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벚꽃은 두 갈래의 번민과 한 형제의 차별과 서열을 논했다
안톤 체호프의 벚꽃 동산은 1904년에 초연된 극작품이다. 러시아 문학의 정수인 체호프.
난 이 체호프라는 작가를 루드밀라 울리츠카야라는 러시아 여류 작가의 책 [커다란 초록천막]에서
자주 들었다.
그 후 체호프의 책을 접하게 되었다. 난 지금 감기로 기운도 없고 입맛은 더 없으며 눈엔 눈물이
그리고 몸은 열기가 가득하다. 그렇고 그렇게 그리고 별일이 없기를 바라는 날. 낮에 온 세상이 싸락눈 같이 하늘을 뒤덮은 날 우리 부부는 벚꽃 구경을 나섰다.
왜 그날 우리는 몸에 열기가 있고 눈에 눈물이 나며 얼굴에 마스크를 썼으며 등에는 배낭을 메고 그 환희의 벚꽃 터널을 지나갔는지 아는가? 누군가는 일 년에 한 번뿐인 벚꽃 구경을 위해 차로 한 시간 아니 기차로 서너 시간을 아니 배로 8시간 건너 꽃구경을 오는지 아는가?
난 전에 이 벚꽃이라는 낱말이 싫을 때가 있었다. 왜냐면 이 꽃이 무궁화보다 더 예뻐서 사람들이 우리 민족의 국화인 무궁화를 외면시해서 기분이 온통 나쁜 적이 있었다. 일본 오사카와 고베 배낭여행 갔던 날이었다.
그날 온통 벚꽃이 일본 열도를 뒤덮고 있었다.
그 벚꽃은 일본에서 어울리는 꽃이었다. 그런데 어느새 우리나라에서 해마다 벚꽃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사실 무궁화와 벚꽃 중 누구를 더 반길래 하면 나도 역시 벚꽃이다. 그러나 강인함을 말하라고 하면 역시 무궁화다. 누군가 무궁화를 텃밭 울타리로 사용하고 있었다.
이 무궁화의 가지는 아주 단단하다. 어지간한 장정은 자르기도 힘들 정도로 대가 강하다. 그리고 한 여름에 소 번성하는 힘이 너무 거세 잎이 피고 줄기가 나고 그 뿌리가 내려 태양을 먹고 마시고 흠뻑 째고 나면 그 누구도 덤벼들 장사가 없을 정도로 잎의 세력이 무성하다.
그런 연고로 벚꽃은 그 찬가가 4!~5일이라면 무궁화는 여름 한낮에 피어 그 수명이 참으로 길다. 자세히 보면 강인한 것이 인동초보다 더 하다. 잠깐 사라지는 벚꽃의 형상이나 강인하여 번성하는 무궁화의 형상이나 뭐 그리 중요할까 싶지만 내가 보기엔 내구성이나 꽃의 깊이는 역시 무궁화가 우리 꽃의 정서와 잘 어울린다.
벚꽃도 꽃이냐 먹지도 못할 벗지를 아는가? 벚꽃은 피었을 때는 예쁘다. 그러나 지는 모습이 너무 초라하다. 그리고 버찌는 또 어떤가? 새들도 이 버찌는 잘 안 먹는다.
그런데 말이다. 이 벚꽃 동산을 안톤 체호프는 책의 제목으로 등장시켰다. 1861년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 해방을 선언한 후 러시아 사회는 급속히 변화했다. 러시아의 문학을 보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경우가 많다. 농노해방이라는 단어에서 민중의 삶이 그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 단어에 힘을 주어 말하자면 물론 태백산맥에도 지주들이 농민의 땅을 가로채 자신의 사욕을 위해 사용했고 그 품삯을 제대로 주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농민들이 토지 민영화를 외치며 곡괭이와 삽과 낫을 들고 지주를 향해 쳐들어 가는 장면이 눈에 선명하게 그려지곤 했다.
땅이라는 것, 이 체호프라는 작가는 그 땅이라는 것과 목숨을 건 사투를 봄날 벚꽃 피는 날 아주 잔인하게 혁명처럼 투쟁한다. 이 벚꽃 동산은 상징적인 공간이다. 알고 보니 이 작품은 러시아 귀족 사회의 몰락과 농민 계층의 대두,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와 갈등을 다루고 있었다.
러시아 작가들은 글을 쓰는 재능이 뛰어난 것 같다. 작년에 읽었던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른 커다란 초록 천막을 쓴 울리츠카야도 역시나 약 4개 언어를 능가하는 아주 탁월한 여성 작가였다. 내가 익히 아는 원어민 선생민은 5개 국어를 능가하는 사람이었다. 그의 아내는 러시아인.
아주 까다로운 성격의 여자였다. 하얀 피부에 마른 체형. 그러나 울리츠카야는 하얀 피부에 약간 통통한 체형.
아무튼 러시아 문학의 정수는 내가 보기에 연구할 가치가 많다. 그래서 사람들은 톨스토이를 모방하거나 체호프의 극을 다시 패러디해서 연극에 올리기도 한다.
벚꽃 동산에 나오는 여자의 이름. 루비노프스카야. 그녀의 오빠 가예프. 이들은 파리에서 러시아로 돌아오면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다. 파리와 러시아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가족의 재산인 벚꽃 동산을 구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방탕한 생활로 빚을 지게 된 저 두 사람.
루비노프스카야는 벚꽃 동산에 있었던 감정과 추억을 중요시한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재정을 지키기 위한 노력은 부족하다. 여성이니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다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벚꽃 동산이 경매에 부딪힌다.
자연을 닮은 사람들의 이야기는 늘 그 자연을 이탈했을 때 모두 잃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왜 저들이 파리를 갔을까?
로파힌이라는 농노. 사업적 성공을 위해 부를 축적한 인물. 벚꽃 동산을 구입하여 별장을 만들 계획이었다. 그러나 루비노프스카야는 이 계획을 거절하지만 로파힌은 결국 벚꽃 동산을 경매에서 낙찰받고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확립한다.
이 극의 중심은 사회적 변화와 귀족 계층의 몰락이다. 루비토르스카야는 벚꽃 동산의 추억을 소중히 여기지만 그마저 상실되고 만다. 벚꽃 동산은 그녀에게 재산이었지만 기억의 공간이었고 과거의 상징이었다.
로파힌이라는 농노가 자신의 신분을 상승시킨 이야기는 구시대와 신시대의 갈등을 잘 드러나게 하고 있다.
난 이 작품을 도서관에서 대출해 읽었다. 늘 벚꽃이 피는 날엔 체호프의 작품이 떠오른다. 그의 작품은 매우 섬세했고 감수성이 뛰어났으며 문장이 수려했다.
그리고 도서관에서 들러 다시 한승원의 문학연구를 빌렸다. 다른 책 보다 유독 이 책이 눈에 띄는 이유가 바로 그가 바로 한강 작가의 아버지이기도 했다.
난 한승원이 성장하면서 엄부와의 갈등. 대립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불구가 되었을 때 집안 살림을 도맡아 했고 ---라는 대목에서 집안 형편이 눈에 그려졌다. 한승원은 아버지에 대한 모순적 존재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 대립을 다룬 작품을 썼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그의 성장소설인 [석유등잔불][안개바다][보리 닷 돼]에 형상하 되어 있다.
이 작품들에서 한승원은 부성애 대한 거부와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보여준다. 한승원의 자전적 소설인 [해산 가는 길]은 작가의 뿌리 찾기를 탐색한다. 아버지에 대한 반감이 싹트는 작품.
대보름날 아침 한의 형제들이 두껍아, 두껍아 노래를 한다. 내 다리 튼튼하지를 오치며 불을 넘는다. 한은 목구멍에서 말이 맴돌 뿐 입술 밖으로 나오지 않아 우물거린다. 눈물을 흐리는 아들에게 아버지는 소리를 지른다. 한은 스스로를 원망한다.
아버지와 그런 아버지를 두려워하는 한의 모습. 아버지를 닮고 싶어 하는 의식과 아버지를 바꾸고 싶어 하는 의식 사이의 갈등이 바로 두껍아 두껍아 이 노래에서 울기를 시작하고 무른 성격으로 인해 부친에게 인정받지 못하는 어린아이 한. 아버지와 한의 갈등.
어릴 적 쌀밥을 얻어먹기 위해 경쟁하는 두 형제. 한과 한수. 한수는 장손으로 집안에서 절대적 유리한 존재. 한은 늘 드러내놓고 불평을 못한다. 형제간에 먹는 것을 탐내거나 그것을 가지고 싸우는 사람은 개 돼지 취급을 당한다. 치사한 사람취급 당한다. 그게 바로 그 시대 아버지의 가르침이었다. 전통적인 가부장제의 권력 장려. 세습화가 바로 이 시기에 만연했던 것 같다.
전통적인 한국 사회에서 장남은 아버지가 부재할 시기에 가장 역할을 했다. 지금도 그렇다. 아울러 동생들에게 모법을 보여야 한다. 위계관계를 드러내는 아버지-장남-동생들의 서열.
한수. 눈방울만 굴려도 장남을 그래야 한다. 한. 순하기만 하고 성질이 고무줄 늘어지듯 한다고 타박.
아. 이 대목을 읽으면서 억압이 자주 드러나 읽기가 불편했다. 그리고 비교는 왜 그리 많은지.
우리 사회는 비교와 경쟁과 억압으로 알게 모르게 한과 한수 같은 형제, 자매가 많을 줄로 안다.
이 글을 쓰면서 우리 형제들의 서열 싸움을 보는 듯하기도 하다. 그게 뭐라고. ALl of the people are equal. 나도 모르게 난 이 단어들을 외치고 있었다.
차별이 언제부터 이렇게 만연했을까?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난 후 난 이런 글을 읽으면 과거에 안 태어나길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이야 형제가 하나나 둘밖에 없는 사회니 별로 차별이 없을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남자 형제가 셋인 제자가 있었다. 어머니는 큰 형의 간식을 식탁 위에 차려 놓고 직장을 나갔다. 그런데 막내아들이 배가 고파 형의 간식을 먹었다. 그 뒤 형이 귀가했다. 바로 동생을 향해 발길질을 했다.
동생은 그 뒤로 형에게 복수했다. 두 형제들은 그날 아주 사냥개처럼 으르렁거렸다. 동생은 형을 이기고 싶었다. 형은 동생을 뭉개고 싶었다. 그 뒤 동생과 형은 거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힘겨루기를 했다. 그만 유리창이 깨졌고 동생은 손에서 피가 흘렀다.
"이 자식. 너 거기서."
"형! 그런다고 내가 형 간식을 내놓을 것 같아!"
"엄마는 늘 널 오냐오냐했어!"
"그러는 아빠는 형을 늘 나보다 더 치켜세웠지?"
그다음 날. 그 아이는 팔에 깁스를 하고 내 앞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 모든 사실을 내게 알렸다. 난 기가 찼다. 그런데 오늘 이 글을 읽으니 이해가 되기도 한다. 이게 뭐라고 서열이 뭐라고.
난 다시 한번 외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그러니 서열이나 차별을 하지 말자. 사실 그 제자는 내가 보기에 형한테 맞아도 되게 맞아야 하는 아이였다. 아니 엄마대신 아빠대신 단속을 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형제는 간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바로 동생. 그 버릇없는 동생. 그 아이의 버르장머리 없는 행동을 두고두고 보다 못해 형이 바로 그때 딱 걷어차기를 시도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아주 외고 없이 동생이 그 간식 사건에 걸려들었는지 모른다. 내가 본 그 아이의 모든 인성은 그 해 아주 형편없었다. 아마 간식을 빌미로 동생에게 때는 이때다 싶게 일격의 발차기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실 이런 자잘한 사소한 모든 일이 우리 사회의 진정한 문학이 아니고 뭐겠는가?
안톤 체호프도 오죽 답답했으면 그 시대를 저렇게 빗대어 표현했을까? 밖은 봄동산인데 안은 살얼음이 이는 경매가 벌어지는 봄날이라. 그해 러시아의 시대적 배경이 살얼음이었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벚꽃이 피자 실버 봉사에서 봄 나들이길을 나섰다.
누구는 편마비로 지팡이를 누구는 휠체어를 그리고 또 누구는 바람이 싫다고 올해는 꽃을 찾지 않았다.
고향이 있는 땅에 벚꽃이 피자 어르신은 벙글어졌다. 그러나 그 어르신을 모신 요양보호사 샘은 입가가 쥐었다.
누가 그랬던가? 인생은 희비의 연속이라고. 한쪽이 웃으면 또 다른 한쪽은 운다고. 체호프의
삶도 벚꽃동산을 사이에 두고 울고 웃는다.
어르신은 그날 이렇게 말했다.
"기분이 좋아."
고향, 그 고향은 죽은 사람도 살리는 땅, 그러니
벚꽃 동산은 팔아선 안 되는 장소.
당신이라면 저 벚꽃 동산을 팔겠는가?
아침에 열이 많아 병원을 가니 코로나였다. 작년 이때 걸렸던 코로나가 또 찾아왔다.
약 한달간 주말마다 8시간 산모 관리사 강의를 받았었다. 그게 힘이 들었었나보다. 약을 처방 받고 쉬니 컨디션이 더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