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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인형 Jan 27. 2022

뼈와 살에 수치심이 쌓이면

[완독 일기] /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 / 문예출판사

단백질, 탄수화물, 지방, 비타민, 무기질… 음식을 먹을 때마다 우리 몸 어딘가에 영양분을 제공할 음식. 하지만 음식을 먹을 때마다 혈관에, 장기에, 근육에 수치심이 쌓인다면? 이럴 때 생명 유지를 위해 먹는 음식은 독이 된다. 그리고 여기 (독이 들었을지도 모르는)음식을 먹는 여자들이 있다. 그것도 히틀러를 위해.


「히틀러의 음식을 먹는 여자들」은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가 먹을 음식에 독이 들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미리 시식을 해보는 일을 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다. 히틀러의 시식가이자 유일한 생존자였던 마고 뵐크의 고백을 바탕으로 쓴 소설. 작가는 열 명의 시식가들과 관련 인물들을 통해 전쟁이 인간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나아가 인간은 어떻게 생겨먹은 종족인지 묻는다.


열 명의 시식가들은 모두 독일 여성이다. ‘광신도’라는 별명을 가진 한 무리는 히틀러를 숭배하는 이들이다. 히틀러가 세상을 구원하고 자신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는다. 어떤 이는 히틀러에 분개한다. 그는 독재자일 뿐이다. 주인공 로자는 히틀러나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삶을 맡기지 않는다.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 희망도 잃은 로자에게 삶은 하찮다. 로자가 독일 친위대 중위와 사랑에 빠진 건 하찮은 삶에 의미가 필요해서일 수도 있고, 살아있는 상태로 존재하는 것을 멈췄기에 가능한 것일 수도 있다.


내 인생에 반기를 들기로 했다. 그날 나는 나를 크라우젠도르프에 있는 제3 제국의 식당으로 이송하는 버스 안에 앉아서 존재하는 것을 멈췄다. / 122p


책 첫 장의 내용이 워낙 강렬해서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음식에 독이 들어있을지도 모르지만 허기가 극에 달한 여자들은 독 따위는 제쳐두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는다. 그렇게 허기를 채우고 나면 수치과 모멸감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음식을 토해버리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하지만 몸 안에 들어간 음식조차 히틀러를 위한 것이므로 함부로 배출할 수 없다.

매끼 내 앞에 일렬로 나란히 놓이는 접시 열 개는 주님의 몸으로 만들어진 영성체처럼 끊임없이 히틀러의 존재를 환기시켰다. 하지만 성당과 달리 이곳에는 영생의 약속 따윈 없다. 한 달에 200마르크 그것이 우리들의 대가였다. / 82p


히틀러의 식당에 모인 열 명의 여자들 중 한 명이 나라면? 머리에 겨눠진 총구 앞에서, 극한 허기 앞에서 나 또한 숟가락을 들었을 것이다. 언제 먹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달콤한 케이크를 보면 나의 본능은 침샘을 공격할 것이다. 먹어! 어서 먹어! 독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야! 이건 히틀러를 위하는 일이 아니야. 너의 뼈와 살을 위해 먹어! 이렇게 주문을 외우겠지만 위가 가득 찬 후에는 슬픔이 밀려올 것이다. 방금 먹은 음식은 뼈와 살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달콤한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고 자조할지도 모른다.


작가는 대놓고 ‘인간은 미친 종족(359p)’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런 종족의 본능을 충족시켜서는 안 된다’라고 해결책도 제시한다. 로자가 베를린으로 향하는 기차의 짐칸에서 다른 가족과 소박한 식사를 하는 장면은 세상에는 히틀러의 음식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알려준다. 인간은 모순된 존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잃지 말라는 작가의 메시지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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