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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Oct 29. 2023

양말 버리기

숫자가 바뀌는 순간을 목격했다. 밥솥 보온시간이 37에서 38로 바뀌는, 오래 묵은 것이 조금 더 오래되어버린 순간. 





차라리 해졌다면 버리는 게 단순했을 텐데 발목이 늘어난 덧신양말은 어쩐지 한 번은 더 신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래서 한 번 더 신고 나간 날은 뒤꿈치 예민증으로 종일 날이 선다. 한 발짝 뗄 때마다 조마조마 아슬아슬. 결국 절반은 벗겨져 발 아치에 걸리고 나머지 반만이라도 살려내기 위한 분투. 옆 사람이 하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고 발가락 다섯 개를 최대한 넓게 벌려 양말 고수에 집중한다. 오, 옆 사람님, 제발 신발 벗는 식당엔 가지 마요. 발가락에 걸린 양말 딸려 나오다 뚝 떨어질지도 모른다고요. 


목 긴 양말도 버리지 못하는 건 매한가지. 열심히 하루를 살다 보면 느슨해진 양말목이 설설 내려오고 바짓단 밑으로 드러나는 맨살. 아, 썰렁해라. 헐렁해진 양말은 아침의 단정했던 몸과 마음을 풀어놓는다. 세우고 앉아있던 허리는 뒤로 젖혀지고 두 무릎은 벌어지고 다리 한쪽 덜덜 떨면서 눈은 왜 게슴츠레? 


버리자. 궁색이다. 이 정도 신었으면 오케이. 

동생이 선물해 준(지 한참 된) 스누피 양말을 꺼냈다. 새 양말이라니. 내가 새 양말을 신어도 될까? 어떻게 잘해보면 저것들을 한 번 더 신을 수 있을 거 같은데? 

아니. 나는 오늘 새 양말을 신겠어. 너무 고와서 아껴두었던 이 양말, 이제 온전히 혼연일체를 이루겠어. 조금 떨리는 이 마음.




짱짱하다. 쫀쫀하고 발에 착 감긴다. 그래, 이런 게 바로 새것의 느낌이었어. 

자신감을 신고 출근하는 기분이었다. 꼿꼿한 발목과 무릎과 허리와 뒷목으로 하루를 보냈고 구부정하게 흘러내릴 틈 없이 산뜻하게 일을 마치고 퇴근했다.  


책을 꺼내려 가방을 열었는데 작별사진을 찍으려 가져갔던 낡은 양말이 보였다. 어쩌지. 빨래한 게 아까우니까 한 번만 더... 신을까? 그냥 버려? 구멍 난 것도 아닌데? 그런데 이제 발목 내놓고 다니기에는 좀 쌀쌀하지 않나? 하지만 이거 서랍에 도로 넣어놓으면 다음 봄에 멀쩡한 건 줄 알고 또 신을 텐데. 그럼 그날은 또 발가락에 양말 걸고 다녀야 할 텐데. 발에 쥐 날 텐데. 그래도 다른 데는 멀쩡한데. 하, 어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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