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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Nov 10. 2023

샴푸 버리기



지구에 참회합니다. 

제가 너무 막살았지요. 미쳤었나 봐요.  

화끈거리는 얼굴로 손발을 싹싹 빕니다. 


실오라기만 한 테이프 가닥도 남기지 않으려 택배상자를 벗겨내면서 생각한다. 상자를 만들기 위해 베이는 나무와 운송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와 쓰레기로 버려지는 완충재를. 

오프라인 매장에서 구입하는 게 맞는 걸까. 잽싸게 따라붙는 이유 1, 2, 3. 몇 천 원 더 비싸고 시간을 내 찾아가야 하고 무겁게 들고 와야 하는데.


정작 참회의 실천이 어려운 건 번거로움보다 의심 때문이다. 

나 혼자 이러는 게 의미가 있을까? 정책이 만들어지지 않고 기업과 산업이 모르는 척하는데 소용이 있을까? 이 뚜껑을 재활용 통에 넣으면 정말 다시 사용될까? 세상이 바뀔까?

의심이 날을 벼려 행동대장의 번뜩이는 무기가 되면 좋을 텐데 무력감은 모처럼 세웠던 날마저 맥 빠지게 한다. 





하지만, 한 번 사는 인생, 폼나게 살고 싶다. 

사두었던 샴푸를 다 쓰고 아쉬움 없이 마지막 병을 버렸다. 비누와 샴푸로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샴푸바 생활 시작. 



1일 차. 

초록색 비누 향기가 산뜻하다. 지구숲을 지키는 데 일조한다는 뿌듯함에 기분이 좋다


2일 차.

습관적으로 샴푸가 있던 자리에 손을 뻗으려 했지만 얼른 비누를 집었다. 샴푸만큼 거품이 많이 나진 않지만 서너 번 같은 동작을 되풀이 하면 감을만하다


3일 차.

요즘 날씨가 건조해서 그런 건지 머리가 조금... 간지럽다. 하지만 샴푸로 감았을 때도 간지러웠다! 그런데... 정확히 목격한 건 아니지만 머리에 하얀 뭔가가 묻은 것만 같은 느낌이... 살짝 들기도 한다.


4일 차.

왜 비누로 머리를 감으면 말릴 때 머리카락이 미끌미끌할까? 잘 헹구는데 왜? 


5일 차. 

내일은 회사에서 중요한 행사가 있다. 검은색 정장을 입어야 한다. 행사자리에서 머리를 긁으면 보기 좋지 않고, 혹시라도 어깨에 하얀 뭔가가 떨어지면 오, 맙소사,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손바닥에 난 깊은 상처로 그동안 비누질 하기도 쉽지 않았으니... 나 오늘만 샴푸 샘플 뜯어 쓸게. 미안...

(상쾌해! 이거야! 거품이 이렇게 잔뜩 나다니. 온 두피가 다 시원해. 역시 계면활성제 잔뜩 들어간 게 최고라니까! 머리카락도 아주 부드럽다고!)

 

6일 차.

내일은 행사도 없고 사실 머리가 그렇게 간지럽지도 않고 하루에 몇 번씩 거울을 보지만 하얀 뭔가는 머리에도 어깨에도 보이지 않으니 다시 초록 비누를 써야겠지. 

두피에 비누질 잘하고 머리카락 잘 헹구고 수건으로 잘 말린 뒤 드라이어 바람 쏘이니까 별로 미끄럽지도 않네?

그래, 나는 이렇게 비누질하면서 칼날을 갈래. 이게 내 방법이야. 폼 나잖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동을 하는 것은 

그 영향력의 크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그이의 삶의 태도이기 때문에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비단 하나의 행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삶을 대하고 살아가는 그이의 철학이 폼이 나느냐, 시시해 빠졌느냐, 그 문제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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