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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Nov 06. 2023

감기 버리기


때 되면 떨어지려니, 종합감기약만 사 먹은 지 3주. 결국 병원에 가고야 말았다. 

감기라는 게 병원을 가나 안 가나 며칠은 달고 살아야 하고, 무엇보다 사람 많은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게 싫어 멋지게 버텨보려 했는데 굴복하고야 말다니. 원통하다. 


10월 15일, 70여 일을 준비한 첫 마라톤을 앞두고 걸린 감기. 조마조마함 끝에 대회 하루 전 호전되어 다행히 완주 성공. 그렇게 사라진 줄 알았던 기침이 되살아나 며칠 밤잠 못 자게 하더니만 또 잦아들었다. 





이제 감기도 떨어진 것 같고 하니, 이 가을 그냥 보낼 수 있나. 지리산 둘레길 1코스, 주천에서 운봉까지 14.7km. 5시간 반에 걸쳐 산을 타고 길을 걸었다. 

오랜만에 산에 오르니 예전 계룡산 날다람쥐 시절도 생각나고, 폭설로 한라산에 갇혔던 때도 떠오르고, 역시 몸을 혹사시켜 득하는 카타르시스가 생존의 기쁨을 차오르게 한다는 사실에 감격했다. 



지리산 능선을 오른편에 두고 숲길과 밭두렁을 걸으며 계절이 익는 그 순간, 그 현장에 내가 있었다는 것이 뿌듯했다. 아름답구나, 가을이 아름다워. 내가 이 긴 길을 걸었어. 안 무너지고 나 잘 살고 있어, 기특하고 대견해. 




이 망할 좀비 같은 자식. 그날 밤, 기침이 살아났다. 

고행길을 마치고 잠에 든 친구들에게 폐가 될까 참아보려 했지만 이건 의지로 당해낼 수가 없는 일. 예전 우리 할아버지처럼 마르고 거친 기침을 계속해 뱉어냈다. 미안하여라, 나의 친구들. 


나 좋자고 다녀온 지리산 둘레길 여행. 다음 날 가족과 이틀간 여행을 다녀왔다. 가족하고도 즐거워야 하니까. 

가족들이 걱정할까 싶어 멀쩡한 척해보았다. 머리도 안 띵하고, 졸음도 안 쏟아지고, 당장 안 눕고 싶고, 기침도 안 심해지는 것처럼. 


여행에서 돌아온 날 밤, 폐가 딸려 나오는 줄 알았다. 저 속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오는 기침. 이러다 오줌까지 싸겠어.   

남은 약을 전부 들이붓고 한방 감기약 한 병을 데워 마셨다. 기침이 힘든 것보다 이렇게 지지부진하는 내내 새벽 달리기를 못한 게 언짢다. 추워지기 전에 지리산 둘레길 다음 코스를 걷고 싶다. 


그래, 진 게 아니야. 병원에 갔다고 진 게 아니라고. 10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라 생각하면 되잖아? 아니 뭐 병원 간 거 가지고 자존심 상해하고 그래. 이상도 하다, 그 성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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