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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레스토랑은 9시에 문을 닫는다

레스토랑 셰프가 글을 씁니다

by 봉순이


나의 레스토랑은 새벽 5시에 문을 열고, 밤 9시에 문을 닫는다.


지금 시간, 밤 9시.

오늘도 어김없이 간판 불을 끄고, 안쪽 조명을 켠다.

나만의 작은 식탁 위, 부드러운 스탠드 불빛이 내 그림자를 길게 늘인다.

손님 하나 없는 조용한 식당. 이제부터는 나만을 위한 시간이 시작된다.


나는 이곳의 셰프다.

어릴 적부터 음식을 좋아했다.

맛있는 음식을 위해 글재료를 다듬고, 다른 맛집을 찾아다니며 풍미를 탐색했다.

중고등학교 시절엔 나만의 요리책을 만들며, 혼자 맛을 보곤 했다.


그러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조그마한 블로그 분식점을 열었다.

좋아요나 공유가 많진 않았지만, 시 한 편, 짧은 글 하나를 누군가가 퍼가면 꽤나 즐거웠다.

그 작은 분식점은 청춘 시절, 자그마한 기쁨이 되어주었다.


돈을 벌기보단, 창작의 재미가 컸다.

글을 쓰고, 맛깔나는 문장을 떠올릴 때면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조금 더 큰 레스토랑을 준비 중이다.

그 계기는 5년 전 건강을 잃을 뻔한 일이었다.

그 일을 겪으며 인생에서 가장 후회 없는 선택은

‘내가 즐거운 일을 하며 사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나는 언제 즐거웠던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창작에 몰두할 때였다.

그래서 지금, 나는 다시 이 주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사랑했던 것들을 꺼내어 요리처럼 펼쳐보려 한다.


물론 문제도 있었다.

그동안 나만을 위한 글만 써왔기에,

이제 누군가와 나누기 위한 글쓰기—공감을 요리하는 법은 낯설었다.


그래서 여러 컨설턴트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고,

결국 나만의 레스토랑 운영 시스템을 만들었다.


그 핵심은 매일 아침 6시, 그리고 밤 9시에 ‘장부’를 쓰는 일이다.

하루의 감정과 아이디어, 실패와 실험을 기록하는 나만의 루틴.

그 루틴 덕분에 덜 잊고, 덜 불안해졌으며,

무엇보다 더 맛있는 메뉴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이 장부에 오늘 쓴 글의 재료들을 적는다.

웃긴 말, 아픈 감정, 번뜩인 아이디어.

이 모든 것이 내일의 요리가 되고, 나의 이야기가 된다.


오늘도 밤 9시, 나는 장부를 펼쳐놓고 하나하나 기록을 시작한다.

사용한 재료, 내놓은 요리, 손님 반응, 그리고 새로 떠오른 레시피까지.

고요한 주방에서 타자 소리는 칼질처럼 또각또각 날카롭다.



● 오늘의 체크리스트


좋았던 일 - 브런치에 작가로 등록되었다.

새로운 분점이 생겼다. 하지만 걱정도 따라온다.

이 분점을 어떻게 운영하지? 머릿속엔 브런치용 레시피가 가득하다.


나빴던 일 - 허리가 아파 한의원에 다녀왔다.

침, 도침, 봉침까지 총출동. “봉침이요? 벌침이요?”

입 밖에 내진 않았지만, ‘한의원에 벌을 키우나요?’라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난다.

이건 인스타툰 재료로 써야겠다.


고민스러운 일 - 7월부터 새로운 일을 제안받았다.

월급이 꽂히면 기분이 좋겠지만, 나의 자유와 바꾸는 일이다.

월급에 흐뭇해할 남편 얼굴이 떠오른다.

그래, 이걸로도 한 편 그려보자.

돈만 밝히는 남편 캐릭터, 괜찮겠는데?


해보고 싶은 일 - 브런치 연재.

중년 아줌마의 판교 입성기를 10회 정도 써볼까?

나처럼 다시 시작하는 사람에게 작게나마 위로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어떤 재료를 쓰고, 어떤 레시피로 조리할까?


하루의 감정을 볶고, 굽고, 버무린다.

아무 맛도 나지 않을 것 같던 하루도, 이렇게 적어보면 제법 근사하다.

장부를 쓰다 보면 오만가지 아이디어가 솟는다.

이야기가 요리처럼 익어간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 6시.

재료 정리와 장비 손질을 시작한다.

아이패드를 열고, 캐릭터 일러스트를 만든다.

프리크리에이터로 만든 이미지는 오늘 요리의 데코에 쓴다.

요리가 완성되면, 브런치에 업로드한다.


손님 반응은...?

좋아요가 하나 달렸다. 아싸.

하지만 토탈 3개.

아.. 망했다.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는데...

재료손질 하는데만도 2시간이 걸렸는데.


망한 요리를 다시 살펴본다.

싱싱한 재료만 믿고 조미료를 넣지 않은것이 문제였다.

다음엔 새콤달콤 조미료 Z와 쓴맛 조미료 T를 써보자.

그래도 안되면 하이브리드 조미료 Ev를 써야겠다.




나는 이 레스토랑을 사랑한다.

이제는 내 전부가 되어가고 있다.

이곳에서 꿈을 재료로 현실의 요리를 만든다.

그것을 한입 먹을 때, 고난과 괴로움은 그 맛있는 음식에 녹아 사라진다.

그리고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현실의 재료들을 확인하며,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점검한다.

이곳은 단지 음식을 만드는 공간이 아니다. 내 삶 전체를 빚어내는 주방이다.


이렇게 멋진 레스토랑의 셰프를… 내가 어찌 그만둘 수 있겠는가.


결국, 나는 오늘도 글을 쓴다.

하루가 마무리되는 이 조용한 레스토랑에서

불을 켜고, 천천히 재료를 다듬는다.


내일은, 찐한 국물이 우러나는 사골국이 나갈 예정이다.

나의 레스토랑에 다들 놀러 오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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