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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주 Jan 22. 2024

간신히 마음먹을 때마다_버리는 마음


물들 어떻게 드십니까?


정수기는 놓고 싶지 않다. 정수 여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데 매달 돈을 쓰는 것이 아깝고 웬만하면 짐 늘리지 말고 살자는 주의인 데다 낮엔 늘 일터에 나와 있으니 관리 서비스를 받기도 어렵다. 저녁과 주말만큼은 내 마음대로 시간을 휘두르고 싶어 정수기 관리하느라 약속을 잡고 스케줄을 조정하고 시간을 비워 관리받는 시간 동안 불편한 얌전을 떨어야 하는 것이 생각만 해도 마뜩잖다. 


예전엔 보리차나 결명자차를 끓여 먹기도 했는데 큰 주전자에 끓여봐야 이삼일이면 동이 나고 좀 더 큰 냄비에 끓이면 물병에 물 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까치발을 하고) 냄비를 들어 물을 붓는 것은 고난도의 스킬을 요하기도 하거니와 가뜩이나 약한 손목 아자작 소리 내며 바수어지기 십상. 국자로 일일이 물병에 담아도 봤는데 도 닦는 기분이 신선하긴 했지만 매번 그리하기엔 손목도 중허지만 몹시도 범상한 나의 성질머리도 존중은 해줘야 하니까. 

설거지 문제도 있었다. 세제를 사용하지 않으면 물병에 냄새가 배고 물때가 낀다. 세재를 사용하면 거품이 인 만큼의 물을 정화하기 위해 얼마큼의 또 다른 물을 써야 하는지. 


그래서 얼마나 잘난 방법으로 물을 마시느냐 하면, 사 마신다. 대형 마트에서 한 번에 수십 병씩 사 와 쌓아 놓고 마신다. 외국 기업이어서 팔아줘 봐야 우리나라 세입에 큰 도움 안 된다지만 싸니까 산다2L 한 병에 300원이 채 안 되니 기후악당의 오명이 부끄럽지도 않으냐며 정부에 삿대질을 하다 말고 마트에 가 물을 산다. 매주 페트병 수십 병씩을 내다 버린다. 

정수 여부? 어떻게 알겠는가. 엄격한 과정을 거쳐 기적처럼 청량한 물이 물병에 담긴다 해도 미세 플라스틱을 마신다는 생각을 종종 할 뿐이다. 

짐스럽지 않은지? 모른다. 베란다 구석,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쌓아둔다. 보고서야 믿을 수 있었던 예수의 미련한 제자보다 내가 어찌 나을 수 있겠는가. 일단 안 보이면 되는 것.

마트 가는 시간? 물만 얼른 사 오자고 들어가 과자 코너에 가 이것저것 고르고 와인 코너 들렸다가 맥주 코너도 들리고 냉동식품 코너도 들렸다 빵 코너도 들렀다 온다. 돈 수천만 원 쓰고 시간 들여 쇼핑하느라 지쳐 집에 돌아오면 또 얼마큼은 쉬어주어야 한다. 시간을 휘두르려는 자 외국 마트에 휘청거릴지니.


어제 갑자기 동거 청소년이 '보리차 끓여 먹자. 맛있어' 해서 큰 마음을 먹었다. 그래. 투명 폐플라스틱 그거 재활용률도 얼마 안 된다더라. 잘난 척을 할 거면 멋진 일을 하고 폼나게 하자. 귀찮음을 이겨내자. 잘난 척을 하고 싶다. 


물병은 웬만하면 세제를 쓰지 않는 선에서 닦아보자. 폐플라스틱 배출 줄이고 그레타 툰베리한테도 떳떳해지자. 손목도 지켜야 되고 성질머리도 존중해야 하고 이웃도 소중하니 국자로 물을 담을 때마다 내가 아는 한 명씩을 위해 기도를 하자. 청수 한 사발 떠놓고 비는 마음으로 세월아 네월아 물을 담자. 물 끓이는 전기레인지도 태양광으로 작동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실내용 자가발전 자전거를 사? 


기특한 의지를 북돋으며 찬장을 열었는데 오호! 결명자차가 있어! 이런, 맙소사!!!

그래. 늘 뭔가 하려고 하면 유통기한이 지나있지. 4년도 넘게.   



이제 나는 어쩌지. 간신히 먹은 마음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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