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대단했던 순간 떠올려보기
'생각은 가슴이 합니다. 가슴에 두 손을 얹고 조용히 생각합니다. 누구도 머리에 손을 얹고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이란---'
[신영복의 처음처럼에서]
난 오늘 큰 바위 얼굴처럼 그윽한 미소의 어르신 한 분을 만났다. 그 분과 벌써 10년의 인연. 그분은 올해 연세가 구순.
"며칠 전까지 대상포진으로 고생했어."
그 한마디에 맘이 짠했다. 우린 반찬 봉사를 통해 만남을 계속하고 있다. 이 일이 벌써 10년째.
난 주로 배달을 도맡아 했다. 나의 수혜자는 주로 장애우와 독거노인. 오늘이 바로 반찬 배달하는 날. 추우나 더우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쉬지 않고 별일 없으면 저들에게 반찬과 함께 사랑도 건네주었다.
"날이 참 많이 추워요."
"커피 한잔하세요."
몸이 많이 불편하고 아무짝에도 쓸모없다는 말씀. 난 늘 어르신 걱정, 그 어르신은 늘 내 걱정. 우린 가끔 다정한 모녀인 듯할 이야기도 들을 이야기도 많았다. 그렇게 난 어르신과 마주 앉아 지난 세월을 돌이켜 보았다.
평소에 잘 말씀을 안 하시던 어르신이 요즘 부쩍 말씀이 많으시다.
한국 전쟁 시 죽을 고비를 넘겼다는 이야기.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했던 역사. 그 무섭고 잔인했던 소설 같은 이야기가 이 추운 계절 나의 발목을 붙들었다.
" 반란군이 말이야. 울 집 식량을 다 훔쳐 가던 때야."
먹을 게 없어 배급을 받아먹고 밤이면 찰칵거리는 총소리에 잠을 못 이루었다는 이야기. 잡혀 갈까 봐 목숨이 조마조마했다는 이야기.
그 반란군은 까마귀 떼처럼 새카매 마치 짐승 같았다는 이야기는 슬프고 가슴이 아팠다.
오늘도 지구 반대편에선 전쟁이 한창이다. 전쟁 중 굶주림이 제일 고통스러웠다는 이야기.
"그땐 세상이 지랄 같았어."
인간이 산 다는 것은 무엇일까? 생존. 지금까지 살아 계셔 아직도 그 시간을 되새기며 악몽을 청산하고 싶은 저 어르신.
몇 분 동안 그 아픈 한국사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 어르신이 정말 대단하신 분 같았다. 이 일을 계기로
난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 대단한 무엇]이라는 스위스 작가 다비드 칼리의 동화책을 빌려 왔다.
문체가 간결하고 그림이 단조로웠다. 색감은 무채색에 가깝고. 스페인의 미겔 탕코의 그림은 잔잔했다.
난 이런 드로잉 책이 좋다. 첫 내용이 가족사진이다. 아빠가 아이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마치 오늘 만난 어르신이 나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듯.
앙구스 삼촌은 경찰, 도라스 고모는 소방관, 티보 삼 촌은 챔피언, 스쿠터 삼촌은 양을 돌보고.
유키 고모는 우주 비행사, 프리다 고모는 화가.
난 이 가족 중 프리다 고모랑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영치기, 우주인, 화가 등 뭐든 대단한 사람이 되라는 이야기.
자, 이제 당신 차례. 당신은 어떤 분야에서 대단한
사람인가요?
대단한 당신을 드로잉 하는 시간
내가 만난 그 어르신은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 중 하나다. 나이 차이가 엄청나지만 친구 같고, 엄마 같고 때론 큰 바위 얼굴 같다.
난 오늘 그 어르신께 이런 글을 써 본다.
세찬 세파에도 꿋꿋하게 궂은비를 이겨내주시고 오늘 귀한 말씀 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당신은 이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 당신의 이야기를 통해 새로운 민족의 역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어르신의 말씀을 듣다가 난 내가 전에 읽은 조정래 작가님의 [태백산맥]이 떠올랐다.
"문딩이 계집아이, 참 팔자도 험하게 변했다."라는 이 구절속 단어에서 삶, 인생, 목숨, 생명을 끊임없이 생각해 보았다.
소설 속 하대치 부인의 들몰댁과 점례의 이야기가 꼭 오늘 내가 만난 그 어르신의 이야기와 비슷했다. 좌익 활동을 하던 하대치의 아내 들몰댁. 모진 고문을 당하고 사흘 만에 풀려 나자 두 여인이 가슴을 치며 했던 대사가 바로 저기 저 대목. 곡괭이가 하늘을 치솟고 시체가 넘나 들었다는 그 시절. 비극적 분단과 아픔을 상기시키는 그 장면. 그 당시 인민군에 밀린 군인이 남쪽으로 후퇴.
몇 달 전 여수에서 조정래 작가님의 강의가 있어 참석했던 나. 그 자리에서 작가님을 처음으로 대한 날. 난 분단에 대해 다시 한번 들어야 했다. 죽기 전에 읽어야 할 그 소설이 바로 내 이웃의 이야기였다니. 세상은 이래서 좁다는 말인지. 오늘 나의 하는 참 의미심장했다.
'가장 위대한 사람은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다'
그러니 그대여! 오늘 살아 있음에 감사하고 남은 인생을 잘 느끼며 살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