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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Dec 31. 2023

목숨 버리는 마음



고지서겠거니 했다. 청구서든 광고지든 돈을 요구하는 것들이라 생각했다. 아니었다. 일이 잘 처리되었다는 확답이었다.  


"당신의 결정을 존중합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증 재중



'사전연명의료의향서'란 후에 임종에 닥쳤을 때 연명 의료 행위를 수용할 것인지 거부할 것인지 나의 의사를 미리 문서로 밝혀두는 것이다. 


의식 없는 이에게 숨만 붙여 놓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나는 그런 목숨에 미련 없다, 가족들도 친구들도 저마다 쿨한 다짐들이었지만 테이블에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작성하는 것은 다른 일이었다. 


십 년쯤? 의향서는 쓰지 않은 채 '그런 목숨'에 미련 없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다녔던 것이.  

2023년 12의 어느 날, 의향서를 든 사람이 우연히 아니, 필연히 나타났고 10장을 내도 된다면 10장 모두 쓰고 싶은 마음으로 꼼꼼히 빈칸의 나를 적어 냈다. 개운했고 뿌듯했다. 


하루 이틀이 지나 다시 잊고 지냈다. 남은 목숨을 버려야 할 언젠가는 먼 어느 날일 거라 생각했고 지금의 매일은 할 일들이 넘쳐났다. 의향서의 빈칸을 채운 것보다 박에게 하지 말았어야 했던 말, 김이 오해 없이 이해할 수 있었던 코멘트 같은 것들을 더 기억하며 살았다. 


'국립연명의료관리기관'이라는 발신인을 보았을 때 내 마음이 어떠했던가. 

어찌하여 멈칫했었는지 그 이유를 나는 알고 있지. 


우편물이 올 거라는 걸 모르고 있던 상황에서 당혹스러웠다. 나를 데리러 온 것 같았다. 아주 먼 언젠가를 약속했는데 지금의 나를 데리러 온 것만 같았다. 숨이 끊이지 않게 폐 깊숙이 들이마셨다, 나도 모르게. 죽고 싶지 않았다. 오래도록 눈 뜨고 있고 싶었고 소리 내고 싶었다. 만지고 싶었고 만져지고 싶었다. 살고 싶었다. 


10초. 삶과 생명에 욕심이 가득 찬 시간. 내놓고 싶지 않은 마음이 가득했던 시간. 

그리하여 폭소했던 시간. 


이천이십사 년, 새해는 각각의 하루를 마음에 들게 살기로 한다. 

남은 목숨을 버리는 마음에 아까움이 일지 않도록. 

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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