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속도에 발맞추어 걷다

작은 손과 눈빛이 알려준 성장의 리듬

by 희라의 오늘배움

어느 날 동생이 물었다.

언니, 드라마 고백 부부를 보면 이혼하고 싶어 하던 부부가 과거로 타임슬립 해서 결혼도 안 하고, 경제적으로도 성공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결국 아이를 다시 찾고 싶어서 그걸 포기하고 현재로 돌아오잖아. 언니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아?


나는 대답했다.

글쎄, 나는 이제 아이가 없던 시절에 내가 잘 떠오르지 않아.


나는 아이가 없었을 때도 충분히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피아노, 컬러링, 독서, 캠핑 등 다양한 취미가 있었고 전시회나 연주회도 자주 보러 다녔다. 둘 다 먹는 것을 좋아해 맛집도 찾아다니고 매년 해외여행도 다녔다. 무엇보다 남편과 둘만 있을 때 가장 편안하고 즐거웠다. DINK족이었던 사람답게, 아이가 있어야만 둘 사이가 끈끈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던 내게 아이가 생겼고, 그 조그마한 생명체는 내 일상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이전에 했던 취미생활들은 꿈도 꿀 수 없었다. 맛집은커녕 국에 밥만 말아먹어도 감사했고, 당장 눈앞에 닥친 아이의 일거수일투족을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다 보면 하루가 끝났다.

몸은 바쁜데 머리는 점점 멍해졌다. 아이에 맞춰 생활하다 보니 아이에 맞춰 생각하게 되는 느낌이랄까. 어른의 대화를 하고 싶어 부모님께 영상통화도 걸고, 오후가 되면 남편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8개월, 언제부턴가 아이와 의사소통이 되는 것 같았다. 처음에는 내 말을 긍정과 부정으로 구분해 알아듣는 것 같았다. 새로운 것을 만지면 조심스레 내 얼굴을 보며 허락을 구하듯 눈치를 살폈다. 내가 '안돼' 하고 외치면 잠시 멈췄다가 슬쩍 만지고, 웃으며 바라보면 적극적으로 만졌다.(안된다고 해도 내려놓지는 않았다)


어느 날은 입에 떠 넣어준 이유식이 뜨거웠나 보다. 갑자기 밥상을 집고 벌떡 일어나더니 내게 "마마마!!" 하며 옹알이를 했다. 마치 "내게 어떻게 이런 뜨거운 걸 줄 수 있어!!" 라며 항의하는 것 같았다. 심지어 자기 의사 표현까지 하다니. 처음 옹알이 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너무나도 놀라운 변화였다.


그러자 문득, 내가 아이를 너무 과소평가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갓 태어난 아기들도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과 싫어하는 사람은 구분한다던데, 태어난 지 8개월이나 된 아이가 아무것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임신 때 선물 받았던 책, 『어린이라는 세계』를 펼쳤다. 어린이들의 말과 행동을 통해 어린이들의 세계를 보여줌과 동시에 '어른들이 어린이를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를 묻는 책이었다.


신발끈을 묶느라 헤매는 아이에게 "어른이 되면 신발 끈 묶는 일도 차차 쉬워질 거야"라고 위로하자 아이가 대답한다. "그것도 맞는데, 지금도 할 수 있어요. 어른은 빨리 할 수 있고, 어린이는 시간이 걸리는 것만 달라요." 그 부분을 읽는 순간, 뒤통수를 맞은 듯했다. 그래, 아이도 할 수 있는데, 왜 어른들만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돌이켜보면 나 역시 어릴 때는 그런 불만이 많았다. '나도 할 수 있는데, 왜 못하게 하지? 조심하면 되잖아.' 하지만 아이를 키우다 보니 자연스레 내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은 "안 돼"였다. 이건 위험해서 안되고, 이건 더러워서 안되고, 이건 먹으면 안 되고. 사실 기다려주면 알 수 있을 텐데, 느리다고 못 하는 게 아닐 텐데. 어른이 보기에 간단한 일일지라도 아이에게는 그렇지 않아서 조금 시간이 걸리는 것일 뿐인데. 그 과정을 거쳐서 성장하는 걸 텐데.


책을 읽고 아이를 보자 새로운 시야가 열린 것 같았다. 아이는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새롭게 시도하고 계속해서 실패하고, 그러다 딱 한 번 성공했다. 그리고는 또다시 실패했다. 하지만 그 우연한 성공이 점점 늘어나면 마침내 아이는 그것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스스로 무언가를 해내고 뿌듯해하는 순간들이 많아질수록, 아이는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해 보면 아이들은 새로운 것은 무조건 시도하고 보니까, 그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어른 뿐이었다.


책장에 올려져 있는 장식품들을 살균티슈로 하나하나 닦고 정리했다. 아이에게 먹지 말라고 하는 대신 아이의 입에 들어가도 괜찮도록, 입에 넣으면 안 되는 것은 미리 치웠다. 다음 날, 책장에서 새로운 장난감을 발견하고 만지작 거리는 아이를 보며 뿌듯한 마음으로 한 번 더 결심했다. 우리 아이만의 세계를, 속도를 존중하기로. 조금 답답해도, 언젠가는 해낼 테니까. 그렇게 날마다 시도하고, 배우고, 자라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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