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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금인형 Jan 21. 2022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

[완독 일기 / 법정의 얼굴들]

법정의 얼굴들 / 모로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

만화 ‘세일러문’을 보지 않았더라도 이 말은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만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농담처럼 이 말을 자주 했다. 정의가 뭔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살면서 법원에 갈 일이 없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민사소송에 휘말린 적도 없고 형사소송과 관련된 적도 없다. 가정법원에 갈 일도 (아직까지는) 없다.

그러니 내게 법정은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곳이다. 멋진 오피스룩을 입은 여검사, 변호를 하기 위해 재킷 버튼을 잠그며 자리에서 일어나는(이거 좀 진부하지 않나요?) 남변호사, 법복을 입고 근엄하게 앉아있는 판사. 그리고 지지부진하던 사건이 변호사나 검사의 한방으로 멋지게 역전되는 순간들(이것도 좀 클리셰...). 아무튼 법정은 나와는 먼 어느 곳에 존재해왔다. 「법정의 얼굴들」을 읽기 전까지는.


저자는 ‘말과 글로 안간힘을 쓰고 있는’ 판사다. 이 책은 법정에서 그가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당연히 법정에서 유무죄를 가려야 할 범죄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아동학대, 살해 후 자살, 성범죄, 마약범죄, 생계형 범죄, 정신질환으로 인한 범죄 등 다양하다. 단, 저자는 이 범죄들이 왜 일어났는지, 범죄와 관련된 사람들에게는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깊숙이 들여다봄으로써 독자들이 함께 고민해볼 지점을 만들어준다.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이 갖춰야 할 최소한의 생존 방식은 더불어 사는 건데, 몇몇 사람을 집어삼키는 블랙홀이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면, 우리 모두 그곳으로 빨려 들어가지 않으리라는 장담 역시 할 수 없는 것 아닌가. / 22p


뉴스 헤드라인을 보며 욕을 하기는 쉽다. 또 그렇게 욕이라도 해야 분이 풀린다. 그런데 무엇을 위한, 누구를 향한 분풀이인가? 헤드라인에 등장한 단어 몇 개에 분노하지 말고, 그 일이 왜 일어났는지 들여다보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러고 나서 욕을 해도 늦지 않다. 어쩌면 뇌가 시간차 공격을 당해 욕할 마음이 사그라들지도 모른다.


AI가 판결을 하는 세상이 온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재판은 사람이 하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그 판결에는 어떤 신뢰가 있나? 정당성이 있기나 한가? 차라리 AI가 하는 판결이 더 믿음직한 것 아닌가? 솔직히 말하면 어떤 사건에서 판결이 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면 판사 험담을 좀 했다. 그리고 믿을 사람이 없다며 개탄을...(판사님들, 죄송합니다)

「법정의 얼굴들」은 진영 논리에 따라 판결을 불신해온 나에게 다른 시선을 가져보라는 숙제를 주었다. 법정의 얼굴들, 결국 사람들이다. 얼굴에 담긴 이야기들은 제각각이지만 어쨌든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는 이들이기에 판결을 내리는 것도 사람이 해야 할 일이다.


형사재판장은 형벌 말고는 달리 세상에 기여할 수단이 없다. 사람을 바꾸고 바위를 깰 수 있는 내가 가진 유일한 무기는 말과 글뿐이다. 공감과 언어가 가진 힘을 알기에, 사람들이 법정에 서는 순간이 흔치 않을 것이기에, 그 순간이 각인된다면 그들의 인생을 바꾸는 결정적 순간이 될 수도 있기에 나는 법정에서 말과 글로 안간힘을 쓰고 있다. / 197p     


이런 글을 쓰는 판사라면 좀 믿어도 되지 않을까?     


못 배우고 없는 사람들은 부끄러움을 좀 덜 느끼고 좀 더 뻔뻔하게 살아도 되지 않을까? 사회적 염치에는 가중치가 있다. 나는 염치는 권력과 자본, 부와 사회적 책임, 지식과 정보가 집중된 곳에 누진 적용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래서 나 같은 사람들이 욕을 훨씬 더 먹어야 하는 거다. / 227p     


이런 생각을 가진 판사라면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치 않겠다!’라고 말해도 되지 않을까?


#법정의얼굴들 #박주영 #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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