이 대목을 주목하라. 소설의 후반부는 대반전의 역사다. 페이지 256의 밑에서 끝부분을 보면 이런 문구가 독자들의 마음을 회오리바람 속에 가두고 있다. ‘아마도 줄거리를 짜는 일에 병적으로 집착해 온 까닭에, 나는 한 사람이 별것 아닌 실수로 인생의 행로에서 탈선하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도로 연석에서 일 초 일찍 내려선다거나, 안고 있던 누군가의 아기를 실수로 떨어뜨린다거나-’

소설이지만,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상이다. 작가의 상상력이 만든 공간에 사람이 죽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고 다치기도 하고 무시무시하게 되거나 치명적인 운명이 된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이 대목쯤에서 학창 시절 영문학을 공부하면서 애드가 앨런 포우의 검은 고양이 장면이 섬뜩하게 떠올랐다. 테디 웨인이 평소 괴기스러운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가끔 소설처럼 현대인들과 심지어 어린아이들조차도 일상에서 뭔가 괴기스럽거나 현실에서 벗어나 있으면 하는 일들이 일어나길 바라는 눈치다.


이때 모든 작가들은 저 불쌍한 인류를 구원이라도 해 주고 싶은 눈치다. 그래서 별 볼일 없는 나를 구원해 줄 또 다른 장치인 동일시 캐릭터를 만든다. 그리곤 그가 마치 슈퍼맨이라도 되듯 글을 통해 구원의 통로를 만든다.



그런데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글도 역시 복잡하게 얽힌다. 얽힌 삶은 풀어야 제맛이다. 다들 글을 통해 대리 만족을 얻고자 한다. 그 대리 만족을 해 주는 역할이 바로 글. 그런 의미에서 독자들은 은근히 글에서 손을 놓지 못한다.


그래서 작가는 위대한 일을 하듯 이런 멋진 한 편의 글을 써야 하고 독자는 그런 멋진 글을 마치 무슨 의무인 듯 읽는다. 다시 소설로 들어가면 내용이 이렇다. 주인공은 자신의 아파트에서 빌리와의 동거의 삶을 살아간다. 말이 동거지 그건 거의 경쟁의 바로미터. 그 경쟁이라는 타이틀을 놓고 글쓰기로 삶을 저울질하는 작가들의 삶은 온통 헝클어진 머리 타래처럼 복잡한 뇌의 구조를 지니며 서로 아웅다웅 사며 살아가게 만든다.


아파트라는 한 공간에서 자신의 글과 타인의 작품을 저울질하는 젊은 예술인의 고뇌를 생각해 보라. 고독하고 극단적인 방어적인 자아를 엿보아라. 그 지독한 좁은 공간인 그 현실 속에서 무언가 새로운 세상을 나아가고 싶어 단단한 껍질을 깨는 저 작가들의 고뇌를 그려 보아라. 저들은 끊임없이 뭔가를 구상하고 만들고 그 껍질 안쪽에 때로는 숨고자 한다. 그런 반등의 남성성이 그려진 곳이 바로 아파트다.


원래는 선했던 주인공이 어느 순간 자아를 내던지고 자신의 친구의 피 땀 어린 원고를 빼앗고 불 질러 버려 잠수시켜 버리고 침잠해 버리고 싶은 그 묘한 행동이 점차로 인간의 타락과 욕망을 그대로 반영해 준다. 그리고 너무나 연약한 자아를 면면히 들여다보게 한다.


이 아파트의 주 무대는 주로 미국. 미국이라는 작가님이 이 글을 자신의 룸에서 썼을 것을 생각하던 날 전에 화상 영어를 하면서 연결된 뉴요커 아줌마인 칼라라는 60대 중반의 긴 회색 머리를 질끈 묶은 흑인 원어민 강사가 생각났다. 그녀의 아파트는 뉴욕. 그녀는 무척 단아하고 화장기 없는 수수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뭔가 수그린 채 눈을 마주하지 않는 그녀의 표정에서 조금은 차가운 뉴욕의 맞바람을 볼 수 있었다.

같은 무대인지 다른 무대인지 모르지만 테디웨인이 쓴 소설 속 주인공이 사는 아파트는 분명 광기가 다분했다. 내가 읽은 웨인의 소설 아파트는 마치 뉴욕 현지인과 스피커를 통호하듯 거대한 맹견의 소리처럼 소설의 거친 장면이 내 옆에서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중년의 칼라는 가끔 화상 통화를 할 때 애완견 소리를 듣게 만들었다. 그런데 보통 소리가 아니었다. 거대한 광음. 엄청난 괴기스러운 사냥개 정도의 소리였다. 그런데 그 소리가 [ 아파트먼트] 속 두 주인공이 같은 건물에 살면서 서로 마치 글로 으르렁 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보통 원어민 샘들은 이야기를 들어 보면 뱀을 삼십 마리 키운다. 고양이도 세 마리를 더 키우고 있다는 둥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많다. 독자였던 나는 소설 [아파트먼트]를 읽으면서 진짜 뉴욕의 삶이 궁금했다. 웨인이 사는 뉴욕, 그리고 중년의 칼라가 사는 뉴욕. 그리도 이름 모를 또 다른 작가들의 성지인 뉴욕.


그 뉴요커인 칼라는 그 당시 우리 한국의 추석과 전통시장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또한, 내 나이와 비슷해서 인지 뉴욕의 물가와 그들의 건강에 대해 알려 주었고 나는 저들에게 재래시장에서 내가 무얼 하며 추석이 어떤 명절인지 알려 주게 되었다.

[아파트] 란 소설을 읽으면서 내 또래 나이의 감성을 가진 웨인과 같은 멋진 작가를 만나게 되어 너무 좋았다. 글이란 참 묘한 매력이 있다. 보지 못하지만 글로서 또 다른 아파트 문화를 보게 되니 말이다. 영어권 작가의 글을 마치 영화처럼 짜임새가 비슷하다.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공동 지역에 어울려 같은 방을 사용하고 음식을 먹는 상황은 어지럽다. 그런 복잡한 상황을 마치 그림 그리듯 웨인은 소설 곳곳에 무지 세심하게 적고 있었다. 이런 묘사를 보면서 그가 얼마나 세심한 사람인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아파트먼트를 통해 서로의 장, 단점을 다 드러나게 가혹하게 노출하여 글로 표현한 그의 성정을 보니 관찰자의 입장이 날카롭다. 아파트 무대장치가 개방되어 옷을 벗고 입는 장면까지 전부 다 노출시켰으니 그가 섬세한 사람이라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테디웨인의 글쓰기 서술 방식은 마치 성경에 나온 기드온의 전략과 비슷하다. 기드온의 이야기를 잠시 해 보겠다. 천사가 므낫세 지파 기드온에게 이르기를 미디안 군대와 싸울 용사가 많으니 수를 줄이라고 했다. 이 말은 과시적이고 허세 없는 전략을 세우라는 말이다.


기드온은 베어 쓰러뜨리는 자이며 벌목하는 사람이다. 그는 포도주 틀에 들어가 타작하는 인생이었다. 하지만, 미디안을 치라는 명을 이어받았다. 저들의 군대는 13만 오천으로 당시 최강의 군대다. 저들의 군대와 맞서 싸울 이스라엘의 군대는 허약하지도 건강하지도 않은 수다. 하지만, 하나님은 3만에서 만 이천으로 수를 줄이라고 하신다. 다시 삼백으로 병력을 줄이라는 특단의 조치를 취하신다. 이런 방식은 글쓰기에서 아주 중요한 전략이다.



다들 글을 쓸 때 많은 분량을 쓰려한다. 그런데 그게 문제라는 것이다. 글을 쓸 때 작가라면 정작 쓰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그 본량에 충실해야 한다. 이스라엘 군대는 어둠 속에서 횃불을 밝히며 준비한 항아리를 깨뜨리며 소리를 만들어 적군의 손에 든 무기를 떨게 한다. 이런 점은 글쓰기에서도 좋은 전략이다. 펜은 작지만, 때로는 무기보다 강하고 예리하여 적장의 가슴에 비수를 꽂을 한 문장을 표출할 수 있다.

저들이 서로 싸우고 죽이다가 길 가던 에브라임 군대가 기드온과 합류를 하게 된다. 미디안 수령 제바와 설문 나를 추격하여 드디어 전쟁은 막을 내린다. 그 후 다시는 미디안이 이스라엘을 치지 않았다면서 성경은 막을 내린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테디웨인의 글은 성경에서 처럼 전략적 요소가 강한 소설이다. 누구라도 전략적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면 이 책을 꼭 읽어 보시기를 바란다. 문학을 사랑하고 글을 쓰고 싶고 책을 출간해 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좋은 지침서가 될 줄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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