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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인형 Jan 19. 2022

제사상에 제 글을 올려도 될까요?

[완독 일기 / 시선으로부터]


시선으로부터 / 문학동네
"전 읽는 걸 좋아하는 거지 쓰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25p)


딱 내 얘기였다. 다독가이자 탐서가인 나는 활자중독이 아닌가 싶을 만큼 읽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읽지만 말고 뭐라도 써봐’라는 얘기를 종종 들었지만 읽는 즐거움을 누리는 데만도 시간이 부족했다. 「시선으로부터」는 그런 나를 쓰고 싶게 만들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이 땅의 모든 ‘시선’들에게 헌사를 보내고 싶었다.     


“엄마 제사를 지내야겠어.”(10p)


「시선으로부터」는 심시선의 10주기를 맞아 자손들이 하와이에서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하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제사라면 상 위에 수북하게 쌓인 제사음식과 홍동백서가 먼저 떠오르는 나에게 하와이에서의 제사라니(이 책이 ‘하와이에서 제사 지낼 때 필요한 예절’을 가르쳐주는 책이었어도 아마 신나게 읽었을 거다).     

심시선은 하와이, 독일, 파리, 한국을 거치며 화가이자 작가로 살았다. 두 번의 결혼을 했고 그 과정에서 직접 낳거나 낳지 않은 3남 1녀를 두었으며 5명의 손녀, 손자가 있다. 독특한 가계의 구성원답게 이들은 하와이 곳곳에서 각자의 방식대로 심시선을 기릴 물건이나 경험을 수집한 후 제삿날 공유하기로 한다. 폭력과 혐오와 부조리로 가득한 시대를 고개 꼿꼿이 들고 돌파해낸 심시선. 후대에 이어질 절망의 끈을 한가닥이라도 더 끊어내려 한 인생 선배. 그를 위해 단 한 번의 제사를 준비하는 사람들. 책을 다 읽은 지금도 나는 그들과 함께 있고 싶다. 정성껏 쓴 헌사를 심시선의 제사상 위에 올려놓고 싶다.     


“말하는 여자는 미움받으니까, 뭐 기왕 미움받고 있는 내가 해버리자, 그런 마음도 있었습니다. 스스로를 아낄 줄 아는 사람들은 노출되는 자리를 신중히 삼갈 줄 아니 누군가는 내 또래 여자들의 이야기를 해야 했지요. (중략) 나 다음 사람이 또 나처럼 화살을 맞고 싸움에 휘말리고 끝없이 오해받을 걸 생각하면 아득하지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합니다. 신경줄이 너무 가늘지만 않으면 할 수 있어요.”(326p)     

각 장은 심시선의 글이나 강연 내용으로 시작한다. 심시선은 쓰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여성에게 마이크가 주어지지 않던 시대, 날아오는 뾰족한 시선을 받아내면서도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건 격렬한 싸움이었다. 심시선의 시대는 ‘단어’가 없었으므로 그가 독일 화가 마티아스 마우어에게 겪은 일이 그루밍인지 가스라이팅인지 정의할 수 없었다. 심시선은 자신이 틀린 말도 하고 앞뒤가 어긋나는 말도 했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말하기를 멈추지 말라고 당부한다.     

나의 외할머니는 ‘속 시끄러워 살 수가 없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다. 오장육부에 듣는 기능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가 심장 언저리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닌데 속이 시끄럽다니. 어린아이인 나는 이해하기 어려운 그 말을 참 자주도 하셨다. 이제 중년이 된 나는 속 시끄럽다는 말이 뭔지 안다. 속이 시끄러울 때 그 소음을 꺼내서 토닥이고 맑은 기운으로 헹궈내야 한다는 것을 안다. 많은 이들이 나의 외할머니처럼 한숨 한번 내쉬는 것으로 시끄러운 속을 달래셨을 테지만 또 어딘가에서는 심시선같은 할머니들이 날아오는 창을 막아주었다. 심시선의 손녀인 지수의 이야기는 같은 맥락에서 인상적이다.     


“지수는 화수와 세상 사이의 완충재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공기가 든 포장재 같은 것, 인도와 도로 사이의 화단 같은 것, 자동차 문에 붙은 스티로품 범퍼 같은 것.”(54p)     

염산 테러로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언니 화수에게 동생 지수는 문지기 역할을 한다. 때로는 위로를 빙자한 아픈 말로 화수를 공격하는 사람들을 차단하기도 한다. 네트 가까이에서 손을 번쩍 들어 수비벽을 만드는 배구선수만큼 매력적인 인물이다.      

내 옆에 화수처럼 상처받은 사람이 있을 때 블로킹까지는 아니라도 소소하게 ‘뽁뽁이’ 역할이라도 할 수 있기를. 읽은 후 좋은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드는 책이 좋은 책이라고 생각해왔다. 정세랑 작가의 책은 그래서 참 좋은 책이다.     


“쓰는 게 뭐 대단한 것 같지? 그건 웬만큼 뻔뻔한 인간이면 다 할 수 있어. 뻔뻔한 것들이 세상에 잔뜩 내놓은 허섭스레기들 사이에서 길을 찾고 진짜 읽을 만한 걸 찾아내는 게 더 어려운거야.”(166p)      

작가는 예술이 존속하는 것은 예술작품을 만들어내는 사람보다 그것의 가치를 알아내는 사람들 덕분이라고 말한다. 그저 독자일 뿐인 내가 공치사를 받는 기분, 나쁘지 않다. 더 신나게 읽어야지!     

「시선으로부터」는 곳곳에 예술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다. 특히 시선의 며느리인 난정의 책 읽기는 그것을 잘 보여준다. 난정의 딸 우윤이 어린 시절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병과 싸울 때 난정은 아이를 돌보며 끝없이 책을 읽는다. ‘죽음을 생각하지 않으려면 읽어야 한다’고, ‘죽음에 대항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행위는 읽기’라고 생각하면서. 이 책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예술과 관계된 일을 한다는 점에서도 작가의 예술 세계에 대한 관심이 드러난다. 화가이자 작가인 시선, 고고미술학자인 명은, 회화 복원 전문가 명준, 웹디자이너 경아, 디제이 지수, 콘셉트 아티스트 우윤까지. 심시선의 성격은 물론 ‘영혼까지 닮은’ 이 예술가들의 이야기는 예술에 대한 나의 인식을 ‘심오한 것’에서 ‘신선한 것’으로 바꿔주었다.     


“보드 밑에 느껴지는 힘은 우윤이 만나보지 못한 거대한 동물의 일부 같았다. 바다의 힘, 지구의 힘, 모험과 죽음의 힘. 우윤은 계속 계속 나아갔다. 환호하며, 웃으며, 자부심을 느끼며. (중략) 우윤과 똑같이 물에 흠뻑 젖은 죽음이, 어린 시절 그렇게 두려워했던 대상이 투명한 팔을 우윤의 어깨에 잠시 두르고 기이한 격려를 해주었다.”(290p)     

우윤은 아픈 아이였고 어른이 된 지금도 약한 몸으로 가족들의 걱정 가득한 시선을 받아내고 있다. 우윤에게 운동은 금기였다. 그런 우윤이 하와이에서 서핑을 배우기 시작했다. 완벽하게 파도를 타고, 그 파도의 거품을 할머니 제사상에 올리겠다는 결심과 함께.     

내게 바다는 그 광활함 때문에 공포의 이미지에 가깝다. 어느 지점에 내가 가야 할 길이 있는지 보이지 않아 막막하고, 얼마큼 깊이 들어가야 발을 디딜 수 있는지 두렵다. 우윤은 삶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는 자신의 모습을 할머니에게 보여주고 싶었을까. 그는 서핑을 할 때마다 물에 빠지고 긁히고 근육이 비명을 지를 만큼 통증에 시달리면서도 도전을 멈추지 않는다. 우윤의 모습에서 시대를 돌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인다. 각자의 삶에서 허우적거리다가 물에 빠지기도 하고, 간신히 힘을 내서 물 밖으로 얼굴을 내밀어 숨을 고른다. 얼굴을 내민 순간 운이 좋다면 반짝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무지개를 보는 날도 있겠지. 그리고 다시 허우적거리기를 반복하면서 파도를 탄다.     

지수가 할머니 제사상에 올린 완벽한 무지개 사진은 우윤처럼 몸과 마음이 너덜너덜해진 사람들에게 건네는 비타민 같다. 치료제는 될 수 없지만 활력은 줄 수 있는 비타민.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331p)     


나의 엄마와 할머니의 삶을 생각한다. 그들이 견뎌낸 시간들을 상상한다. 그들의 인생은 절대 한마디로 표현되지 않는다. 비록 심시선처럼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애정을 담아 들여다보면 그들의 이야기는 충분히 입체적이다. 그 이야기들이 나의 시간으로 흘러오고 내가 견뎌낼 시간들이 나의 아이에게 전해질 것이다. 나의 어머니, 할머니… 그들로부터 받은 따뜻한 시선에 감사하며 사랑을 담아, 제사 지내는 마음으로 이 책을 곳곳에 놓아두고 싶다.     


덧붙이며.      

160p 난정과 딸의 대화     

“엄마, 아빠랑 너무 안 노는거 아냐? (중략) 황혼 이혼이라도 할까봐 걱정인가봐.”     

“엄마 아빠가 아직 황혼은 아니지”     

“황혼하고 이혼 중에 황혼이 신경쓰였어?”     

89p 남편이 아내의 죽음을 기리며 만들었다는 비숍박물관을 방문한 난정과 명준 부부     

“여보가 죽으면 나도 뭐 만들어줘? 건물 하나 지어?”     

“나보다 장수할 것 같아? 야심 있네.”     

난정이 모자를 접어 가방에 넣으며 코웃음쳤다.     

정세랑 작가의 특기 중 하나는 웃기는 것이다. 방심하고 읽다가 어느 순간 입가가 실룩 실룩댈 때는 정세랑의 한 줄 마법이 작용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 특별하지 않은 단어로, 대수롭지 않은 상황에서 한마디 툭 던지는 작가는 독자들이 낄낄거리는 사이에 모른 척 제 갈 길을 간다. 인용한 부분 외에도 책 곳곳에 포진한 웃기는 이야기만으로도 이 책은 읽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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