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보석같은 곳 '구례'와 '하동'_1편
나에게는 스무살에 서울에서 처음 만나서 어느덧 7년이 된 오랜 친구가 있다. 바람을 쐬러 멀리 국내 여행을 가고 싶다고 말하니 친구는 흔쾌히 운전대를 잡아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지도상에서도 끝자락에 점이 찍혀있는 전라남도로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서울에서 고속도로로 진입하는 구간에서 좌충우돌하는 것 조차 재밌게 느껴지던 우리의 여행길의 유일한 오점은 그칠 기미가 안 보이는 폭우였다. 부디 목적지에 도착해서는 비가 그치길 빌며 네비게이션에 구례를 찍고 출발했다.
300km가 넘는 주행거리에 비해서 3시간이 조금 넘은 소요시간으로 생각보다 빨리 전라남도 구례에 도착했다.
여전히 추적추적 내리는 빗줄기 사이로 우리는 구례라고 큼지막하게 고딕체로 붙어있는 톨게이트를 통과했다.
불과 일주일 전만 해도 벚꽃나무가 무성했던 길목은 전날 밤새도록 내린 비로 인해서 벚꽃잎은 다 떨어져있었다. 때때로 꽃의 인생이 부러울 때가 있다. 떨어지더라도 내년에 다시 핀다는 삶이 보장되어있으니까 말이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바로 늦은 점심을 먹으러 읍내 시장 쪽으로 향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 거치는 통상적인 절차인 포털사이트에 '구례 맛집'이라고 검색하니 가장 많이 나온 식당인 다슬기 수제비로 유명한 '부부식당'을 가기로 했다. 포슬포슬 내리는 비와 무색하게도 식당 문 앞에는 웨이팅을 하는 손님들이 많아서 조금 당황했었다. 행색이 딱 봐도 여행객처럼 보이는 우리에게 앞 줄 어르신들이 "서울에서 왔는가배?" 라고 친근한 말투로 말을 건네었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지 않게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금세 지나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다슬기 수제비 2개를 주문했다. 전라도 특유의 소담한 반찬들이 먼저 내어져왔다. 수제비를 시켰는데 밥 한 공기도 함께 곁들여져나왔다. 빗 속에서 기다리느라 약간 몸이 서늘해진 상태였는데, 따뜻한 국물의 수제비를 먹으니 탁월한 선택이였다고 생각했다. 맛을 음미하며 천천히 먹고 싶었으나 밖에서 기다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후다닥 먹고 계산을 하고 빠르게 빠져나왔다.
밥을 먹고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그치지 않는 비를 피하기 위해서 카페에 가기로 했다. 네비게이션에 목적지를 찍고 달리는 와중에 오랜 운전끝에 친구도 운전대가 더 편해졌는지 노래 볼륨을 더 키워도 된다고 했다. 섬진강 위로 잔잔하게 퍼져있던 운무가 아름다워서 바로 잔나비의 노래들로 플레이리스트들을 업데이트 시킨 채로 친구는 그에 걸맞게 속도를 높여서 우리는 강 줄기를 따라 드라이브를 시작했다.
도착한 곳은 sns에서 유명한 카페여서 그런지 점심을 먹은 식당과 달리 젊은 인파들로 북적였다. 안 쓰는 원단에 바느질로 직접 만든 것 같은 메뉴판에서 유독 눈길을 끄는 메뉴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흑임자쑥치즈케이크'였다. 친구와 말은 안했지만 눈빛으로 통했고 커피 2잔과 디저트까지 야무지게 주문했다. 운 좋게 창가쪽에 자리를 잡게 되어서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빗줄기를 감상할 수 있었다.
한옥에서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니 마치 전주에 와 있는 듯한 기분도 든다고 친구는 내게 말했다.
구례에 갈 거라고 주변 지인들한테 말했을 때 구례에는 무엇이 있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었다. 나도 가 본 적은 없지만 우연히 피드에서 본 정갈한 카페 사진이 마음에 들어서 구례에 가기로 결심했다고 답했었다. 그 카페가 바로 '무우루'였다. 섬진강을 둘러싸고 있는 지리산 광경도 볼 수 있음은 물론 단정한 한옥 카페까지 있는 매력적인 여행지라고 생각이 되었었다.
카페에서 재충전하는 시간을 가지고 몸도 마음도 따뜻해진 채로 섬진강 더 깊숙한 곳까지 달려보자고 친구랑 정했다. 달리다가 '두꺼비다리'라는 독특한 푯말을 보고 가던 길을 멈추고 즉흥적으로 다리에 올랐다. 차가 있으면 원하는 곳에 정차할 수 있다는 게 좋은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유명한 관광지는 아닌 건지 우리 빼고 아무도 없었지만 다리 위에서 바라보는 구례의 자연 절경이 꽤나 아름다웠다. 잠시동안 머물렀지만 무척이나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었다.
친구랑 이러쿵 저러쿵 사진을 찍으며 놀다보니 다행히 비가 그치고 쨍쨍한 해가 떠서 야외에서 차를 마시러 가기로 했다. 구례는 전라남도이지만 다리를 건너면 나오는 화개장터를 지나는 순간부터 경상남도로 바뀌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래서 구례와 하동을 묶어서 여행하기가 아주 좋다. 맑아진 날씨에 더 기분이 좋아져서 볼륨도 한층 더 업 시킨채로 하동 '매암제다원'으로 우리는 속도를 높였다.
흔히들 녹차밭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곳은 '보성'일 것이다. 나 또한 그러했다. 하동에도 녹차밭이 광활하게 펼쳐져있을 줄은 몰랐다. 매암제다원은 1인당 3,000원이라는 다도 체험비용만 지불하면 녹차밭 근처에 만들어진 휴식공간에서 차를 우려마시며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였다. 언제 비가 왔었냐는 듯 맑게 개인 하늘 아래에서 지리산을 바라보며 우려마시는 녹차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맛이 좋았다.
화사하고 보드라운 연두색의 녹차잎 새순들이 아름다웠다. 녹색에도 여러 단계의 녹색들이 있는데 녹차밭은 자연이 만들어준 그라데이션 같았다. 다행히 친구도 자연을 좋아해서 함께 즐거워했다. 좋은 곳을 가니 자연스레 부모님이 떠올라서 영상통화를 걸었다. 나만 좋을 수는 없으니까 말이다.
녹차밭을 등진채로 앞을 바라보면 오래된 가옥이 눈에 띈다. 박물관으로 탈바꿈해서 보존되고 있던 이 곳은 현대와 고대를 넘나드는 느낌이 공존했다. 대청마루가 커플들 사이에서는 포토 스팟으로 유명한 지 삼각대를 놓은 채로 열심히 사진을 찍고 계시길래 조용히 뒤돌아 나왔다.
해가 뉘엿뉘엿 질 무렵이 되어서인지 크림색의 건물 외관 벽에 나무와 어우러진 그림자가 살포시 비추기 시작했다. 빛의 궤적을 잠시동안 멍하니 바라보곤 했다.
차로 5분 거리에 떨어져있는 곳에 조용한 마을 어귀에 주막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갔다.
마을길을 오르는데 눈 앞에서 반짝이는 매화밭을 발견하고 친구와 바로 차를 정차한 채로 내려서 구경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마주하는 아름다움은 실로 위대한 것이였다. 나는 이 매화밭을 계기로 또 다른 행복에 대해 배웠다.
매화밭을 뒤로한 채로 쭉 걸어오니 사진으로 본 파란색 피아노가 놓인 '형제봉주막'을 발견했다.
술집치고는 다소 이른 오후 5시에 오픈한다는 말을 듣고 반신반의하면서 도착한 이곳은 너무 고요해서
아직 문을 안 연 것 같아서 조심스레 다가갔는데 푸근한 인상의 사장님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옛날 드라마에 나올 법한 역사가 그대로 보존된 것 같은 느낌을 자아내는 내부는 테이블이 많지는 않았으나
둘이 자리 잡고 먹기에는 충분하였다. 천장과 벽에 무궁무지하게 붙어 있는 다녀간 사람들의 방명록을 구경하면서 사장님에게 막걸리와 약간의 안주들을 주문하였다.
헉 소리나는 서울 물가와 다르게 인정 많은 이 곳은 막걸리 한 주전자에 단 돈 7,000원이였다. 운전을 해야하는 친구 앞에서 미안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빠르게 주전자를 혼자서 비워나갔다. 서울에서 출발했던 게 같은 날이라는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룻동안 많은 자연들을 몸소 느꼈기에 행복했던 하루를 고이 접어 간직하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사장님에게 종이와 펜을 빌려주실 수 있냐고 조심스레 물어봤더니 쿨하게 종이 한 뭉텅이와 두터운 매직 한 개를 주시면서 방명록을 길게 쓰라고 하셨다. 많은 이들의 흔적을 보니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기에 친구와 사이좋게 한 장을 반으로 나누어서 하고 싶은 말들을 적어내려갔다. 언젠가 이곳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 때 그때까지 고이 간직되어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