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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Nov 01. 2023

빈 약병 버리기



지겨워라, 약 먹기. 


못돼 먹은 성격 때문이려니, 성격이 팔자려니 했던 만성극성 두통이 실은 보통 사람보다 세 배나 빠른 뇌혈류 때문이었다는 것을 몇 달 전 알게 되었다. 피가 지나치게 빠르게 달리면서 혈관을, 특히 굴곡진 혈관을 때려대는 통에 염증 천지, 머리가 깨질 듯 터질 듯 아팠던 것이다. 


홱홱홱홱, '피 튀기듯' 달리는 혈류의 초음파 소리가 몹시 놀라웠지만 어쨌거나 완화방법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지. 한 보따리 약을 끌어안고 나오며 안도할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복약 손절을 시도할 날이 도래하리라는 것을. 


장기간 이어지는 무기력이나 불안, 우울, 불면 때문에 힘들어하는 주변인들에게 정신과 치료를 권하는 이유는 약의 효과 때문이다. 

정신과 치료를 시작해 약효를 보기까지는 당연하지만, 사람마다 다른 시절을 겪어야 한다. 이 '시절'이 관건. 나의 경우, 궁합이 맞는 약의 종류와 용량을 찾기까지 8개월이 넘게 걸렸다. 물론 그 세월 중 얼마큼은 약과 상관없이 병이 호전되는데 온전히 필요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이나 불면증 약을 몇 번 먹어보고는 늘어진다, 깔아진다, 몽롱하다, 개운하지 않다 같은 느낌을 이유로 약을 끊는 것을 보고 들었다. 안타깝다. 자기에게 맞는 만큼의 약을 찾아 몸과 사이좋게 지낼 수 있도록 기다려주면, 그렇게 약이 제 기능을 할 수 있게 해주면 삶의 질이 확연히 달라질 텐데. 

나의 공황발작 주기와 충격 강도를 그래프로 그린다면 약을 먹기 전 다급하고 뾰족했든 선들이 약을 먹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완만하고 심심해지는 모양을 취할 것이다. 

그래도 지겹긴 하다. 이제 5년째. 


그래서 감기 기운이라도 있으면 참으로 곤란하다. 그 약들을 다 먹어대느라 배가 부르다. 

아침엔 신경과 약 두 알, 정신과 약 한 알, 목감기 약 두 알

오전엔 부장님이랑 신경전 벌이느라 두통약 세 알

점심엔 목감기 약 두 알

오후엔 소란한 사무실에 있다 보니 심장이 아파 공황발작약 한 알

저녁엔 신경과 약 두 알, 목감기 약 두 알

자기 전 정신과 약 세 알

으, 많다고 느끼긴 했지만 써놓고 보니 뒷골에 소름이 돋는다. 약 먹기 싫어. 



아침에 신경과 약을 먹으려고 통을 집어 들었는데 가볍다. 비었다. 좋아. 안 먹어도 되니까 좋아. 병원 안 갈 거야. 약 받으러 가기 싫어. 약 좀 그만 먹고 싶어. 지겨워. 지긋지긋해. 


반항심이 솟아오른 덕에 그날은 빈 약통을 던져버리고 뇌혈관 염증약 -2알.

반항심이 하자는 대로 산 탓에 깨질 듯 머리 아파져 두통약 +3알.

결국 +1알.


하, 지겹다 지겨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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