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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미움과 이해 사이, 마음의 매듭을 풀어가는 인생 이야기

by 봉순이


“뭐라고? 어딜 간다고? 태국에? 얼마나? 3개월? 회사는? 그만뒀어?”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말썽쟁이 오빠가 회사를 그만두고 3개월간 태국으로 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은 내가 엄마를 모시고 항암치료를 함께 다녀야 한다고 했다.

전화를 끊고 나니 화가 치밀었다.


오빠는 어려서부터 말썽이 끊이지 않았다.

다섯 살 위의 철부지 형제는 아버지 돌아가신 뒤, 유산이라며 엄마 돈을 몽땅 가져가 외국으로 사라졌다.

3개월 만에 빈손으로 돌아와 엄마 집으로 들어온 뒤로는 나와 연을 끊다시피 지냈다.


그런데 몇 년 전, 엄마가 대장암 판정을 받으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엄마의 재산을 오빠에게 물려주기로 하고, 오빠가 엄마를 돌보는 것으로 우리는 합의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또 회사를 그만두고, 엄마는 나 몰라라 하고 태국으로 놀러 간다고?

그 소식에 분노가 치밀었다.


“역시 사람은 안 변해. 검은머리 짐승은 믿는 게 아니라더니…”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서울로 올라갔다.


병원 진료 날, 의사는 나를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드님은 어디 가셨어요?”

“잠시 안식년을 갖고 제가 대신 왔어요.”

“아, 그러시구나. 5년 동안 단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어머님을 모셨는데, 개근상이라도 드려야겠네요.”


순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오빠가 그렇게나 꾸준히 엄마를 돌봐왔다는 사실을, 그제야 의사 입을 통해 처음 들었다.


그날 항암은 4시간이나 걸렸다.

나는 중간에 카페에 들러 시간을 보내고 돌아왔는데, 엄마가 말했다.

“어디 갔다 왔어? 예전엔 오빠가 옆에서 졸면서 기다렸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조금 흔들렸다.

며칠 동안 엄마를 모시고 다녀보니, 생각보다 훨씬 고되고 버거웠다.

노인을 병원에 데리고 다닌다는 것은, 단순한 ‘효도’가 아니라 인내와 희생의 연속이었다.

그걸 5년 동안 해왔다니, 정말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날 저녁, 정토회 수요법회가 있었다. 나는 불교 신자다.

인생이 막막할 때 우연히 유튜브에서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을 들었다.

스님의 말은 내 삶의 구름을 걷어주는 바람 같았다.

그때부터 정토회의 법문을 듣고 수행문을 읽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자신이 일으킨 한 생각에 사로잡혀 옳다 그르다 모양을 짓고
그 모양에 집착해서 온갖 괴로움을 스스로 만듭니다.
한 생각에 사로잡혔다는 말은 주관이 객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내가 옳기 때문에 옳다고 믿는 순간, 괴로움은 시작됩니다.


‘한 생각’이란, 내가 옳다고 믿는 마음 하나에 갇히는 것을 뜻한다.

그 문장을 읽는데, 불현듯 오빠에 대한 내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그는 늘 문제야, 변하지 않아’라는 틀 안에서만 오빠를 보고 있었던 것이다.


오빠는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수준에서, 자기 방식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엄마에게 들어보니, 회사도 경영이 어려워 정리해고 비슷하게 나갔다고 한다.


많이 미안했다.

나 스스로 생각의 덫을 만들어 오빠를 미워하고, 괴로움을 키워왔던 것 같다.


엄마를 모시며 오빠가 느꼈을 피로와 외로움을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제야 이해가 갔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건 사랑보다 더 큰 책임이라는 것을.

오빠에게 “다녀와.” 하고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나도 조금은 성장한 셈이다.


‘한 생각’에 사로잡혔다가, 그 사로잡힘에서 해방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산다는 것은, 미움과 이해 사이를 오가며 조금씩 마음의 매듭을 풀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오빠가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하게 느껴졌다.

3개월 뒤, 건강하게 돌아오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lotus-leaf-4613923_1280.jpg ▲ 산다는 것은, 미움과 이해 사이를 오가며 조금씩 마음의 매듭을 풀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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