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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인형 Feb 08. 2022

내 몫의 책임을 생각하는 일

[완독 일기 / 관리자들]

관리자들 / 민음사

이렇게 직설적인 소설을 오랜만에 읽었다. 대놓고 심장을 찌른다. 그러면 안 된다고! 그렇게 살지 말라고!


건설 중인 아파트가 무너져 인부들이 숨지고, 채석장이 붕괴돼 사람이 매몰됐다는 뉴스가 연이어 나오던 즈음, 이 책을 읽었다. 뉴스 화면에는 허리를 숙이고 사죄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계속 나왔다. 책임을 지겠다는 사람들, 그들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굴착기 기사 현경은 회식 중인 인부들이 있는 식당을 향해 굴착기를 몰고 폭주한다. 함께 일하던 동료 선길이 죽고 그 사건이 마무리된 후의 회식이다. 현경은 왜 동료들을 향해 굴착기를 몰고 돌진한 걸까? 선길은 왜 죽은 걸까?


선길은 일머리가 없고, 위험한 작업은 하지 않으려 하고, 전화기를 든 채 자주 자리를 비운다. 이런 이유로 동료들에게 눈총을 받고, 은근한 왕따를 당하기도 한다. 선길이 자주 자리를 비우는 것은 소아암 병동에서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의 상태를 수시로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험한 일에 선뜻 나서지 않는 것은 자신이 잘못되면 아이를 건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런 선길에게 야간 경비 업무가 맡겨진다. 공사장 식당에서 사용하는 식자재 보관용 비닐하우스가 멧돼지의 습격으로 쑥대밭이 됐다는 것이 이유였다. 언제 내려올지 모르는 멧돼지를 기다리는 것이 선길의 임무가 됐다. 난방도 되지 않고 통신도 잘 잡히지 않는 컨테이너에서 어둠에 묻힌 채 멧돼지를 기다리는 선길은 추위와 두려움으로 나날이 초췌해진다.

새벽이 깊어 갈수록 선길이 바라는 것은 단 하나였다. 날이 밝는 것, 무엇이 있는지 모를 시커먼 산에 다시 빛이 비치고 사람들이 와서 사무실에도 다시 전등이 켜지고 식당에 밥 짓는 김이 솟아 창문 없는 방 같은 이 방에서 벗어나는 것. / 32p      

하지만 멧돼지는 없다. 식자재 비용을 빼돌리기 위해 현장 소장이 꾸며낸 일이다. 멧돼지의 습격을 받은 것처럼 비닐하우스를 엉망으로 만든 건 세상 물정 모르는 사회 초년생 한 대리다.


굴착기 기사 현경은 힘들어하는 선길에게 자꾸 마음이 쓰인다. 자신의 일만 잘하면 된다고 애써 외면하지만 현경에게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한 대리에게 비닐하우스 주변을 굴착기로 파서 멧돼지가 넘지 못하게 해 주겠다고 제안해보지만 소장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소장은 공기를 맞추기 위해서,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서 반장들을 불러 무리하게 공사를 진행할 것을 지시한다. 회사가 살아남아야 인부들도 일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협박과, 잘만 해주면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하겠다는 회유를 적당히 섞어서. 소장의 협박과 회유에 넘어간 반장들은 다시 자기 반의 인부들을 다그친다. 우리가 해내야 회사에서도 우리를 인정해주고, 보상을 해준다고. 공사 기간을 줄이기 위해 안전은 무시된다. 야근과 주말 특근을 일삼던 인부들은 체력의 한계를 느껴 현장에서 술을 마시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국 안전 문제로 선길이 죽음에 이르는 사고가 발생한다.


선길의 죽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소장의 협박과 회유는 계속된다. 자신의 책임을 최소화하기 위해 사건 현장을 조작하고 인부들의 입을 단속한다. 이 과정에 선길의 동료들도 조금씩 거짓을 보탠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사람은 어차피 이기적이고 타인에게 무관심한 존재’라는 말들이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다닌다. 선길의 죽음을 외면하고 심지어 죽음의 원인을 조작하는 일에 힘을 보탠 이들에게 이런 말들은 자신의 책임을 무마하는 명분이 된다. 께름칙한 미안함과 죄책감은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하지만 현경은 달랐다. 사람의 행동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만 어쨌든 각자의 몫만큼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현경의 생각이다. 그런 이유로 현경은 굴착기를 몰고 식당으로 돌진한다.     

각자가 각자 져야 할 짐을 지는 것뿐이다. 진실이란 오직 그렇게 스스로 짊어지는 것으로만 지탱될 수 있는 것이다. 각자의 몸만큼, 각자의 몫만큼. 책임감, 도덕, 그 밖에 소장이 이야기한 모든 번드르르한 것들이 마찬가지다. 자신의 몫부터 하고 난 다음에, 감당해야 할 것들을 스스로 감당한 다음에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소장부터 그렇지 않았기 때문에 선길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168p     


‘자기 몫만큼의 책임’이라는 말의 여운이 길다. ‘나도 잘못했지만 너도 잘한 건 없잖아!’라는 말로 문제를 뭉개버리는 어리석음. 우리 다 책임이 있으니 우리 모두 모른 척해도 된다는 비겁함. 위계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업무를 해왔음에도 문제가 발생했을 때 책임의 몫은 n분의 1이 되는 아이러니.


작가의 일침이 정신을 번뜩 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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